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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고집센 MZ의 사주명리 입덕기

by 북드라망 2025. 11. 11.

고집센 MZ의 사주명리 입덕기

김 지 영(남산강학원)

 


내가 사주명리를 처음 만났을 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사주명리에서 말하는 ‘팔자(八字)’를 내 눈으로 처음 본 순간을. 당시 감이당에서 사주명리 기본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 첫 시간에 선생님은 명식(자신의 여덟 글자가 담긴 운명의 형식)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며, 본인의 여덟 글자를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생각보다 팔자를 확인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쉽고, 간단했다. 핸드폰에 만세력 어플을 다운 받아서 생년월일만 입력하면 끝이라니. 오래된 책을 뒤져가며 뭔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손쉽게 확인할 수 있어서 사주명리와의 거리감이 조금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어플에 생년월일을 입력하는 몇 초 동안, 나는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어플에서 띄워 준 나의 여덟 글자를 바라본 순간, 그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명식에는 따뜻하다는 화(火)는 하나도 없었고, 논리의 상징인 금(金)은 고작 1개뿐이었다. 온통 토(土)와 수(水)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사주였다. 그중에서도 명식의 절반을 차지하는 토(土)가 달갑지 않았다. 토(土)의 장점으로는 매개와 포용의 힘이 있다는 것인데, 그 장점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포용하는 일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다른 토(土)의 특징 중 하나는 ‘고집’이었다. 나는 고집 센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에 고집이라는 특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그렇게 고집이 세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나는 나를 심하게 몰랐다). 장점은 평범하고, 단점만 세 보이는 흙 밭의 사주를 부정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가 태어난 날이 진짜 그날이 맞는지, 출생신고를 뒤늦게 하진 않았는지를 되물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나는 고집이 셌지만, 그땐 몰랐다. 그저 ‘사주명리가 보여주는 나’라는 사람이 ‘실제의 나’와 잘 매칭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여덟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사주명리에 대한 호기심이 바사삭 식어버렸다. 각 간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나와 잘 맞는지 모르겠고, 오히려 내게 없는 다른 오행의 설명이 나랑 더 잘 맞는 듯 보였다. 깨봉에서도 친구들이 “역시 무토답네” “네가 무토라서 그래~”라는 말을 했을 때, 나를 무토로만 규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의문도 생겨났다. 예전에 역술가가 말해준 미래의 일들도 적중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사주명리로 미래를 맞추기 어려운 거 아닐까?

왜 나는 사주명리에 대한 의구심과 불편한 마음이 생겨난 것일까? 그 이유는 사주명리가 ①미래를 예측하고 ②사람의 성향을 단정 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고정된 운명의 논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맙소사! 이건 정말 크나큰 나의 착각이었다. 막상 공부를 해보니 오히려 운명은 움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정해진 미래도 없고, 고정된 ‘나’도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오해를 푼만큼 해방감이 밀려왔고, 해방감을 느끼니 사주명리학을 삶의 내비게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주명리를 나처럼 오해하는 친구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 사주명리가 단순히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나아가 각 존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잠재성을 지녔는지 알려준다는 것을!



MZ는 운명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올해 10월에는 남자운이 들어와 있네요. 근데 20대 후반에 만나는 남자랑은 되도록 결혼하지 마세요. 그리고 돈은… 음… 33살쯤 되면 좀 안정적으로 벌겠네요.” 사주명리를 잘 모르던 시절, 사주 카페나 철학관을 가끔씩 재미로 들리면 꼭 ‘돈과 연애’에 대해 물어봤었다. 20대 때는 돈과 연애가 제일 궁금했고, 제일 불안했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20~30대의 피 끓는 청년들은 앞으로 ‘연애운’이 어떻게 펼쳐질지 몹시도 궁금하다. 애인은 언제 생길지, 썸남, 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결혼은 할 수 있는지 말이다. MZ세대를 흔히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 세대라고 말하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지금의 청년들의 내면에도 에로스는 활활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MZ가 연애를 안 하는 비율은 남녀 통틀어 약 70%에 달한다.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을 안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로 뽑는 것이 ‘돈’이다. 돈이 없는데 데이트는 어떻게 하며, 집이 없는데 결혼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30대 초반에 모아둔 돈이 몇 천이었지만, 점점 나이 드는 걸 생각하면 혼자 먹고 살기에도 빠듯해 보였다. 돈을 모으고 모아도 계속 허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 세대의 청년들보다 유독 MZ들은 ‘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다. 주식과 코인뿐만 아니라 주말마다 크루로 부동산 임장(臨場, 부동산 투자나 매매를 위해 직접 방문하여 확인하는 활동)을 다닐 정도로 돈에 대한 관심이 크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재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사회에 무관심하지만 재테크와 부동산 정책에는 민감하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에서도 재산운과 직업운은 MZ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주 전문가, 아니 최근엔 Chat GPT에게 ‘언제쯤 내가 돈 많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직업적으로 언제 성공할 수 있는지, 뭘 해야 먹고 살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가 사주 전문가나 Chat GPT에게 본인의 운명에 대해 물을 때, 대부분의 질문들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정보다는 드러난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왜 그 사건을 겪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자책으로 빠지거나 부모와 사회를 탓하는 원망에서 허우적댄다. 그래서 다시 극단으로 치닫는다. 온몸의 열정을 불태워서 번아웃을 겪거나, 이번 생은 망했다며 허무감과 원인 모를 분노에 휩싸이거나. 결국 바깥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게 되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운명이 물질적인 길흉화복으로 빠지면 미신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행은 회피하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운명을 사유하게 된다. 사주명리는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될지,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언제 결혼하게 될지를 구체적으로 예측해 내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우리에게 깊이 새겨진 욕망의 배치를 설명해준다. 자신의 욕망의 패턴을 알게 되면 기존의 사건을 재해석하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올 사건들을 다르게 겪을 수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제 사주명리로 미래를 구체적으로 맞추는 데 애쓰기보다, MZ스럽게 유연하고 말랑한 운명의 필드(field)에서 더 즐겁게 놀아보자!

 


잠재력이 꿈틀거리는 장(場), 운명
나와 가까운 친구 A와 B는 사주가 똑같다. A는 대학교 동기이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경제학을 부전공하여 졸업 후 바로 은행에 취업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한 직장에서 꾸준히 일하고 있다. B는 불어불문학과를 전공했으나 재학 중에 시민단체에 취업하여 학교에 취업계를 내고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20대 중반에 갑작스레 지리산에 있는 절을 찾아갔다. 출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며 몇 년간 절에서 여러 활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현재는 나와 함께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한편 A는 올해 결혼을 했고, B는 현재 솔로다. 인트로를 읽은 독자는 눈치 챘겠지만 B라는 친구는 지금 나와 책을 함께 쓰고 있는 ‘보경’이다.

A와 B의 사례에서 보듯이 둘은 동일 사주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삶의 궤적은 다르다. 이는 마치 사주명리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사주명리는 미래에 대한 어떤 그림도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에 몸에 새겨진 시간적 코드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입장이 사주명리의 전제가 되니 말이다.”(『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안도균, 북드라망, 27쪽) 다시 두 친구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A와 B의 전공은 각각 국문학과 불문학으로 다르지만, 어문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친구는 ‘재성’이 발달한 사주이다. 여기서 간략히 설명하면 ‘재성’은 ‘일과 돈’에 대한 운이다. A는 은행에 취직하여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데 재성의 기운을 쓰는 반면, B는 어느 조직을 가서든 일복이 많고, 일이 없으면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재성을 사용한다. 둘 다 재성을 활발히 쓰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난 직업과 직장만 봤을 땐 마치 꼭 다른 사주를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 외에도 두 친구는 ‘대운’의 큰 흐름을 같이한다. 대운이 바뀌고 나서 한 친구는 결혼할 상대를 만났고, 한 친구는 조직을 옮겼다. ‘관성’은 ‘남자와 공동체’에 대한 운을 나타내는데, 둘은 이 큰 흐름을 동시에 탄 것이다. A에게는 관성이 남성의 기운으로, B에게는 공동체의 기운으로 길이 열린 것이다.

사주명리는 한 사람이 지닌 잠재적인 운동성을 알려준다. 우리가 겪는 구체적인 사건들은 현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주명리에서는 구체적인 물질세계의 변화는 결정되어 있지 않지만, 여덟 글자라는 기본 패턴이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수많은 잠재적인 힘들의 상호작용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기본 흐름이 잡혀 있어야 세상 만물과 교감할 수 있다. 이것조차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존재는 흐물흐물하여 유지될 수가 없다.

운명은 기본적으로 세팅된 나의 여덟 글자의 큰 흐름 위에서 무한한 잠재력이 유동적으로 펼쳐지는 장(field, 場)이다. 그래서 수많은 힘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면서 인연 조건이나 나의 의지에 따라 다른 사건들로 드러나게 된다. 조건에 따라서 관성이 남자 운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나 봉사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사주명리의 기호들은 우리가 느닷없이 겪게 되는 어떤 사건과 인연의 상징적 흐름을 제시해 준다.

 



내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다
사주명리는 각자가 타고난 잠재적인 흐름과 길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할 수 있는 자기 해석의 도구로서도 활용이 가능하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에 대해 존재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사주명리의 간지들은 ‘물상(物象)’으로 표현된다. 물상이란,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사물의 형태인데, 한마디로 ‘이미지’이다. 오행이 나무, 불, 흙, 금, 물의 이미지를 갖고 있듯이 오행에서 파생된 각 간지들은 오행보다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갑목은 꼿꼿하고 큰 나무, 병화는 강렬한 태양, 계수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비유된다. 자수는 쥐이고, 묘목은 토끼이며, 신금은 원숭이로 표현된다. 각각의 간지로 대표되는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물상과 연결시킬 수 있는 키워드들이 바로 간지가 지닌 확장성이다. 마치 SNS에서 하나의 게시물에 대해 다채로운 #태그가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나의 일간은 무토인데, 무토는 ‘척박한 황무지’를 상징한다. 척박한 황무지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한 #강한 생명력이라는 키워드로 확장된다. #강한 생명력이라는 키워드를 나의 삶과 매치시켜 보면, 황무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사건을 견디는 힘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척박한 황무지’는 맛을 좌우하는 핵심 원재료이다. 원재료인 물상을 ‘나’와 어떻게 버무릴 것이냐에 따라 매번 다른 요리가 되어 나온다. 나는 척박한 황무지라는 이미지와 내 삶을 섞어 보면서 ‘나’를 재발견하고 ‘기존의 사건들’을 다양하게 재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존의 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만약 사주가 단 하나의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나처럼, 벌써 낙담하지 말라! 다른 오행이 없다고 해서 그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주는 보통 2~3개의 오행으로 이루어져 치우친 상태가 모든 존재의 디폴트 값이다. 5개의 오행이 골고루 있는 사람도 있지만, 각 자리의 비중을 따져보면 특정 오행이 태과하거나 불급이다. 모두가 편중되어 태어나다니. 조금 위안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에게 특정 오행이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 세상에 태어나 첫 호흡을 통해서 천지의 기운이 몸에 박힐 때, 그때 목-화-토-금-수 오행의 기운이 신체 안에 모두 들어온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기운이 내 안에 모두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사계절을 건너갈 수 있는 몸이 형성될 수 있다. 단지 태어날 때 특정한 여덟 개의 코드와 강렬한 케미를 이룬 것이지, 우리에게 없는 오행은 없다. 깊은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어서 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하나의 소우주로 전제한다. 서양 과학에서도 우주를 이루는 원자와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동일한 입자임이 밝혀진 지는 오래이다. 원자 단위로 들어가면 바위, 물방울, 타고 남은 재와 나를 이루는 입자는 같다. 우주에 모든 오행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신체에는 모든 오행이 담겨있다. 따라서 내게 화(火) 기운이 없더라도, 저 깊이 숨겨진 불을 깨워내려는 시도를 통해 나는 ‘다른 나’가 될 수 있다. 또한 화의 어떤 키워드를 깨울 것이냐에 따라서도 매번 나는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몹시 해방감을 느꼈다. 내 안에 모든 기운이 있다니! 그리고 내가 무엇을 깨우느냐에 따라 매 순간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니 말이다!

 


최상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방법
나는 사주명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공부를 좋아했다. 수학처럼 공식을 통해 하나의 답이 도출되면 또 다른 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안락하게 느껴졌다. 공부만 그러했을까. 방황이 힘들 땐 차라리 인생에 정해진 루트가 있길 바랐다.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일에는 능숙하고, 어떤 상황에서 미숙한지를 답안지처럼 누군가 알려주길 바랐다. 그러면 시행착오를 겪을 일이 없을 테니까. 큰 번뇌를 겪지 않고서도 나에게 딱 맞고 변하지 않는 ‘확실한 정답’들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처음에 사주명리를 만났을 때 공식처럼 내 설명이 딱 들어맞지 않자 흥미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잠재성이 우글거리는 운명의 장에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해석이 될 수 있다. 맞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리를 찾는 해석법을 과감하게 버리니 오히려 훨씬 더 편안해졌다. 기존에 바라던 확실성을 버리니 스스로 삶을 조형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용기가 생긴 것이다. 아, 나도 매 순간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구나!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42쪽)


니체의 “Amor fati –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운명애(運命愛)’를 대표하는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라’는 뜻이 아니다. 니체의 운명애란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계속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럼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게 온 모든 사건을 고귀하게 만들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건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을 내게 필요해서 온 사건으로 만드는 힘이다.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는 것은 사건을 필연지리로 파악함과 동시에 우리의 손으로 모든 사건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려는 당연지리의 힘 아닐까.

그래서 최상의 운명을 만드는 힘은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 왜 그 사건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었을까? 나의 어떤 욕망의 패턴이 매번 똑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사주명리를 통해 사건의 원인을 나에게서 먼저 찾아보며 그 사건이 내게 올 수밖에 없었음을 찾아가 보자. 그리고 그 사건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우리는 기존의 길흉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건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길흉의 흐름을 거슬러 가보자! 그때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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