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글을 배우다
박 소 담
문법 공부의 시작
최근 새롭게 티벳어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티벳어야 이전부터 배우고 있었고, 그중에서 문법적인 내용을 배우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멘찌캉(티벳 의역학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티벳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티벳어 문법에는 우리의 『훈민정음』 격에 해당하는 짧은 게송(일종의 경전)이 몇 개 있는데, 티벳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릴 때 그 게송을 읽고 암송하는 방식으로 문법을 배운다. 꼭 이 경전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티벳어를 배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법을 다 알게 되기도 하기에 외국인들은 굳이 문법 공부를 따로 하지 않기도 하지만, 입학시험에 직접적으로 경전에 대한 문제가 나오니 나로썬 필수 과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요샌 티벳인 초등학생이 된 심정으로 문법 경전을 조금씩 암송하고 있다. 멘찌캉에 가서 주구장창 할 암송의 전초전인 셈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문법 고전을 암송하고 있는 티벳 어린이의 영상.
정규 학교든 사원이든 가리지 않고 어릴 땐 모두 이 게송을 외우기에 티벳인의 국민 게송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티벳어 문법은 곧 경전의 언어다. 티벳어는 경전에 쓰인 문어체와 구어체 사이의 간극이 상당한데, 7세기에 쓰인 문법 경전이 지금까지 통용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티벳어의 문어는 구어와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쓰이는 명사, 동사, 어미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제2의 언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티벳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알파벳을 읽을 수 있는 티벳인이라도 경전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꽤 많다. 아마 망명 사회에서 정규 티벳 교육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문어와 멀어지는 티벳인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원어민도 이러할진대 외국인은 어떻겠는가. 덕분에 처음 티벳어를 배울 땐 아주 혼쭐이 났다. 단어 하나 외우기도 힘든데 문어체와 구어체까지 구분하며 외워야 한다니…. (심지어는 존댓말도 명사, 동사가 달라진다! 이 정도면 3개 국어라 해도 될 판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담스러웠던 문어체도 이번에 문법을 공부하면서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구어체와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생기는 문어체만의 매력이 또 있는 법. 그 매력을 이제 좀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이어지는 공부의 인연에 감사하다.
나의 문어(文語) 선생님, 나가 쌍곌라
문법 공부를 위해 근래 새로 시작한 수업이 있었다. 바로 도서관에서 열리는 아침 문법 수업이다. 티벳어를 가르치는 따시 초모 선생님께 문법 내용을 계속 질문했더니 추천을 받은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티벳인들을 위한 수업이었다는 점이다. 강의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속도도, 사용되는 어휘도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업 내용도 기초 문법이 아니라 심화 문법에 관한 것이었으니, 첫 수업을 듣자마자 ‘잘못 들어왔구나’ 싶은 생각이 바로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무슨 인연이려니,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수업에서 사용되는) 티벳어 필기체를 익히고 귀라도 적시자는 마음에 그냥 계속 들었다. 이해는 둘째 치고 출석만 열심히 하자는 마인드였다.
그렇게 처음 듣게 된 진짜 티벳인들의 수업은 주말 없이 한 달 내내 이어져 빡센 듯하면서도 동시에 느긋한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어찌나 느긋했는지 듣는 사람은 30명인데 정작 늘 나오는 학생들은 절반이 약간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이해는 잘 못해도 출석은 열심히 하는 한국인 두 명이 졸지에 모범생 반열에 올라 버렸는데, 바로 문법 선생님이신 나가 쌍계 선생님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었다.
쌍계 선생님은 외모부터 분위기까지 ‘학자’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분이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올곧게 티벳어 외길 인생을 걸으셨을 것 같은 선생님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매 수업마다 학생들에게 공부 의욕을 불어넣으시려 애쓰셨다. 수업 시간 종종 받아쓰기를 하면 이런 걸 왜 틀리냐 하시면서도 여느 티벳 선생님들이 그러하듯 매번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주시는 자비로움을 보여주시면서 말이다. 받아쓰기는 간단한 문장이 아니라 경전에 실린 짧은 게송이나 기도문이 대부분이라 외국인으로썬 감도 못 잡을 정도여서 처음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외국인 두 명이 (출석만 했을 뿐인데) 티벳어에 나름 열정적인 학생이라고 짐작하신 선생님은, 며칠이 지나니 왜 너네는 받아쓰기 검사를 안 받냐면서 틀린 걸 하나하나 봐주기 시작하셨다. 거의 지어서 쓰기 때문에 맞는 건 거의 없는데도, 수업 끝나고 따로 체크를 해주실 정도로 열심이셨다.

수업 중이신 나가 쌍계 선생님. 칠판의 기어다니는 듯한 글씨는 티벳어 필기체다
생각해 보면 티벳어 문어체의 맛을 알게 된 것도 쌍계 선생님의 그런 정성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하루는 존자님의 장수 기도회가 있어 문법 수업을 빠지게 되었는데, 티벳인이라면 모두 가는 줄 알았건만 문법 수업은 그대로 진행이 되었었나 보다. 윤하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친히 수업에 왜 안 왔냐는 뉘앙스의 문자를 받았는데, 이전까진 보기 힘들었던 간결한 문어체로 된 짧은 문자였다. 내용도 특별할 것 없이 “How are you?”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걸 보고 티벳어 문어체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티벳어 구어체는 문어체와 간극이 커서 철자로는 쓰여 있지만 읽을 땐 발음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철자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의 티벳인들은 문자를 보낼 때 타자를 치기보다도 음성을 녹음해서 보낸다. 그렇기에 이전까지는 문어체의 문자를 받아 볼 일이 없었다. 한편 경전의 문어체는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포기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는데, 쌍계 선생님의 딱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문자를 보니 비로소 티벳어 글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티벳어는 한국어에 비해선 어휘도, 어미의 변형도 다양하지 않아 굉장히 투박한 언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말하는 투에 비해 짧은 쓰인 몇 음절들은, 어느 글자 하나 버릴 것 없이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았다.
문(文), 말에 틈을 내다
그러고 보면 오래된 경전들은 대부분 암송을 위해 시 형식을 지닌다. 티벳의 문법 요소들은 게송의 음절 수를 유연하게 맞추기 위해 발달했을 정도니, 문어식 표현이 시처럼 느껴지는 것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발음으로 구분하기 위해 단어에 접미어 등을 붙여 길게 말하는 구어와 달리, 문어는 철자만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므로 단어를 훨씬 짧고 다채롭게 쓰는 편이다. 그래서 정작 경전을 말로 읽어보면 부드럽다기보다는 툭툭 끊기는 느낌이 강한데, 그게 구어와는 완전히 다른 리듬을 만들어 내서 마치 새로운 언어를 듣는 것만 같다. 거기에 스님들의 경전을 읽는 특유의 목소리까지 들어가면, 일상생활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경전의 장도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수업 전에 기도문을 외고 있는 스님의 모습. 기도문은 주로 부처님과 문수보살을 비롯한 성자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는다. 수업이 끝날 때면 공부한 공덕을 회향하는 기도를 드린다
국어 역시 조선 시대만 가더라도 말과 구분되는 문어식 한자가 있었다. 예전에는 말하는 말과 쓰는 글이 다르면 불편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글은 그 나름대로의 색다른 리듬을 통해 언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자국어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의 외국어처럼, 언문불일치한 문어는 티벳어를 훨씬 다채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글은 말에서부터 왔지만, 말 속으로 계속해서 침투하면서 언어에 새로운 틈을 낸다. 이렇듯 문어식 글이 말에 틈을 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면, 언문이 불일치하는 것이야말로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글 언어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물론 과거에는 말과 글의 차이가 계급의 우열을 가르기도 했다. 글을 읽고 쓰는 계급이 특권층을 이루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글을 배울 기회가 열려 있는 지금 시대에는 또 그 의미가 사뭇 다를 것이다. 말과 간극이 큰 티벳어 글은 티벳인들에게도 배우기가 어렵다. 그러만 쌍계 선생님은 티벳어 글을 보고 어렵다고만 할 게 아니라 다만 공부를 하면 된다고 하셨다. 외국어를 배울 때 자신이 잘 모른다고 해서 그 언어를 탓하지 않는 것처럼. 그 말씀이 무색하게 나는 많이 탓하면서 공부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글의 영역이란 곧 공부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를, 어떤 글을 일상 속으로 침투시킬 수 있을까? 티벳인들은 그 공부의 영역에 불교 경전을 두었다. 경전의 말들은 생소하지만 동시에 꾸준한 암송을 통해 티벳인의 일상 곳곳에 깃들어 있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기도, 밥을 먹기 전의 기도, 수업 시작 전과 끝의 기도, 사원 주위를 돌면서 외는 만트라(진언)까지. 마치 마법 주문처럼 일상 곳곳을 스며든 그 언어에는 이기심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다른 존재들을 위한 마음을 내라는 말들이 담겨 있다. 모든 언어에는 일상 속에 새로이 침투하는 문어체의 글이 있지만, 티벳어는 그 글에 자비심을 담고자 하기에 더욱 특별한 언어일 것이다.
용맹정진하게 쓰라!
마지막으로 쌍계 선생님의 수업에서 받아쓰기를 했던 게송을 가져와 봤다. 받아쓰기 내용은 어떨 땐 정진함을, 어떨 땐 친구의 중요성을 말하거나 부처와 보살들에 대한 찬탄문이 나 기도문이 되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하다. 여기엔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리는 말이 없다. 이제 기초적인 작문을 겨우 배우는 단계에서 이런 주옥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필시 큰 행운이다. 지금도 문법 수업은 여전히 어렵지만 거기에서 배우는 것들이 몸에 물들도록, 매일 조금이나마 써 나가고 있다.
머리가 좋고 재물이 많더라도
게으른 사람이면 높은 곳에 오르기 힘들다.
귀는 먼저 태어나지만
뿔보다 높이 오르지 못하는 게 보이지 않는가?
매일 밥을 먹어도 지겹지 않듯이 정진해서 써라.
들어가자마자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지만
3일이 지나면 끝없는 산만함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맞은 걸 더 찾기 힘든 받아쓰기 현장. 받아쓰기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매일 꾸준히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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