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동양철학 플러팅’은 처음이지?
박 보 경(남산강학원)
“보경 샘은 젊은데 왜 동양철학을 공부해요? 생긴 건 서양철학 좋아할 거 같은데…….”
“청년이 동양철학에 관심 있는 게 신기하네요.”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오며가며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강좌나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새로운 사람 한두 명은 꼭 오기 때문이다. 다른 공간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과 나이, 사는 곳, 하는 일 등등을 묻지만, 연구실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보다 더 먼저 묻거나 받게 되는 대표적인 질문이 있다.
“무슨 공부 하세요?”
처음 공부하러 왔을 땐, 탐색하는 중이라 머뭇거리며 “그냥 이것저것 다 듣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연구실 생활 삼년 차, 올해는 당당하게 말한다. “사주명리, 장자, 주역 공부합니다.” 그 사이에 취향이 생겼고, 동양철학과 사랑에 빠졌다. 사주명리, 장자, 주역까지 말하고 나면 몇몇 분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청년이 동양철학을? 왜?’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아무래도 날카롭고 논리적인 서양철학은 세련된 청년과 합이 잘 맞는 거 같고, 불교는 ‘힙부(Hip Bhu)’라 불리며 세대불문 힙한 학문이 되었다.(불교를 동양에 넣기엔 존재 자체로 너무 독보적이다) 거기에 비하면 동양철학은 생활한복을 입고, 알 수 없는 도를 말하는, 수염 난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촌스럽고 고루하다. 내가 생각해도 힙하고, 세련된 걸 좋아하는 청년과 썩 유쾌하게 어우러지진 않는다.
사실 나도 동양철학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묶일 때가 있었다. 처음 사주 공부를 시작할 때, ‘도를 아십니까?’를 묻는 도인으로 비칠까 봐 지하철에서 사주명리 책을 가방에서 꺼내려다 넣은 적도 있고, 누군가에게 사주명리와 주역을 공부한다고 말할 때, 연구실을 이상한 점집(?)으로 오해할까봐 은근슬쩍 서양 철학자 몇 명을 끼워 넣을 때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동양철학의 블랙홀 급 플러팅에 홀려버렸다. 사주명리를 시작으로 장자, 주역까지 공부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동양의 땅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다. 다른 대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알면 알수록 동양사상이 지금 시대 청년들과 합이 무척 잘 맞을 거라고 확신 또 확신한다. 도대체 뭐 때문에? 동양철학, 어떤 매력이 있길래?
온통 잘못 알고 살아왔군!
어떤 앎은 나에게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고 어떤 앎은 내가 쌓아온 세계를 한방에 무너뜨린다. 전자는 나를 성장시키고 후자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연신 감탄하며 동시에 이렇게 읊조린다. “온통 잘못 알고 살아왔군”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오월의 봄, 20쪽)
굳이 질문하지 않고, 알아보려 애쓰지 않아도 세상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자라면서 만들어진다. 감지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 삶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고 있는 힘이 있다. 새로운 앎을 만났을 때, 그때야 우리는 기존에 내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떤 소리를 듣고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반대로, 궁금해 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주입된 힘, 다수의 힘에 휩쓸려 살게 된다. 이처럼 앎을 통해서 우리는 기존의 세계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나에게도 세상이 뒤집히는 이동의 순간이 있었다. 내가 동양철학에 빠지게 된 큰 이유는 두 만남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인간도 자연’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았을 때이고, 두 번째는 ‘음양오행’이라는 세상을 만났을 때다. 인간이 자연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세상이 음과 양으로 운동한다는 원리를 알게 된 후, 나는 해방감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꼈다. “온통 잘못 알고 살아왔군. 지금까지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았던 거지?”

모든 것이 ‘자연’이다
사주명리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땐, 지리산에서 살다가 막 서울로 올라온 참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어 지리산으로 이사했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리산에서 머물며 농사지어 밥해 먹을 수 있고, 나무 잘라 집도 짓고, 바느질해 옷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이라는 말은 내 삶에서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지리산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과 순환하는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기후 위기로 지구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온갖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고, 스스로 자연 친화적 인간이라 여기며 자부하며 살고 있었다.
그랬는데, 사주명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받았던 큰 충격 중 하나는 ‘인간이 자연’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도 우주의 기운을 받아 사는 존재였다.
엄마 배 속을 나오면서(……) 태어나자마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때 우주의 기운이 호흡을 통해 아기의 신체에 각인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주팔자다. 존재와 우주 사이의 첫 번째 마주침, 그 ‘인증 샷’이라고나 할까.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44쪽)
‘인간도 자연’이라는 깨달음 앞에서 마주친 건, 내 안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였다. 자연과 더불어 산다고 말할 때 그 자연 안에 ‘나’는 없었다. 자연의 자리에 나(인간)만 쏙 빼놓고 나를 둘러싼 주변 세계, 환경을 돌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관리자’였고, 하늘과 땅, 숲과 나무, 바다와 동물은 지키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자연’을 대상화 해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자연의 자리에 인간만 쏙 빼놓고 있는 태도 모두 인간 중심적 사고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를 지어놓고, 인간의 분석과 필요에 맞게 자연을 제멋대로 범주화시키고 있었다.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나?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은 매력적이다. 동양철학의 사유 구조는 오늘날의 ‘생태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사유 구조 안에서는 자연(천지)과 인간을 경계 짓는 어떠한 개념도 없다. 이곳에서 ‘인간(人間)’은 하늘땅 사이의 존재, 하늘땅과 연결되어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다. 인간이 천지자연이고, 우주가 곧 인간인 셈이다. 천지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적 전제를 바탕으로 주역과 사주, 동의보감 등 여러 학문은 뻗어져 나왔다. 동양의 땅에 살았던 옛 선현들은 자연(천지)이 움직이는 이치와 사람이 움직이는 이치가 서로 같다고 보았던 것! 그렇기에 인간을 ‘작은 우주, 소우주’라 불렀다.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더 명료하다. 사주명리를 살펴보자. 사주팔자에 적힌 여덟 글자는 위에서 언급했듯, 엄마 뱃속에서 나와 자발적으로 첫 호흡을 시작할 때 내 몸에 새겨지는 시공간의 흔적이다. 내가 태어난 순간이 어떤 계절이었는지, 어떤 날인지, 밤인지 낮인지 등 당시 시공간의 배치에 따라 내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여름에 피는 작물과 겨울에 피는 작물이 다르듯이 여름에 태어난 사람과 겨울에 태어난 사람의 생리는 다르다. 해가 중천에 떠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간인 정오에 태어난 사람과 고요하게 하루를 갈무리하는 밤에 태어난 사람은 기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처럼 천지의 기운과 인간의 생리는 서로 한 몸으로 연동되어있다. 네 개의 기둥과 여덟 글자로 구성된 사주팔자는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숫자가 아닌 ‘간지(干支)’라는 언어로 변환한 것이고, 사주명리학은 우리 몸에 흔적 지어진 시공간의 리듬을 바탕으로 존재와 운명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또 명리학에서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운명을 지닌 존재로 본다. 들풀, 나무, 돌, 지구, 태양계, 이 모두가 하나의 소우주다. 천지와 연결된 존재는 인간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천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며,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명(命)’을 지니게 된다. 사주 공부를 한 이후, 관심 있는 존재의 사주명식(命式, 사주팔자를 적어놓은 표)을 앱에 저장해 놓곤 틈날 때마다 보는데, 내 어플엔 친구들 사주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강아지, 단체, 물건 등등 다양한 존재의 사주 명식도 저장되어 있다. 비인간 존재의 사주를 탐구하다보면,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에게 명(命)이 있다는 사실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친구네 고양이 틸다(9세)는 보통의 고양이답지 않게 아기 때부터 해만 뜨면 집 밖을 나가 밤늦게 돌아왔는데 사주를 보니 역마살이 강하게 있었고, 가깝게 지내는 도서관은 대운(10년 단위로 변하는 운)이 바뀌었을 때 감이당과 만나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도서관’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오래된 지혜는 땅에서 사라졌다. 인류는 하늘과 땅을 잊었다. 인간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했고, 스스로를 자연의 관리자 혹은 정복자로 조건 지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기 쉬운, 절망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지구의 주인은 오직 인간이고, 자연-동물-기후-바람 따위는 다 엑스트라일 뿐이다.”(『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20쪽) 인간이 스스로를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결과다.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 자원 고갈, 기후 위기 등 인간중심주의의 결과를 뼈아프게 직면하고 있는 MZ세대 중, 상당수는 더 이상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상의 드라마에 속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중심주의를 조각내지 않고서는 해방의 길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전 세대 인간들이 노동자, 여성, 장애인, 빈민, 홈리스 등을 넣었던 자리에 동물”(홍은전 칼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겨레 2025.01.01.)을 넣고, 이전 세대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 흘렸던 광장을 넘어 숲과 바다로 간다. 그곳에서 난개발로 베어진 나무의 소리를 듣고, 시설에서 해방된 돌고래의 안녕을 기도한다. 또 그들은 묻는다. “‘동물’에 대해 논할 때,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왜 인간만이 존귀하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지 않고,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오히려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나아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기존에 쓰고 있는 안경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어떤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깊고 차분하게 탐구하는 일이다.
“옳고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증오심’이었다. 채식할 땐 육식하는 사람이 싫었고, 소위 ‘보수 꼰대’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부류의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할 때마다, 꼭 그만큼 미움도 커졌다. 여성 단체에서 활동할 땐,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는 만큼 남성을 혐오하는 마음도 함께 강해졌다. ‘모든 남성 대 모든 여성’의 구도 속에서 여성은 아군, 남성은 적군으로 놓고 전쟁 중인 일상을 이어갔다. 활동을 그만둘 때쯤 돌아보니 주변에 생물학적 ‘남성’은 이미 전멸된 상태였다. 가부장제가 주는 폭력을 없애고 여성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돌아보면 내 마음속에서나, 한국 사회에서나 남녀가 서로를 혐오하는 정서는 골이 더 깊어져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을 남성/여성, 선/악, 좌/우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는 저절로 타인과 편을 가르게 만들고, 끝없는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획일적으로 나누어진 세상에선 아군 아니면 적군, 내 편 아니면 상대편만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 등 존재를 둘로 나누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관계를 만들었다. 이 배치 하에선 적대적 공존은 가능할지라도, 공생은 불가능하다. 수백 년 동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도 되는 대상’으로 몰고, 남용하고 착취하고 파괴한 역사가 그 증거다.
지금 우리에겐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하다. 인간도 자연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알게 된 건,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 관계를 분절된 형태로 쪼개어 보고 있는 나의 오염된 안경이었다. 몰랐지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은 이 땅에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세상은 음과 양으로 운동한다
여기 ‘만물이 공생하는 세상’이 있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 옛 선현들은 하늘의 별, 땅의 냇물, 식물과 같은 자연물을 관찰하여 자연의 이치를 파악해 삶의 길을 열어나갔다. 그들이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마주보게 된 이치는 ‘원’이었다. “세상은 원운동을 하면서 움직이는구나!” 이는 어렵거나, 심오한 이치가 아니다. 잠시만 귀 기울여보면 계절의 변환, 밤낮의 주기, 식물의 생장 등 만물과 시공간은 직선이 아니라 둥글게 운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루 동안 가만히 앉아 하늘을 관찰해보자. 해가 뜨면 날이 밝고, 해가 저물면 달이 올라 저녁을 밝힌다. 낮과 밤은 서로 돌고 돈다.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순환하는 계절도 마찬가지다. 원운동을 알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에 많은 것들이 이미 원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단위인 우주 행성(지구도 둥글다!)을 시작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의 형태까지 죄다 둥글게 생겨, 원으로 돌고 도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사주명리의 바탕이 되는 기본 세계관 중 하나도 ‘원운동’이다. 세상은 원으로 순환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동양의 옛 선현들은 시공간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으로 운동한다고 보았기에, 음과 양, 오행, 십신과 육친 등 사주를 해석하는 코드를 모두 동그라미로 표현했다. 사주명리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세상은 원이다. 만물은 둥글게 순환한다’라는 문장을 몇 개월간 품고 지냈다. 세상이 둥글게 돌고 있다는 말이 정답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갈수록 나는 내가 뼛속까지 네모난 세상에 갇혀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의 꿈』, W.H.I.T.E 노래, 유영석 작사, 작곡)
어릴 때 한 번쯤 동요로 불렀던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다. 가사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온통 네모난” 세상에 산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안경은 네모난 세상에서 태어났다. 사각형을 떠올려보자. 네모난 세상에선 기준(중심)에 따라 동서남북과 같이 순서가 정해지고, 특정 공간이 고정된다. 이 세계에선 존재를 평면에 놓고 중심(기준)에 따라 존재를 명료하게 나눌 수 있다. 세계는 중심과 주변으로 ‘위계’지어지고, 존재는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동그라미 배치 안에서 존재는 딱 잘라 절단될 수 없다. 밤과 낮의 구획을 명료하게 나눌 수 있나? 벌써부터 혼란스럽다. 새벽, 늦은 오후, 정오 등…… 밤과 낮 사이를 나타내는 단어만 잠깐 떠올려도 무수히 많은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동그라미로 도는 삶은 중심과 위계가 없기에 순서도 없고, 특정 공간에 설정된 위상도 없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다. 며칠 전, 한국에서 열린 가수 콜드플레이(coldpay) 콘서트장에서 손잡고 ‘강강술래’를 돌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둥글게 손잡고 돌고 도는 놀이에 중심과 위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 안엔 목표나 중심, 쪼개진 세상 따윈 없다. 이 장에선 다양한 존재와 손에 손잡고, 있는 힘껏 신나게 뛰어 놀 뿐이다.
그러나 네모의 꿈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잘난 멋진 어른들 말처럼 “둥글게” 살기 위해선 제일 먼저 우리가 지닌 편협한 사고를 알아차리고, 비워야 한다. 편협한 사고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다양한 존재와 손잡을 수 있다.
자연은 무작위로 돌지 않는다. 봄을 시작으로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리듬이 있듯이 순환엔 체계적인 리듬이 존재한다. 한 번 발산하면, 한 번 수렴하는 음과 양의 리듬으로 운동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 듯이 밝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양은 밝음(明), 음은 어두움(暗)을 상징하고, 하루로 본다면 낮(晝) 양이고 밤(夜)은 음이다. 크기로 보면 양은 크고(大), 음은 작다(小). 음과 양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대대의 관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연의 리듬에 좋다/나쁘다와 같은 딱지를 붙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생명이 ‘유용성/효율성’으로 평가된다. 이런 방식의 사유는 자본의 세계에서 ‘유용하지 않은 삶’과 경험 모두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효율성’을 기준으로 눈에 보이게 활동하고 생산할 수 있는 낮을 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세워져 있는 선과 악, 경쟁과 효율, 표준과 정상성의 잣대를 발견해야 한다.
새옹지마 이야기가 있다. 새옹이라는 변방에 사는 노인은 그의 말이 도망가자 땅을 치며 울었다. 그런데 며칠 뒤 훨씬 좋은 말을 얻게 되었고, 기뻐하는 사이 그 말을 타던 아들이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일이 생긴다. 시간이 흘러, 다친 다리 덕분에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진다. 이 고사는 인생의 길과 흉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통용되지만, 더 나아가 고정된 길과 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렇듯 음과 양의 순환체계 안에선 어디에도 묶일 필요가 없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건 따라 양태는 달라진다. 자연의 눈으로 보면 낮과 밤, 여성과 남성, 선과 악과 같은 이분법도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해체되는 만큼 가벼워지고, 다양한 존재와 연결될 수 있다.
이처럼 온 우주 만물을 한 몸으로 보는 동양사상은 내가 만난 가장 혁명적인 ‘오래된 안경’이다. 이 오래된 안경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 하고,새로운 윤리적 지평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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