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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30대 청년의 선언 – 노 모어 섹스!

by 북드라망 2025. 9. 18.

브라마차르야 vs. 아프로디테

30대 청년의 선언 – 노 모어 섹스!

박 소 연(남산강학원)

 


줄룰란드 숲에서의 맹세
줄루인들의 촌락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숲을 끝없이 행군하며 청년 간디는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적막한 숲, 그리고 걷기는 사색의 좋은 친구였다. 고민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브라마차르야를 맹세할 때가 왔다!’

나는 육과 영을 다 따를 수는 없다. 브라마차르야를 지키지 않고는 가정 봉사와 사회 봉사는 양립할 수 없다. 브라마차르야를 지키면 둘은 완전히 양립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최종적인 맹세를 할 생각에 마음이 좀 초조해졌다. 맹세한다고 생각하니 일종의 희열이 느껴졌다. 상상은 날개를 펼쳐 끝없는 봉사의 전망을 열어놓았다. (『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421쪽)


브라마차르야는 간단히 말해서 금욕, 특히 성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당시 간디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러니까 지금 간디는 40대에도 접어들지 않은 나이에 아내와의 성생활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장면을 더 클로즈업해보자.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인 1906년, 줄루 반란(밤바타 반란)이 일어났다. 줄루족은 남아프리카 나탈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토착 원주민이다. 당시 나탈은 영국령 식민지였는데,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줄루족에게 가구별로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에 영국은 이 오두막세(hut tax)에 더해 인두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한다. 사실상 이중과세였다. 인두세 부과의 목적은 줄루족을 식민 경제로 편입시키는 데 있었다. 줄루족은 다수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자급자족 경제 공동체였다. 농사를 지으며 교환경제, 현물경제로 살아가던 줄루족에게 연 1파운드의 인두세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세금을 낼 현금을 만들기 위해선 백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에 들어가 일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영국의 행태에 줄루족은 당연히 분개했다. 그리고 줄루족 족장 중 한 사람인 밤바타가 세금을 걷으러 온 징수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인간 사냥’을 시작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잡아서 채찍질하고,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진압 과정에서 3~4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줄루족 전사들


이 소식을 들은 간디는 영국 정부에 자원해 소규모 의무부대를 꾸려 현장에 갔다. 백인들은 줄루족을 간호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디의 의무부대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부상당한 줄루 양민들을 들것에 뉘어 어깨에 메고 하루에 60여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상당히 고달픈 일이었으나 한편으로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채찍질 형벌을 받고 그대로 감금·방치되어서 맞은 부위가 곪기 시작한 사람들, 민간인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오인 사격으로 인해 크게 다친 사람들 등. 간디가 꾸린 의무부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앓다가 죽을 목숨들이었다. “우리는 그 일을 좋아했다. 줄루족은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눈빛을 통해 신이 우리를 보내준 것처럼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한길사, 229쪽)라고 간디는 밝히고 있다.

삼박자가 맞아떨어졌다. 1900년에 넷째 아이 데브다스가 태어나고부터 고민해오던 브라마차르야 맹세,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을 꿀꺽 삼키고 줄루인들을 간호하는 일, 그리고 몇 날 며칠 동안 고요한 숲속을 걷고 또 걸었던 일. 부상당한 사람들을 간호하며, 줄루인들의 고마움 가득 담긴 눈길을 받으며 간디는 오묘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맹세를 결심하니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낮에는 숲을 걸으며 브라마차르야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고, 밤에는 동료들과 함께 토론했다. 동료들은 간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공감했지만, 그렇다고 간디를 따라 맹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감했다면 한 사람쯤 같이할 만한데 아무도 안 했다고 그래서 좀 웃겼다. 그만큼 어려운 길을 간 거다. 사실 의아하긴 하다. 봉사할 때는 열심히 봉사하고, 가정생활에도 충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예 끊겠다고 선언할 것까지 있나?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또 모른다. 간디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다. 아무리 봉사가 좋고, 봉사하고 싶더라도 브라마차르야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해서 한편으로 간디의 브라마차르야 맹세가 아내 카스투르바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행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심지어 간디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건 아내를 사랑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막 요동치면서 한쪽으로 쏠리는 마음이 사랑인데, 간디가 자꾸 그 쏠림을 널리 펼쳐서 우주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스투르바이는 분명 남편의 이런 행동 때문에 상처받았을 거라고 말한다. 과연 그랬을까? 간디는 무슨 이유에서 이전부터 브라마차르야의 필요성을 느껴왔으며, 끝내는 그걸 맹세로 못 박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간디의 걸음을 차근차근히 따라가 보자.


브라마차르야의 의미
브라마차르야의 계율은 앞서 말했듯 성행위의 엄격한 금지이고, 나아가 모든 욕망의 전방위적 제어이다. 남녀는 욕정 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부부는 오직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으로만 성행위를 해야 한다. 성행위의 절제는 다른 모든 감각기관의 절제 또한 요구한다. 섹스를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이 가득하고, 눈과 귀로 색을 탐닉하고, 성욕을 부추기는 음식을 먹는 등의 모든 것은 다 브라마차르야 위반이다. 단순히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 게 다가 아니다. 일상에서 범행(梵行), 즉 맑고 깨끗한 행실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의 심오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브라마차르야에서 ‘브라마’는 신, ‘차르야’는 행위의 방향을 의미한다. 즉 ‘신을 향한 행위’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하나. 간디에게 신은 진리 그 자체이다. 실체가 있는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곧 신이다. 그러므로 브라마차르야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 간디의 언어를 빌려오자면 진리를 실험하는 것이다. 그럼 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신은 사람의 심정이라는 처소에 계시고, 손톱이 손가락에 가까운 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간디 전집 2권』, 라가반 이예르 지음, 허우성 옮김, 나남, 846쪽) 그러나 심정의 신을, 내 안의 진리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여의주를 지니고 살고 있으나 그 보물에 때가 겹겹이 쌓여서 제구실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재한 보물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신은, 진리는 분명 우리 개개인의 심정에 존재한다. 덮여있는 때를 한 꺼풀씩 벗겨가는 것이 범행의 실천이며, 정진해감에 따라 곧 “잃어버렸다고 여겨졌던 보물은 회복될 것이다.”(위의 책, 846쪽)

그렇다면 범행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걸까? 브라마차르야의 핵심은 바로 생각과 말, 행동의 일치이다.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이 셋의 어긋남으로부터 비롯된다. 간디의 문제의식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거기 성욕이 결부되니까 자꾸 사랑이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됐다. 성적 쾌락의 탐닉은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집착은 질투와 소유욕을 낳았다. 사랑한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 상대를 구속하고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는 방식으로 튀어나왔다. 간디는 질문한다. 이러한 간극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의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아내를 정욕의 도구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정욕의 종인 한, 나의 성실은 아무 가치가 없다.” (『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292쪽)

사실 간디가 브라마차르야 맹세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06년 이전부터 꾸준히 브라마차르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지만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했었다. 아이 넷을 낳을 때까지! ‘분투했다’, ‘수많은 부침이 있었다’라고 하는 간디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간디는 강한 성욕의 소유자였다. 아니, 정말로? 간디 하면 금욕의 대명사, 흰색 도티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평온한 성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날 때부터 뭔가 특별했으리라, 원초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간디는 간디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간디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깜짝 놀라게 된다. 인도의 아버지라 불렸던 간디인데 이렇게 인간적이라니! 욕망의 측면에서도 우리와 다를 바 하나 없다. 똑같이 엉망진창, 복잡다단했다. 그러나 간디는 그걸 당연시하지도,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모순을 놓치지도 않는다.

성욕을 채우기 위해 아내에게 다하는 성실은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희생한다. 하지만 이 희생은 찰나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서 치러지는 한 아무런 결실이 없다.”(『간디 전집 2권』, 라가반 이예르 지음, 허우성 옮김, 나남, 846쪽)라고 하는 이 성찰이 간디의 놀랍고도 특별한 지점이다. 흔히 연인이나 부부가 서로에 대해 더 이상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을 때 권태기가 온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한결같은 마음을 내는 것.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욕망의 크기가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사랑이 변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간디의 맹세가 더욱 감동적이다. 간디는 아내를 ‘진짜’ 사랑하고 싶었구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었구나.

그렇게 맹세의 순간이 다가왔다. 6주 동안의 의무부대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간디는 브라마차르야 맹세의 결심을 아내와 공동체 식구들에게 털어놓았다. 간디의 표현에 따르면 카스투르바이는 “그것을 자신의 결심처럼 받아들였다.”

 




브라마차리(학생)의 의무
간디의 브라마차르야는 범행을 사회 전체에서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아내나 가정에만 국한된 사랑이 아니라 ‘live kinship’ 즉 모든 생명과 생동적인 동족 관계를 느끼는, 경계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간디는 위대한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했겠지, 하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간디가 이 말을 들으면 당황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간디한테 이런 마음 씀은 무척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힌두교 관습 중에 ‘아슈라마’라고 불리는 생애 주기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삶의 네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 스텝이 바로 브라마차르야(학생기)이고, 그리하스타(가주기), 바나프라스타(임서기), 산야사(유행기)로 이어진다. 청년기에 밟아야 하는 인생의 첫 단계를 삶을 포괄하는 원리로 확대한 것이 간디의 브라마차르야이다.

학생기의 다르마는 공부다. 감관을 제어하며 스승 곁에서 배우고 익힌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배움이 주어지는 족족 흡수한다. 가르침을 한껏 받아 안고 그걸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무한히 받지만, 세상에 줄 건 딱히 없는 시기다. 그러나 언제까지 받을 수는 없다. 이러한 받음을, 간디의 표현에 따르면,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온전히 갚아야 할 의무가 브라마차리에게 주어진다.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뭔가를 줄 수 있으려면 산야시(포기자)가 되어야 한다. 내 감각을 만족시키고, 내가 가진 것들을 움켜쥐고서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므로 하나씩 포기해야 한다. 아파리그라하(무소유)를 실천하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행해야 한다. 세상 안에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브라마차르야와 산야사의 시기는 일맥상통한다.

그 가운데 브라마차르야가 첫 스텝인 이유는 청년이 가진 에너지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은 정액을 생명력의 정수로 보았다.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물질이라면, 잘 보존되었을 때 엄청난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 에너지를 잘 보존해서 학생기의 다르마, 배움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청년들을 만나면 간디는 누누이 강조한다. 쾌락으로 낭비하기에 젊음은 너무나도 귀한 것이라고.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대가 없는 베풂을 받아 형성된 너의 신체와 힘찬 에너지를 쾌락에 중독된 채 다 보내면 되겠느냐고 말이다. 감관의 제어, 생각과 말과 행동의 간극을 줄여 나가는 훈련이 학생기에 강조되는 이유다. 학생으로서 잘 받기 위해서는, 또 이후에 잘 주기 위해서는 브라마차르야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간디가 이야기했던 쾌락은 단순히 미각의 만족, 성욕의 충족 정도였을 테다. 그래도 간디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이를 경계한다. 지금은 더하다. 유튜브, 숏폼, SNS, 게임, 포르노 등 중독되기 딱 좋은 것들이 차고 넘친다. 미디어 세상에서 누리는 쾌락은 정(精)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빠른 속도, 도파민, 파편적 정보에 중독되어 집중력을 잃어가는 지금, 브라마차르야는 더더욱 사유해보아야 하는 필수적인 덕목이지 않을까. 간디가 이야기하는 브라마차르야, 신구의의 일치란 곧 내가 마주한 현재의 과업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에 더더욱!

각설하고, 아슈라마 생애 주기는 ‘내’가 무언가를 ‘해내는’ 시기를 나이별, 과정별로 분류해둔 제도가 아니다. 간결하게 이야기하면 받고, 주며 순환되는 삶의 리듬을 사유하는 것이다. 브라마차리의 시선으로 삶을 보니 마음이 가볍고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십 대, 이십 대의 주 고민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관심 있는 분야도 많았다. 이국종 교수님을 보면서는 의사가 되어 응급의학과에 가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정치가 궁금했다. 판문점 선언을 보면서는 남북통일에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고, 통일을 위한 활동에 일조하고 싶었다.^^;; 꿈은 큰데 별다른 능력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상태가 막막하고 갑갑했다. 홈스쿨링을 해오며 검정고시 준비하는 수준 정도로 학과 공부를 이어 왔기에 더 미칠 지경이었다. 수능을 준비해야 하나? 근데 그러기엔 갈 길이 너무 멀었다. 고2, 고3에 중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그래서 공부도 잘 안 잡혔다. 그러다 다 필요 없고, 먼저 자립부터 해야겠단 생각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준비해야 할 과목 중에 수학이 없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었다.^^

이 시기엔 정말 세상 모든 고민을 내가 다 짊어진 양 비장하게 우울했다. 내가 과연 세상에서 한몫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근데 인생 뭐 별거 없다고, 그냥 주는 삶을 살라고 한다. 포기하기 위해서 받는 게, 주기 위해서 세팅된 게 나의 삶이므로! 심플해서 좋고, 방향이 생겨서 든든하다. 어디서 뭘 하든 주는 삶이라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 그렇게 어디로든 한 발짝 나아가면 된다는 거. 이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큰 가벼움을 선사할 줄은 몰랐다.

이런 삶의 비전은 희생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싹튼다. “인간의 본성은 아주 평범한 일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 이런 말은 희생(sacrifice)에도 사실이다. 생명은 희생에 의해서 유지되지만, 우리는 그것에 주목하지 않는다.”(『간디 전집 3권』, 라가반 이예르 지음, 허우성 옮김, 나남, 652쪽) 나의 삶이 무수한 희생, 받음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 희생은 마치 공기와 같다. 없으면 죽지만 평소에는 공기의 존재를 인지조차 못 한다. 이렇게 당연시되어왔던 것들을 생소하고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브라마차리의 첫 번째 의무다.

이번 생의 인연도 수많은 받음의 산물일 것이다. 태중에든 순간부터 받고 또 받았다. 어머니의 불편함을 받아 10개월 동안 안락하게 머물다가,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 무럭무럭 자란다. 이후엔 스승의 무한한 애정과 가르침을 받아 지녀 성장한다. 감사히 받는 것이 브라마차리의 의무이자,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건 학생기의 특권이 아닐까. 기꺼이 받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 동시에 언젠가 나도 세상에 무언가를 나눠줄 수 있기를 서원하면서, 힘차게 사는 것.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스레 한 단계씩 거쳐 가게 될 것이다. “아침마다 순박한 촌락에 군인들이 쏘아대는 콩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으며”(『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420쪽), 부상자를 치료하며 어릴 때부터 들어와 친숙했을 브라마차리의 의무를 새롭게 떠올렸을 간디처럼. 브라마차리에서 산야시로의 대전환! 맹세로 못 박힌 것은 줄룰란드의 숲에서였지만, 그 씨앗은 남아프리카에서부터 발아해 자라왔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을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의 의무를 만났다. 그리고 의무를 다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세상을 만나다
1893년, 스물네 살의 간디는 소송 사건의 해결을 돕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향했다. 영국에서 고생고생해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에 돌아왔으나, 타고난 수줍음으로 인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사건 하나를 맡아 처음으로 공판정에 나가게 되었다. 반대신문을 위해 일어섰는데, “간이 콩알만 해지고 머리가 핑핑 돌아 온 법정이 다 돌아가는 듯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166쪽) 너무 당황해서 사건을 다른 변호사에게 인계하고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남아프리카에 갈 때까지 간디는 다시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진정서를 작성하며 지냈으나, 그 일만으로는 수입이 충분치 않았다. 인도에 돌아와 열었던 첫 변호사 사무실은 결국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뭄바이에서 라지코트로 자리를 옮겨, 이제는 아예 신청서나 진정서만 전담해 쓰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다 압둘라 회사’에서 진행되는 소송 사건의 해결을 보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남아프리카로 떠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간디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간디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1등칸 기차표를 구매했음에도 너는 ‘쿨리’니까 짐차 칸으로 가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불응해서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간디는 어안이 벙벙했다.

간디는 카스트 중에서 바이샤(상인) 계급의 사람이다. 간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고향인 포르반다르에서 대대로 총리직을 지내기도 했다. 작년에 간디 생가인 ‘키르티 만디르’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허름한 판잣집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넓고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우리를 맞이했다. 자서전에서 간디의 아버지는 재물을 모으는 것에 관심이 없어, 남긴 재산도 극히 적었다고 밝혀두었기에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간디 집안이 생각보다 굉장히 부유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또 그는 영국 유학파 아니던가.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으니 이제껏 살면서 무시당할 일은 한 번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달랐다. 영국에서 만났던 백인들은 간디의 친구였지만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간디가 변호사건 바이샤 계급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간디는 까만 피부색을 가진 쿨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춥고 캄캄한 기차역에 우두커니 앉아서 간디는 꼬박 밤을 샜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또 얼마나 놀랐을까! 그도 그럴 것이 자국의 인도인들은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따위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다니. 내가 유색 인종이라는 새삼스러운 인식. 이 사건은 간디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인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오늘 겪은 일은 이곳에 만연해 있는 차별의 한 파편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겠구나, 라고.

아직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동료에게 전보를 치고 도움을 받아서 어찌저찌 기차를 타는 데 성공했다. 도착역에서 최종 목적지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여기서 또 일이 벌어진다. 역마차 리더(마차를 부리는 백인)는 간디를 마차 안에 태우는 대신 마부 옆자리인 자기 자리에 앉히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가 승객 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다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졌는지, 이번에는 자신이 마부 옆자리에 앉아야겠으니 간디에게 바닥에 앉아서 가라는 것이었다. 간디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안에 들어가 앉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달려와 간디의 뺨을 후려쳤다. 간디는 버텼고, 욕설과 폭행이 이어졌다. 이제껏 이런 수모를 겪을 일이 없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분통 터져서 정말,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고 인도로 돌아가야지! 할 법도 한데 간디는 그러지 않았다. 사건 해결을 도우며 하나둘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하여 찬찬히.

간디가 기차에서 쫓겨난 뒤 바로 알아챘던 것처럼, 이런 수모와 고달픔은 간디만의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보였다. 1등칸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새 발의 피였다. 이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살고 있었다. 토지 점유가 불가능했고, 선거권도 없었다. 공용도로를 이용할 수 없었으며, 밤 9시 이후에는 외출할 수도 없었다. 유색인종법과 아시아인 특별법이 이들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계약노동자들의 경우 고용주에게 폭행당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세금을 내야 하는 등 어려움이 컸다. 남아프리카의 지방 정부는 백인들 편이었고, 영국 정부는 여론을 신경 쓰느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인도 정부는 자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는커녕 지방 정부와 영국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소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정치적 각성이 일어났다. 간디는 우선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했다. 이곳에서 선거권 박탈 법안에 대한 투쟁을 이어갔으며, 교육협회를 창립해 청년들을 공부시키고, 계약노동자에게 부과된 터무니없는 세금에 저항했다. 영국인들과 인도 국내의 인도인들에게 이곳의 실정을 알리는 역할도 했다. 자국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기에, 마음 둘 곳 없었던 사람들. 그저 스스로를 지키기 바빴던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에게 간디의 존재는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받는 시기를 지나 도움을 주는 시기, 삶의 제2막이 펼쳐졌다. 불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여러 공적인 일을 다루면서 간디는 브라마차르야의 원칙을 견고히 한다. 욕망을 극복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면 스와라지(자치)도 없다! 브라마차르야를 공적인 일과 삶을 포괄하는 원리로 채택한 것이다. 그렇게 줄루족의 숲에서 맹세를 결심하고, 이를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끝으로 덧붙이면 브라마차르야(학생기)에 해당하는 나이는 출생부터 25세까지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는 학생기에 브라마차르야를 탐구하게 됐다. 물론 브라마차르야는 삶을 포괄하는 덕목이지만, 나이까지 맞으니 금상첨화다.^^ 생각, 말, 행동의 일치! 이 말이 주는 단순명료함이 좋아서 작년 1년 내내 화성에서 공부하며 브라마차르야 노래를 불렀다. 에로스, 금욕, 정결주의… 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모태 솔로의 신분으로 이런 글을 쓰게 됐고, 식은땀이 좀 났다. 그런데 경험이 일천하여 오는 어려움과는 별개로 간디와 브라마차르야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너무 재밌다. 이십 대에 브라마차리 간디를 만나서 그의 행보를 찬찬히 따라가며 살펴볼 수 있다니! 이 받음과 배움이 참 감사하다.

간디의 브라마차르야는 책에서 나온 게 아니다. 욕망을 대면하고, 곡절을 겪어가며 자신이 직접 엮은 실험의 기록이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욕망을 두고 진리를 실험했는지, 간디의 어린 시절부터 클로즈업해서 관찰해보려고 한다. 그 전에 간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독보적인 캐릭터의 조르바를 먼저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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