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해러웨이』 - 사실과 진실의 줄다리기
“탈체현적 표상 안에서 지식은 ‘관점 없는 것(pespectiveless)’이 된다. ‘만일 지식 생산과 평가 안에서 지식의 주체가 하나의 맹점으로 남겨진다면, 필연적으로 모든 지식은 그 중심부에서부터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오염될 것이다.’ 이 표상체계 안에서는 흔히 잊혀 왔지만, 우리는 보기 위해서, 그리고 ‘시각’이라는 감각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몸을 배워야 한다.”
- 김애령, 『애프터 해러웨이』, 봄날의박씨, 95쪽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서구 주체성의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데카르트적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가 ‘데카르트적 순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변형시킬 필요 없이 올바른 ‘인식 행위’만을 제대로 수행하면 되는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진리’가 ‘관점 있는 상태’로 ‘도달해야 할 것’에서 ‘관점 없는 상태’로 ‘획득’되어야 할 것으로 변형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전환 속에서 ‘진리’는 ‘주체성의 변형’과 관련된 문제에서 ‘주체성과 무관’한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지식의 주체’가 하나의 ‘맹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는 자신의 신체성을 그 문제에 걸맞게 바꿀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주체성-신체성과 진리를 결부하는 태도야말로 과학적 인식이 물리쳐야만 하는 비합리성이 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적 순간’ 이후 전환된 진리관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냈을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켜면 그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상품을 전시하는 광고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한 광고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나에게 ‘추천’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웹에 남긴 로그데이터에 근거한다. 평소 무슨 물건을 자주 사는지, 어떤 뉴스에 관심을 보이는지 등을 토대로 나의 관심사를 추측하고, 그걸 토대로 광고를 띄우는 식이다. 그리고 추천된 광고를 보고 구매까지 도달하면, 그 역시 데이터가 된다. 그러한 일련의 피드백 루프 속에서 나는 ‘현실’에 가깝게 프로파일링 된 주체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렇게 프로파일링 된 ‘나’는 진짜 ‘나’일까? 당연하게도 ‘나’는 ‘데이터 다발’로 환원되지 않는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진짜 나’라는 게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나-주체’를 ‘데이터’로 환원하는 와중에, 그리고 그것이 ‘나’를 대표한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맹점’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때 그러한 ‘데이터화 된 주체’는 어떤 의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러한 주체성이 지배적인 주체성이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데이터 프로파일링의 최우선 목표는 ‘나’를 끊임없이 ‘소비자’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광고가 쉼 없이 ‘혁신적인’ 제품을 눈앞으로 끌어다 대고, 내가 그것을 클릭하고 구매할 때 ‘맹점-보이지 않는 것’은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와중에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일종의 ‘능력’인데, 이 능력은 이를테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등과 같은 ‘나-주체’를 이루고 있는 일련의 ‘진실들’이다. ‘맹점화 된 주체’는 이 ‘진실’을 전부 ‘화폐’와 관련된 것들로 환원한다. ‘돈이면 다 돼’와 같은 일견 냉혹해 보이지만, 얄팍한 윤리가 다른 모든 윤리를 대체하는 것이 그런 환원의 결과다. 그런 ‘냉혹한 지식’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주체의 능력에 관한 그 어떤 진실도 말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비합리성을 드러낸다. 요컨대 ‘돈’이 그 인간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사실 그 인간이 돈이 많은가 적은가일 뿐이다. 그것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건 다른 모든 앎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의 ‘사실’과 ‘진실’은 포개어 질 수 있지만, 꼭 맞게 포개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모든 ‘진실’ 중 유일한 ‘진실’인 척 굴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몸’을 다시 배워야 한다면 이 때문이다. 단번에 이 세계를 초월해 온갖 가상을 진실인 것처럼 만들어내는 의식과는 다르게, ‘몸’은 한번에 하나씩의 ‘진실’만을 열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두 발의 운동을 통해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실에 다다를 수 없다. 그 ‘진실’만이 ‘관점을 가진 것’ 속에서 말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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