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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에서 불교 공부하기

by 북드라망 2025. 10. 1.

다람살라에서 불교 공부하기

이윤하(산강학원)

 

다람살라 유학기지만, 이 글은 서울에서 쓰기 시작했다. 이번 7월 입학하려고 하는 ‘사라학교’에서의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한국에서 한 달의 방학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을 많이 들였던 도서관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열 달 가량 살았던 집을 잠시 떠나왔다. 다시 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한국을 떠나던 날의 나와 거리를 제법 벌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이 생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람살라의 공기는 좀 다르냐’(부처님이나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가피가 느껴진다거나)와 같은 질문들을 몇 번 받았다. 아쉽게도 그런 식의 종교적 체험은 나의 기질과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한국에 돌아오자 다람살라의 ‘좀 다른 공기’를 의식할 수 있었다. 뻔한 표현이지만 영적인 공기라고 할까. 그곳의 사람들이 물리적 상황이나 생각뿐 아니라 ‘마음’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끌어가려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티벳 사람들에게 이것은(문화적, 종교적 자산에 의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고, 멀리서 다람살라에 찾아온 외국인들은 이런 수행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람살라를 영적인 시공으로 만들어내고, 그들과 같은 동네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을 흠뻑 받으며 다람살라의 ‘공기’에 동참할 수 있다.

다람살라가 이런 인연장으로 현상하는 데에는 온 우주가 원인이겠지만 주된 씨앗이 되는 ‘인(因)’은 14대 달라이라마(텐진 갸초) 성하이시다. 1959년 3월 17일 달라이라마 존자님은 라싸에서 몰래 탈출해 티벳 땅과 티벳의 인민을 뒤로 하고 인도로 망명하셨다. 당시 중국은 티벳을 점점 더 폭력적으로 압박하며 노골적으로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59년 3월 10일 라싸에서는 민중들이 자신들의 쿤둔(달라이라마)을 보호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켜 전운이 감돌았다. 존자님은 중국군과 티벳인들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나거나 당신이 실제로 억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망명을 결의하셨다. 말 그대로 강 건너고, 산 넘는 탈출이었다. 인도에 망명 요청을 하고, 허가를 받은 뒤 히말라야를 넘어 국경을 건넌 것이 당월 31일. 당시 인도의 총리 네루는 티벳이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고, 이후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따라 수만 명의 티벳인들이 목숨을 걸고 고향을 탈출했다. 소중한 경전과 불상 등을 가지고 히말라야를 넘었다. 고향 땅에서는 티벳 식의 삶과 언어, 불교를 지키기 어려웠고, 산 너머 땅에 달라이라마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망명길과 망명 이후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여러 이유로 망명하지 않은(못한) 채 티벳 땅에 남아있는 이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지금의 나는 쓸 수가 없다. 망명 1세대 티벳인들은 존자님을 따라 금방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줄 알고, 정착지에 오래 자라야 열매를 맺는 작물은 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사원을 세워 공부하고, 얼마 전엔 3.10 민중봉기 66주년을 맞이했으며, 24세에 망명하셨던 존자님은 90번째 생신을 맞이하셨다. 존자님과 티벳 사람들은 길을 닦고 건물을 세우는 것, 새로운 정부의 의회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이제 다람살라에는 티벳 민주정부가 있고, 티벳의 문화를 잃지 않고 이어가려는 여러 단체들,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과 공부를 이어가는 사원들, 그리고 티벳인과 스님들이 있다. 나는 티벳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게 타국에서 지켜낸 불교와 문화를 배우고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글은 이런 곳에서 불교를 배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망명루트

 

 

수행단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신 달라이라마 존자님



다람살라에서 보낸 첫 해는 모든 것이 새로웠는데, 그중 하나가 큰 법회에 참석한 일이었다. 우리가 다람살라에 도착했을 때, 존자님께서는 미국에서 무릎 수술을 받으시고, 휴식 중에 계셨다. 이후 존자님이 해외 여러 나라의 티벳인 정착지를 거쳐 다람살라에 도착하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법회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는지 존자님 대신 삼동 린포체께서 법회를 하시게 되었다. 아침 일찍 ‘메인 템플(추글라캉)’에 갔을 때, 법당 안에는 스님들이, 법당 바로 바깥에는 법회를 요청하고 준비한 묀바(현 인도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에 거주하는 한 민족)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온 불자들은 법당을 빙 둘러싸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와 소담언니도 한 자리에 끼어 앉아, 준비해온 라디오로 주파수를 잡았다(다람살라의 ‘메인 템플’에서 열리는 큰 법회에 가면, 약 8~10개 국어의 동시통역을 들을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청중들은 아날로그 라디오의 다이얼을 도록도록 돌려 지정된 주파수의 통역을 통해 법문을 듣는다. 기쁘고 놀랍게도, 한국어 통역도 있다. 존자님께서 티벳어로 말씀하시면 통역사 분이 수려한 한국어로 동시통역을 해주신다. 맨 처음 추글라캉에서 한국어 통역을 들었을 때 너무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말하지만 난 영어를 잘 못한다)

린포체께서 설하신 내용은 다음 날 있을 장수기도와 불교 공부의 기초, 예비수행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승가’,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체감이었다. 스님의 말씀에서 불법이 티벳 스승님들을 통해 정말 체현되고 있음을 느꼈고, 사람들이 멀리서 이곳에 찾아와 큰 스승께 법문을 들으려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불경만 읽고도 깨닫는 사람도 물론 있겠으나, <디가니까야>에서 부처님 역시 어떤 법(범행)이 완전한 것이 되려면 그 법을 드러내는 제자들과 실천하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그래야만 그것이 잘 가르쳐진 바른 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래야만 그것이 진짜 작동하는 ‘진리’인 것이다.

 

추글라캉에서 법회 대중공양 차를 주전자에 따르고 계신 어린 스님들


이후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법회나 기도회에서 (멀리서) 뵐 기회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확히는 옮기기 어렵고 대략 나의 기억에 의존하여 쓴다) ‘불교는 기도하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수행이다. 고통스럽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다른 이를 위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내가 평생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수행하고 공부한 결과, 나의 마음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졌던 다음 말씀에 크게 놀랐다. “살아있는 한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편안하게 이 길에 동참해주십시오.” 티벳 정부가 운영하는 박물관에 가면, 중국정부가 티벳 인민들에게 저지른 끔직한 만행들의 (극히) 일부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분노로 대응하지 않고,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는 지도자와 사람들의 마음에 놀라울 뿐이었다. 자애와 연민은 연약한 마음이 아니다.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게 하는 유일하고 강인한 마음의 길인 것이다.

그날 나는 존자님이 90세에 가까워지시고서야 내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물론 내 생각이다^^). 젊은 시절의 존자님을 만나 뵈었다면 좋았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근기와 연으로는 지금의 존자님을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길을 다 걸어가신 뒤, 말년에 당신의 생을 돌아보시면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고, 당신의 마음이 정말 변화했으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테니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존자님을 만나야만 내게 이 길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티벳의 역사와 존자님의 삶을 보면 불법이 효력이 있으며, 실제로 작동하는 ‘진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존자님의 보리심에 사람들이 감화되고, 그를 따르려 한다는 것을 법회의 청중들 속에서 느낄 때면, 그것이 더욱 자명하게 느껴진다.

이후 나의 불교 공부의 스승은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불교 강의를 해오신 ‘겔첸’ 스님과 (잠깐이지만) 독일에서 태어나 티벳불교의 계를 받아 출가하시고 처음으로 ‘게셰마(겔룩파에서 반야, 중관, 아비달마, 율장 등 모든 교학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통과하면 박사 정도에 해당하는 게셰 칭호가 주어지는데, 티벳 내에서는 여성 출가자의 경우 이런 공부를 할 기회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서양의 여성 출가자들이 많아지고, 망명 이후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비롯해 많은 여성 출가자들이 노력한 결과, 여성 출가자의 경우 공부를 마치면 ‘게셰마’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셰의 여성형 명사이다)’ 학위를 받으신 ‘깰상 왕모’ 스님이셨다. 겔첸스님께는 『람림』의 요약본 강의를, 깰상 스님께는 『밀의해명』 강의를 들었다. 두 강의 모두 다음 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일정 때문에 끝까지 참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도입에 ‘보리심 내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윤회의 두 길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 겔첸 스님. 하사도의 한 대목이다

 

깰상 왕모 스님의 강의 모집을 알리는 전단지. 다람살라에서는 길 가다가 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보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깰상 왕모 스님은 영어를 통해 영어권 불자들을 위한 강의를 많이 하신다


티벳에서 전승되는 불교는 (불교를 소승과 대승으로 나눈다면) 대승이다. 즉 보살(=보리심을 낸 존재)이 부처가 된다. 보리심이란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깨닫겠다는 발심, 즉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자비심이다. 그런 발심은 참으로 힘이 세서, 어떤 번뇌나 두려움 앞에서도 보살을 구한다. 발심이 온전하다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보장되어있는 것이다(언제 도착할지는 모른다만은…^^). 나는 이전부터 이에 대해 어렴풋한 의문이 있었다. 고통은 너무 실재의 영역에 있는 것 같고(전쟁과 굶주림과 기후위기, 죽음과 병), 이를 해결하는 해결책으로 보리심이나 자비의 마음이 너무 뜬구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전히 이 의문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람살라에서 공부하면서, 고통이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실체적인 것이고, 자비의 마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실재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실제로 세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두 스승께 들은 두 질문에 대한 두 답변을 나누고 싶어 첨부한다. 하나는 내 질문이고, 하나는 같은 반 학생의 질문이었는데, 역시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과 답변 모두 나의 기억에 의존해 요약했기에 약간의 변형이 있다.

Q. 앉아서 다른 이의 고통을 가져오고, 나의 행복함을 내보내는 명상(통렌수행)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도 없는데 우리가 명상하는 것이 그들을 어떻게 구합니까?

A. 명상을 통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실제로 짊어질 수 있는 마음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 없이는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걸하는 사람에게 5만원정도는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00만원은? 내 전 재산은? 나아가 나의 생을 보시할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딘가에서 멈추는 것을 우리가 느낀다는 것이다. 보살은 이미 자신의 생과 몸이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 자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정말 모두를 고통에서 구할 용기가 있을 것 같다.

Q. 왜 ‘내’가 보살/부처가 되어야 합니까? 이미 나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행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요?

A. 세상에 부처가 나타나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의 궤적과 까르마, 인연은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맺은 관계와 인연을 통해 당신의 깨달음이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것은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살심을 내야 하는 이유다. 이는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대목이다. 수승한 두 스승님의 답변에 더 첨언하지 않겠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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