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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엠지(MZ) 세대? 무지(無知)한 세대!

by 북드라망 2025. 10. 14.

엠지(MZ) 세대? 무지(無知)한 세대!

박 보 경(남산강학원)

 

나는 MZ 세대다. MZ 세대는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등장했지만, 주로 현재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2030세대를 표현하는 단어로 주로 쓰이고 있다. 옛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젊은이를 “요즘 것들!”이라 불렀다면, 지금은 “MZ 세대는!” 이렇게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드러나는 양상만 다를 뿐, 신세대는 늘 새롭고 낯설다. 그렇다면 지금의 신세대, MZ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한 부류의 MZ는 “이렇게 하면 기분이 조크든요”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퇴근 직전 좀 부르지마!”로 상징된다.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하고, 힘든 건 죽어도 하기 싫고, 내가 손해 보는 건 극혐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군사정부에 대항하던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평등, 인권, 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손해 보지 않고, 효율적(?)으로 잘 살고 싶다. ‘영끌’ ‘빚투’ ‘패닉바잉’. 잘 살기 위해서 영혼까지 끌어 모아 부동산과 주식에 올인 한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에서 MZ는 ‘나만 좋으면, 나만 잘 살면 장땡’인 당당하고 이기적인 종족으로 비춰진다.

한 편, 이런 모습도 있다. ‘캥거루족’ ‘고립・은둔 청년’ ‘우울증과 자살’ ‘쓰레기 집’으로 상징되는 청년의 삶.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님 품을 벗어나지 않는 캥거루족과 방 밖을 아예 나오지 않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 은둔・고립 청년, 멀쩡히 직장을 잘 다니지만 쓰레기로 뒤덮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시사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MZ의 모습이다. 당돌하고 이기적인 모습 이면에 또 다른 삶의 모습이 있다.

누군가에게 MZ는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이해한다. 새롭고 낯선 건, 궁금하면서도 두렵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에게 MZ는 낯선 대상이 아니라, 나 그 자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MZ니까^^! 나도 저 두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며 싸우거나, 골방에 박혀있거나.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구에서 피어나 숨 쉬고 살면서 나는 매 순간 어떤 삶, 어떤 나를 기대하고 상상했을까. 아홉 살엔 창의력 넘치는 에디슨이 되고 싶었고, 열다섯 살엔 정의로운 유관순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땐 책과 신문을 읽으며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매일 활기찬 내 모습을 상상했지만,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스무 살,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대학은 입시지옥이었던 고등학교의 연장선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주변 곳곳에서 한입 모아 ‘좋은 대학만 나오면 된다!’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 말만 믿고 대학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 통과해야 할 관문이 또 펼쳐졌다. 학점, 토익 점수, 자격증, 해외 유학, 대외 활동……. 친구들은 1학년 때 잠깐 놀고, 목표를 정해 다시 열심히 스펙을 쌓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동기 부여가 안 됐다. 열심히 스펙 쌓아 좋은 직업을 가지면 그다음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결혼해야지! 또 그다음에는? 산다는 게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정해진 관문을 통과하면서 사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무슨 의미가 있지?’ 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다녔다.

결국 학교를 휴학한 후, 집에서 지냈다. 방 안에서 지내기만 6개월, 내가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우울함은 급격하게 몰려왔고, 말문도 닫혔다. ‘얌전히 수업 듣고 학점만 따면 되는데, 나는 왜 남들처럼 안 될까?’ 매일 침대에 누워 눈뜨면 자책하고, 또 다음 날에는 자기 계발서 책을 읽으며 다짐하기를 반복하며 지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이러다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할 때, 나를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이 보였다. 어디로든 집을 나가야 했다. 그 후로 여행을 다녔다. 나는 여전히 우울했지만, 여행 온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땐 인생이 귀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저마다 각자 색깔을 찾아 사는구나. 삶은 다양하구나.’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은 강렬했고, 만났던 사람들 덕분에 늪에서 한 발짝 나올 수 있었다.

휴학을 끝내고 복학할 때가 되었지만 공부하는 대신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색깔대로 살아야 하는데, 제도와 관습이 삶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제도를 바꾸고,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으면 세상도, 내 삶도 한 발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시민단체 활동은 매일 싸움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계급, 지역, 빈부, 젠더……. 투쟁할 거리가 많아지는 만큼 미워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고, 나중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을 못 붙였다. 싸울 땐 악을 쓰며 힘이 넘쳤지만, 돌아서면 자책감에 괴로웠다. 주변을 둘러보면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 일적으로 조언을 구할 사람을 많았지만 삶을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흔들릴 때마다 나를 지탱해 준 건 ‘시민사회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적어도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이었다.

일을 한지 삼 년째,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은 여성 단체였다.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열풍이 불었던 시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투(metoo) 운동도 들불처럼 타고 일어나 번졌다. 그 중심에서 활동하며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피해자를 많이 만났다. 같이 분노하고, 울고, 또래라 마음이 많이 쓰였다. 행위자가 엄중하게 처벌받을 수 있게 탄원서를 쓰고,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성교육도 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긴 시간 노력 끝에 가해자가 처벌받고, 손해배상으로 큰돈을 받을 수 있게 된 피해자가 있었다. “이제 다 끝났네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축하 겸 인사를 건넸던 날, 돌아오는 답변은 갈 곳 잃은 질문이었다. “선생님,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그때 가늘게 붙잡고 있던 자긍심마저 툭 끊어졌다.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도 사는 게 괴로워 매일 밤 눈뜨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만 빌고 있는데……. 일을 하면서 여러 조건이 맞아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온 사람을 꽤 만났다. 원하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대다수 사람은 전과 같이 힘들어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나름의 성과와 바꾼 제도도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삶이 살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집-직장을 반복하는 생활, 잦은 야근, 성격은 해가 갈수록 예민해져 인간관계도 메말라가고 있었다.

제도와 관습이 정말 삶을 구원할까? 그게 아니라면, 삶을 구원해 주는 건 어디 있을까?


왜 몸과 마음이 아플까?
그 후, 일을 그만두고 지리산으로 삶터를 옮겼다. 당시 산골로 이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삶을 바꿔보자!’ 인권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성, 소수자, 동물권, 생태주의로 뻗어나갔고, 하나의 중앙, 하나의 목적, 한 명의 지도자로 환원되는 삶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그때쯤 ‘기후 위기’도 사회에 중요한 문제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디서 살아야 할지, 반 년 동안 이곳저곳을 탐방하며 다니다 지리산에 터를 잡았다. 스물여섯이었다.

20대 후반을 지리산에서 보내면서 때맞춰 농사지어 밥해 먹을 수 있고, 나무 잘라 집도 지을 수 있고, 바느질해 옷도 만들 수 있게 됐다. ‘생태, 자연, 대안’은 삶에서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생태 건축, 생태 농업, 생태 공동체, 생태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새로운 친구도 많이 만났다. 친구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시골로 이주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같이 모두 아팠다. 나이, 학벌, 성별은 상관없었다. 상담을 받거나, 약을 먹거나 둘 중 하나는 필수였다. 코로나가 시작된 해에 지리산으로 이사 온 열 명 가까운 친구 모두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받은 경험이 있었다. 지구도, 나라도 병들어 가는 세상 속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이 더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한 편으로는 기이했다. ‘왜 다들 아플까?’ 지리산으로 오는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비슷한 해에 서울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중 몇 명도 공황장애와 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나라고 달랐을까. 지리산에 살았던 첫해는 매일이 새로웠다. 신선한 공기, 맑은 사람들, 몸 쓰는 삶, 여유로운 일상. 더할 나위 없었다. 시간이 흘러 사람과 공간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사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사람들과 악을 쓰며 싸우지도 않고, 말 몇 마디에 상처받아 동굴로 들어가지도 않고, 어울려 지내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사람과 사건은 어디서나 존재했다. 활동하던 공간이 사람 간에 일어난 갈등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공간을 살리려고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눴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부터 밥을 잘 안 먹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마음이 불편하거나 일이 바쁘면 밥을 안 먹었다. 음식물이 편하게 안 넘어갔다. 나를 자책하고,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계속 있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일이 안되니 하는 일이 즐겁지도 않았다. 활동량은 전과 같은데, 몸에 들어가는 건 점점 줄었다. 이 상태로 1-2년이 흐르니, 나중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할 일은 해야 하니 수액을 맞고 일을 하고, 또 뻗고 병원을 가고. 이 패턴을 한동안 반복했다. 삼 년이 지나니 삶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타고나길 건강했기 때문에 내가 몸을 못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때 ‘몸’이 눈에 들어왔다. 살면서 몸에 대해 주목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니 몸이 보였다. 그때 주변 친구들 몸도 따라 보였다. 다들 하나씩 어딘가 병들어 있었다. 자가 면역 질환과 아토피, 툭하면 쓰러지는 미주신경성 실신, 불면증과 소화불량, 이명 등……. 마음 따라 몸도 아픈 걸까? 친구들은 대부분 20대였다.


‘사주명리’를 만나다
2022년 임인(壬寅)년, 나에겐 비겁과 인성이 들어온 해다. 아픈 몸을 핑계 삼아 지리산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늦여름 감이당에서 열었던 <2030청년 고전 학교> 프로그램을 덜컥 신청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5개월에 걸친 프로그램이 끝나고 운 좋게도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첫날,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때 몸이 안 좋아 활동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몸이 안 좋다는 내 말에 선생님들은 대뜸 생년월일을 묻더니,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눴다. ‘신약이다, 재성이 많다, 관성도 세다.’ 선생님들 풀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힘은 없는데 내가 쓰는 에너지가 많고, 나를 억누르는 에너지도 많다고 했다. 많은 말 중에서 ‘일하는 쪽으로 기운을 많이 쓴다’라고 했다. 그 말이 콕 박혔다. 그때 당시엔 내가 몸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나에게 일을 많이 주는 사람과 환경 탓이라고 여겼다. 서울에 와서도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으로 속이 잠잠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기운을 쓰고 있다니! 눈이 번쩍 뜨였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을 안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사주를 공부해라”였다.

그때쯤 고미숙 선생님이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책을 만났다. 크리스마스 탁구 대회 참가상(^^)으로 선물 받은 책이었다. 사주 명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누웠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 흠뻑 빠졌다.

 

사회를 바꾸는 혁명과 소수자를 위한 운동은 아주 종종 헌신과 희생으로 귀결되곤 한다. 혁명을 위해 자신을 내팽개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혁명인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북드라망, 70쪽)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만난 말이다. 뺨 한쪽을 세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책에서는 단체와 개인, 활동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간극과 소외를 통찰하지 못하면 혁명이든 진보든 별무소용이라 말했다. 이런 간극이 생기는 원인으로 ‘자연과의 단절’을 이야기하며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라고 말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사주 명리는 미신이 아니라, 8글자로 나타낸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의 리듬’이었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 선조들은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며 삶의 지혜를 연마했다. 살펴보니 때에 맞는 계절의 순환, 생성 소멸하는 자연의 흐름이 있고, 흐름 따라 사는 식물과 동물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주를 통해 나를 탐구하는 건, 잊고 살았던 자연과의 연결성을 확립하는 것이자 우주의 이치를 통해 삶의 방향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광장에 나가 기후 위기에 대한 절박함을 외치고, 자연과 공생하자며 산골로 이사까지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이 중요한 자연임을 잊고, 생명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무지했구나!

그날 이후로 시간 날 때마다 사주 명리 책을 읽었다. 친구들과 읽고, 같이 암기하고 시험 치고, 선생님들께 묻고, 글도 써보고…. 지금은 시간이 흘러 ‘왕초보 사주 명리’ 강의도 하고 있다. 사주 명리를 공부한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달력을 살피며 손가락을 세어보니 고작 작년 봄이다. 사주 명리를 만난 지 1년 조금 넘었을 뿐이다.

 




자기 삶의 탐험가-되기

 

“사는 게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겠어. 이유를 알고 싶어서 상담을 받고, 병원을 다니고 있어. 병원에 가면 내 아픔에 이름이라도 붙여 주잖아.”



며칠 전, 친구와 나눴던 대화다. 우리는 무지(無知)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고, 아픈데 왜 아픈지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20대를 떠올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고, 힘들고 아픈 순간이 오면 원인을 외부로 돌렸다. ‘세상은 불공평해, 관습과 제도가 문제야, 저 사람이 잘못한 거야, 여기가 이상한 곳이야.’ 원인이 외부에 있는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투덜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투덜거리면서 몸과 마음은 더 멍들어갔다.

사주 공부를 하면서 음양오행의 세상을 만났다. 음양의 세계에선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삶을 선과 악, 길과 흉으로 보는 건 시대적, 사회적 배치에 따른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자연이 머무름 없이 계속 변화하는 것처럼,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다르게 관계 맺고, 새롭게 거듭나는 존재가 되는 것. 사주 명리에서 말하는 삶의 길이다. 음양오행으로 이루어진 사주팔자를 보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기운을 쓰는지, 감정, 첫인상, 신체와의 연결 등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모든 일엔 사건을 괴롭게 만드는 내 사유 패턴과 욕망이 있었다. 사건은 매 순간 내 안에 있는 씨앗과 만나 궤적이 만들어진다. 내 삶에 무차별적으로 돌진하는 게 아니다.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건, 내가 방향을 틀기만 하면 이전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에 대해 이해한 만큼 나 자신과 화해했다. 내가 사주 명리를 공부하며 느낀 이 해방감을 친구들도 꼭 맛봤으면 좋겠다(^^)

사주를 공부하고 난 이후, 지금은 확신한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탐구 없는 구원은 절대 오지 않는다. 달려오는 상황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삶은 끊임없이 변한다. 여전히 나는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바라며 기도한다. 다만, 실천 방향을 틀었다. 세계와 존재에 대한 탐험가가 되는 것, 그리하여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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