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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시험과 복된 삶

by 북드라망 2026. 1. 21.

시험과 복된 삶

이 윤 하(남산강학원)


얼마 전 사라학교에서 첫 시험기간을 보냈다. 이곳도 학교답게 일 년에 두 번 시험을 치르고 점수가 안 좋으면 원칙적으로는 유급도 한다. 다람살라에 와서는 처음 치르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시험 준비도 준비지만 어떤 시험문제가 나올지, 어떻게 시험을 볼지 무척 기대가 되기도 했다. 우리 반은 ‘불교 과학과 철학’반이라 어학과정의 외국인 친구들과는 다르게 대학과정의 티벳 친구들과 함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티벳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 섞여서 치른 시험 시간은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시험 첫 날 여느 교실이 아니라 학교 법당에서 시험이 치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이 지켜보시는 아래, 몇 십 명의 학생이 널찍이 거리를 두고 앉아 시험을 보았다. 불단 앞에도 자리가 놓여있어서 평소에는 올라갈 일이 없는 위쪽 계단도 밟아보게 되었다. 세 번째 시험 때는 무려 법좌 바로 옆 자리에 앉게 되어 부처님의 자애로운 시선을 등 뒤에 느끼며 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보러 들어갈 때 티벳 친구들이 삼삼오오 손에 길쭉한 자를 들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자를 어디에 쓰는 거지? 했는데, 시험이 시작되기 전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은 문제를 풀기 전, 가로줄만 있는 시험지 양 옆에 세로로 두 줄을 그었다. 글자가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을 정돈하기 위해서였다. 그밖에도 친구들은 잉크병과 만년필을 들고 와 정성껏 글을 썼다. 신선한 장면이었다. 종이에 정갈하고 아름답게 글씨를 새겨 넣는 것이 시험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내용과 형식이 아름답게 맞물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사라학교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은 ‘티베트학’으로, 티벳어 문법, 티벳 역사, 티벳어 글쓰기, 불교, 네 과목으로 나뉜다. 학생들의 아름다운 글쓰기는 자신들의 공부와 티벳어 자체에 대한 존경심,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도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쓴 글이나 시를 교실 밖 게시판에 붙여두기도 하는데, 모두 손으로 써낸 것들이다. 글씨가 너무 예뻐서 필기체를 따라 연습하려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첫 날 친구들을 보고 나도 둘째 날부터는 평평한 닙의 만년필을 들고 가 열심히 글씨를 그렸다).

 

잉크병과 자를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티벳 학생들

 

 

시험장의 불단 뷰

 

 

불보살님들의 주시가 느껴지는 시험장

 

 

게시판에 붙은 티벳 학생의 작문 종이. 글씨가 무척 훌륭해서 필기체를 가르치시는 스님이 특별히 칭찬도 하고 지나가셨다.


법당에 들어가니 각 책상마다 노란표지가 있는 빈 답안지 다발이 놓여있었고, 앉아있으니 선생님들이 학생의 얼굴을 보고 알맞은 질문지를 나눠주셨다(세 반이 한 공간에서 함께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세 종류의 시험지를 각 반의 학생에게 나눠줘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한 번은 시험지를 든 스님께서 나에게 내 옆 자리의 3학년 티벳 학생이 같은 반이냐고 눈짓으로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글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스님과 선생님을 섞어서 쓰게 되는데 학교의 선생님 절반 이상이 스님이시다). 질문지를 받고 나서는 빈 답지에 답을 쓰면 되었다. 긴장감이 흐르면서도 느슨한 시험장의 분위기가 아주 신선했다. 선생님들께서는 학생들의 부정행위를 막아주기 위해 책상 사이사이를 돌아다니시며 학생들을 지켜보셨지만, 시험시간이 장장 3시간이나 되다보니 후반부에는 법당 뒤편에 앉아 쉬시며 시간을 보내시거나 바람을 쐬러 나갔다 오시기도 했다. 시험 첫째 날에는 한 학년의 시험 문제를 내신 스님께서 문제가 잘못되었다며 시험장에서 육성으로 수정을 요하셨다. 그런 느슨함이 아주 재밌었다! 둘째 날에는 펜 잉크가 떨어졌다는 학생에게 스님이 잉크인지 펜인지를 가져다주시기도 했고, 옆 동네 학교인 IBD 총장님께서는 학교에 방문했다가 시험장을 구경하시며 우리 반 친구들 두 명의 답안지에서 틀린 철자를 고쳐주시기도 했다(한 친구는 너무 기본적인 단어의 철자를 틀려 부끄러웠다고 하긴 했지만). 우리에게 ‘불교 철학’ 과목을 가르쳐주신 C스님께서는 우리반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친히 문제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없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다! 그 순간도 얼마나 웃기던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틀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게 도와주어 답을 최대한 잘 써내도록 도와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날 내 뒤편에 1학년 티벳 학생이 앉아있었는데, C스님께서는 그 학생과 속닥속닥 한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학생이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신 것 같았다. 우리 반 학생들이 외국인들이라 특별히 봐주신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는 철저한 면도 있었다. 우리가 받는 답안지의 표지에는 학생번호와 날짜, 과목 등을 쓰는 칸이 있었다. 학생들은 시험 직전 담당 선생님께 받은 학생번호를 표지 귀퉁이에 적는데, 답안지를 걷는 선생님께서는 그 번호를 잘라내고, 해당번호와 1:1로 대응하는 다른 번호를 표지의 다른 칸에 적는다. 그러면 답안지를 채점하는 담당 선생님께서는 다른 번호가 적힌 답안지를 받기 때문에, 어떤 학생이 답안을 썼는지 알지 못하시는 채로 채점을 하시게 된다. 편애하는 마음 등이 끼어들지 않도록, 혹은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없도록 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인 것이다.

우리 반은 평소에 공부하던 네 과목 중 세 과목만 시험을 치렀다. 불교 과학, 불교 철학, 불교 수행 시험이었다(수행을 어떻게 시험을 볼 수 있겠느냐는 반 친구의 불평이 있기도 했지만). ‘불교 과학’은 불교에서 체계화한 법phenomena체계에 대한 과목이고, ‘불교 철학’은 인도 나란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구분하는 4개 학파의 철학에 대한 과목이며, ‘불교 수행’은 짧고 핵심적인 게송을 중심으로 대승 수행에 관해 배우는 과목이다. 예를 들어 ‘불교 과학’의 시험 문제는 “근취인(近取因)의 정의와 예시, 구유연(俱有緣)의 정의와 예시, 항아리의 원인과 결과는 ‘동의’인가를 쓰시오.”, ‘불교 철학’의 경우에는 “설일체유부의 오위법과 6인(因)이 무엇인지 쓰시오. 그중 상응인(相應因)과 변행인(遍行因)의 관계는 몇 구(區)인지 쓰시오” 라는 식의 암기와 약간의 논리를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면, ‘불교 수행’의 경우에는 수행 과목답게 이런 문제가 나왔다. “자타교환법의 수행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관해 수행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 다음 다음 문제는 무려 “공성을 명상(수행)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명상(수행)하십니까?”였다. 12문제 중 10문제를 고를 수 있었기에 (지금 수행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주제라고 생각해 공성을 명상하거나 수행 삼을 생각을 못했던 나는 흠칫하며) 이 문제를 답하지 않고 넘겼지만, 아침 명상에 공에 관한 명상을 추가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와 산책한 동네 길


다른 교육기관에서 어떻게 불교를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는 기간이 아주 특별하다고 느낀다. ‘불교’라는 이름의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내가 배우고 생각하는 것들은 세계와 사람의 마음이다. 또, 세계를 보는 방식과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앞 단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그것이 수행의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년 전, ‘신서유기’라는 청년 프로그램으로 처음 남산강학원에 상주하는 학생이 되었을 때, “책이 안 만나지고, 질문이 안 생겨요”라는 내 질문에 곰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다. 공부는 원래 기다림일뿐더러, 그렇게 질문이 생기지 않는 건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니) 한편으로는 복이 많아서 그런 것이고, 공부를 하다보면 얼마나 자신이 복이 많은지 알게 될 거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참 오래 품고 있었는데 내가 복이 많다는 걸 모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꼭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 말씀을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고, 불교를 공부하게 된 지금은 그것을 또 다른 차원에서 깊이 수긍하게 된다. 나는 정말 복이 많다. 전생에 쌓은 공덕이든, 아니면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서이든, (당연히 어떤 이에게는 내 삶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상대적 의미에서든 절대적 의미에서든 큰 복을 누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복을 많이 누린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무엇이 되었든) 주어야 한다고도 느낀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 말로 우주적 차원의 ‘먹튀’랄까(어느 날은 친구들이랑 산을 내려가다가 구를 뻔한 적이 있는데, 친구의 조심하라는 말에 “나는 여기서 안 죽을 거야, 아직 내 공부를 회향 못했어.”라는 대답이 튀어나온 적이 있다. 그때 정말 나는 당분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불교 수행’ 수업에서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서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 수업시간이 내게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걸 배우는 곳이 있다고? 마치 국어, 수학, 과학 이런 과목을 배우듯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단계에 대해 배웠다.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교실에 앉아 1 더하기 1이 2라는 사실을 배우듯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걸까? 그날 내가 수업시간에 본 것은 세계 혹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한 단면이었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명징한 앎으로 보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주신 J스님은 우리에게 이 수업은 ‘불교 수행’ 수업이니, 단지 아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각자 수행을 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 역시 나는 놀라웠다. 스님은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으리라고 믿으시는구나! 교실이 마치 보리심을 양성하는 곳으로 느껴졌다. 그날은 그곳이 정토가 아니었을까?

 

보리심을 일으키는 단계를 배우는 현장!


그렇다 해도 보리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배울 때 나는 마치 스트레칭을 할 때 근육이 찢어지듯이 마음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이렇게 마음을 벌려야 한다고?) 기분이 들었다. 그게 실제로 통증이라 (물론 자아를 붙잡고자 하는 것이 통증의 원인일 것이다) 이런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 고통의 보리심 주간이 끝나고, 공성 주간으로 넘어갔을 때 비로소 나의 통증이 완화되었다^^. 어쨌든 이후에 나는 우리에게 보리심에 대해 가르쳐주신 스님과 그 어마어마한 보리심을 일으킨 수많은 보살들에 대해 정말 경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세계는, 또 마음이란 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가. 이런 것들을 느끼는 내 삶의 구간은 후에 돌아봐도 얼마나 복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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