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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공부함에 감사하기

by 북드라망 2025. 8. 26.

공부함에 감사하기

박 소 담


다람살라 1년차의 중심은 아무래도 티벳어 배우기다. 지난 글에 윤하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티벳 정부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티벳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 나갈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인도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할 겸해서 고른 선택지였다. 사실 먼저 다람살라에 살고 계시던 몇몇 한국 분 중에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걸 추천하지 않는 분도 계셨다. 도서관은 다른 곳에 비해 공부의 강도가 높지 않아 티벳어 실력을 빨리 키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도서관은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수업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아서 꼬박꼬박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도 거의 1년을 향해 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종업식 때 도서관 친구들, 선생님과 찍은 사진


도서관에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은 매우 다양했다. 국적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처한 상황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티벳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나처럼 티벳 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도, 티벳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회화를 위주로 배우는 학생들도 있었다. 또 회화를 배우더라도 배우자가 티벳 사람인 경우, 티벳인들과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 티벳인 손님들을 대해야 하는 경우 등, 각자가 마주하고 공부의 목표로 삼는 지점은 달랐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공부 조건에 따라 배우는 내용이나 속도도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건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조건의 차이였다. 도서관의 널널한 분위기는 그 모든 학생들을 품기에 넉넉한 곳이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함께 공부해 나갔다.

도서관에서 윤하나 나처럼 편하게 지원을 받고 공부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이대가 높은 편이고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거나 때론 부양할 가족들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같은 양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스위스에서 온 한 친구는 중학생쯤 되는 아이를 돌보며 불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생계를 위한 과외 일과 집안일은 그 덤이었다. 그 친구는 6년이 걸리는 박사 과정을 신청하여, 다 수료하긴 어렵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이 계속하는 게 목표다.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며 한탄하는 건 그 친구의 일과이지만, 동시에 이렇게나마 불교 공부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부만 하고 사는 학교를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삶이 얼마나 복된 의미인지 알게 된다. 어느 친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람살라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도 했다. 이생에서 불교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전생에서 이미 많은 복덕을 지은 결과라고 하는, 언젠가 불교에 대해 들었던 말과 비슷한 얘기였다. 불교를 배우는 스님들 역시 본격적으로 법을 배우기 앞서, 법을 배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데에 먼저 감사를 드린다. 이 감사의 마음은 배움을 북돋고 또 그것이 다른 배움으로 이어지게 만드리라.

 

수업이 끝난 후의 풍경. 표정이 아주 신났다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들 역시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개성 넘치는 친구들과 티벳어를 공부한다는 것만으로 살갑게 대해주셨던 선생님들. 모두에게 갖가지 방식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선생님 한 분에 대해서 소개를 해 보려 한다.

따시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도서관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사전답사로 도서관을 왔을 때 어떤 수업이 있는지를 살펴볼 겸 도서관에 들렀는데, 근처에 계셨던(도서관 선생님들은 모두 도서관 기숙사에서 살고 계신다) 선생님께서 몸소 상담을 해 주신 것이었다. 그때가 마침 방학이었을 때라 근무 중이 아니었을 텐데도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에게 도서관 수업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던 것이 인상에 남았다. 따시 선생님은 티벳어 수업 중에서도 기초반과 심화반 두 수업을 맡고 계신다. 아쉽게도 기초반은 실력이 맞지 않아 다른 수업을 듣던 차, 운 좋게 선생님의 심화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일상적인 표현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게 티벳 불교에 대한 책을 독해하는 수업이었는데, 나오는 단어가 거의 모르는 단어일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티벳어와 영어 모두로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에 감탄하면서 그대로 수업을 신청했더랬다. 그렇게 따시 선생님의 친절한 수업은 티벳어 병아리였던 나도 처음 티벳 불교의 언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수업 중인 따시 선생님. 마음씨도 좋은데 얼굴도 예뻐 인기가 많다

하지만 수업을 계속 듣다 보니 그저 꼼꼼하기만 한 게 선생님 수업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학생들에 대한 말 그대로 무한한 인내심이 깔려 있었다. 영어를 제2외국어인 학생들이 많다 보니 바로 직전 설명해 준 것에 대해서도 다시금 질문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따시 선생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마치 처음 질문을 받은 것마냥 세세하게 대답을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보살도 이런 보살이 따로 없다.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도, 본인이 설명을 매끄럽게 해 나가는 것보다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선생님에게는 더 중요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티벳인으로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하나하나 영어로 설명해 나가는 과정도 엄청난 인내심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그건 단순히 티벳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티벳어를 이해할 것인지 낱낱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에 가깝다. 티벳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다 보면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의문이 들기 쉬운 지점이지만 티벳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그런 질문들이 생길 때도 있다. 따시 선생님은 여러 티벳어 선생님들 중에서도 외국인 학생들이 어떤 지점을 헷갈려 하고 궁금해하는지를 정확히 캐치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선생님이었다. 영어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문장들을 하나하나 새로 뜯어보았을 그 정성이 내게는 더욱 놀라웠다.

티벳 불교의 유명한 텍스트인 ‘람림(보리도차제론)’에는 법을 설하는 스승의 덕목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중에는 계정혜 삼학에 정통하고, 경에 해박해야 하며 무아를 증득해야 한다는 등의 법 자체를 체득한 스승의 자질에 대해 강조한 지점이 있는 반면 또 이런 지점들도 있다. 제자의 마음에 잘 와닿도록 전하는 언변이 뛰어날 것,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사랑과 자비로써 법을 설할 것,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좋아할 것, 반복되는 설법을 싫어하지 않을 것. 요컨대 가르치는 방식에 있어서도 법의 실천, 즉 자비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따시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많은 티벳어 선생님들에게서 보이는 학생들에 대한 무한한 너그러움이 바로 떠올랐다. 티벳어 선생님들이라고 해서 다들 불교를 전공하시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벳어’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에는 티벳어가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또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만 같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언어와 문화,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치롭다는 확신을 지니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더 이상의 망명인은 찾아오지 않고 남은 티벳 사람들도 대부분 외국으로 나가고 있는 지금, 다람살라에 남아 티벳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다들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큰 자부심을 지닌 분들뿐이다. 그런 선생님들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위치는 또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그럴 때마다 나의 이 배움이 어떤 방향으로 또 다른 이에게 흘러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거기에 도서관의 선생님들께 받았던 마음이 잘 묻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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