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두려움의 정치학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역사가, ‘사실’에서 마음을 읽어내는 자
‘역사가’라 하면 흔히 ‘사실을 기록하는 자’를 떠올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역사가에게 ‘사실(fact)’은 언제나 중요하다. 문학은 때로 상상과 꾸밈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지만, 역사는 그럴 수 없다. 역사는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史)라는 글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본뜬 글자다. 근대 이전에 제사란 하늘과 소통하는 인간의 기예였다. 어느 때에 어떤 제사가 효험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일은 제사만큼이나 중요했다. 기록을 남겨야 후대가 참고해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통’ 자체에 이미 해석이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없듯이, ‘사실의 기록’에도 역사가의 선택과 해석이 불가피하다. ‘사실’은 허구(fiction)라는 먼지를 털어낸 뒤 드러나는 순수한 본질이 아니다. 사실은 언제나 반쯤의 허구다. 원석이 가공될 때 비로소 빛이 나는 것처럼, 사실도 언제나 다듬기와 변형 속에서 그 참된 모습이 드러난다. 역사가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정보들, 때로는 허구로 판명된 것까지 끌어와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다시 읽는다. 그리하여 사실을 빚어낸다. 그렇게 기록에는 언제나 기록자의 해석이 스며있다. 역사가는 사실과 허구, 기록과 해석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기록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으며 나는 역사가의 의의를 다시 생각한다. 사마천을 따라 말하자면, 역사가란 일어난 일을 기록하면서 그 속에 깃든 마음을 발굴하는 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을 기록할 때조차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기쁨과 슬픔, 존경과 원한, 우정과 복수 등등 다양한 마음들은 그 자체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뜻을 이루게 하는 동력이다. 《사기》의 무수한 기록들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사마천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또한 그러한 독특함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흔히 “진시황(秦始皇)”을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 혹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킨 폭군’, ‘죽음이 두려워 신하들을 보내 불로초를 찾게 하고, 신선이 되고자 했던 어리석은 인간’ 등등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의 이 모든 표상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두려움을 발견한다. 두려움은 한 인간의 나약함이기만 한 게 아니다. 그것은 제국을 세운 동력인 동시에 무너뜨린 원인이기도 하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전쟁과 과격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제국을 건설하고, 제자백가들의 학설을 불태우고,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과잉적 자기방어였던 것이다. 나는 〈진시황본기〉를 역사 속 수많은 폭군 중 한 명에 대한 전기(傳記)가 아니라 폭군을 낳은 두려움의 정치학에 관한 텍스트로 읽는다.

2.‘진시황(秦始皇)’, 서술의 변곡점
지금 우리가 진시황을 몇 가지 이미지로 기억하듯,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도 진시황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천이 보기에, 그러한 인식들은 대체로 합당하지 않았다. 그는 〈육국연표(六國年表)〉와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나라는 천하를 취하려고 매우 난폭했으나 세상이 바뀌고 변하면서 변법을 단행하여 공을 이룬 것이 크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후대의 왕을 본받아라”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후대 왕의 방법은] 우리의 시대와 가까우므로 풍속의 변화가 서로 유사하여 [그들의] 의론이 낮더라도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학자들은 들은 바에만 얽매였으며 오직 진(秦)나라가 제위를 누린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 않는다. 모두 비웃으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귀로 음식을 먹는 것과 차이가 없다. 슬프구나!” - 〈육국연표(六國年表)〉
“진나라가 황제라고 일컫고 나서도 근심과 전쟁이 끊임없었던 것은 제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신과 종실 들에게] 한 자의 땅을 분봉하지 않았으며, 이름난 성벽을 무너뜨리고 파괴하였으며 칼끝과 화살촉을 녹이고 호걸들을 없애 만 세대 동안의 편안함을 유지했다.” -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
확실히 진시황의 통치는 난폭했고,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무능했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지 겨우 15년 뒤인 기원전 206년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섭과 오광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王侯將相何有種)”라고 말하며 난을 일으켰을 때 수많은 백성들이 그에 동조한 것은, 그 둘이 특별히 덕 있는 현인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가 건드리면 터질 만큼 당시 진나라의 통치가 각박했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알고 있었다. 진시황의 통치는 민생을 고려한 게 아니고, 그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와 그 측근들도 권력 다툼에만 신경 쓸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남긴 개혁은 이후 중국의 드넓은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고 운영하는 통치술로 활용됐다. 대표적인 게 군현제도다. 진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통치자들은 동성의 친척들에게 땅을 나눠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도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후들 스스로 세력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실제로 한(漢)나라는 두 차례 제후들의 반란을 경험한 뒤에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진나라의 군현제도를 채택했다. 이 외에도 법령과 문자, 도량형 통일 같은 대대적인 문화 정비와 도로를 정비하고, 장성을 쌓는 등의 토목 사업은 제국의 권력을 사용하는 테크닉으로 이후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이어졌다. 사마천이 고작 15년 만에 멸망한 진나라의 통치를 두고 “만 세대 동안의 편안함을 유지했다”고 극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이후 들어설 미래의 수많은 제국들이 진나라의 통치를 본받을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모두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가 누구보다 뛰어난 개혁가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진시황본기〉의 위상을 생각해보자. 〈진시황본기〉 이전까지 본기(本紀)는 국가 단위로 서술됐다.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도 〈주본기(周本紀)〉에 기록됐다. 진시황도 따로 나눌 필요 없이 〈진본기(秦本紀)〉에 넣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따로 〈진시황본기〉를 기록했다. 기록이 나뉘었다는 것은 서술하는 문제의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사마천이 보기에, “진나라”로는 담을 수 없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진시황”이라는 인간에 담겨 있는 것이다.
다른 본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진시황본기〉는 독특하다. 사마천은 ‘진나라’가 아니라 ‘진시황’의 부침을 기록했다. 다른 본기들은 비범한 선조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본기(夏本紀)〉의 시작은 치수 사업으로 천하를 안정시킨 우(禹) 임금이고, 〈은본기(殷本紀)〉는 우 임금의 치수 사업을 도운 설(契)이다. 이들은 태생부터 신령스럽다. 우 임금은 오제(五帝) 중 첫 번째인 황제(黃帝)의 후손이고, 설은 지나가는 제비가 떨어뜨리는 알을 여인이 삼키고 낳은 자식이다. 게다가 우 임금과 설이 힘을 합쳐 이룬 치수 사업은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위업이다. 사마천은 이들의 은덕 덕분에 후손들이 나라를 세우고 크게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에 〈진시황본기〉는 타향에서 태어나 조나라의 인질로 자란 진시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비범함은커녕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곤궁한 처지가 진시황의 시작이다. 그는 일국의 왕족이지만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크게 이기면 인질로 잡혀 있던 진시황이 대신 분풀이를 당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진나라의 왕이 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은 여불위가 독차지하고 있었고, 진시황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겨우 여불위를 몰아내고 진나라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여섯 나라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졌다. 한 번의 전투에서 수십만 명이 죽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포로를 대거 참수하거나 생매장하는 끔찍한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잡아야만 했던 진시황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나라를 몰살시켜야만 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 ‘한복판’에서 태어나 자랐다. 춘추전국시대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시대다. 약하면 강자에게 삼켜지고, 강자가 되더라도 더 큰 강자에게 당할지 모르는 시대.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위세도 그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제나라는 환공이 죽자마자 혼란에 빠졌고, 진(晉)나라는 조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로 분열됐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멸망했다. 다른 나라를 제압하지 않으면, 언젠가 제압당할 것이라는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진시황 또한 이러한 시대적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 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그는 돌봄보다는 괴롭힘을 먼저 경험했고, 믿음과 우정보다 불신과 원한을 마음에 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이세황제와 자영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진시황의 두려움에 전염됐다.
사마천은 가의(賈誼)의 평을 인용하며 진나라를 다스린 세 명의 황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진시황은 자신에게 만족하여 남에게 묻지도 않았고 계속 잘못을 범해도 고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그것을 답습하며 고치지 않고 포악하게 굴어 재난을 가중시켰다. 자영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위태롭고 약했으며 보필할 신하가 없었다. 세 군주가 미혹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멸망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멸망이 당연한 통치’. 이러한 평가는 다른 어떤 본기(本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무능한 군주나 포악한 군주는 다른 본기에도 있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도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폭군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된 〈하본기〉와 〈은본기〉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다스린 탕왕(湯王)이나 문왕과 무왕 같은 성군들도 기록돼 있다. 국가를 부강하게 일으킨 성군이 등장했으면, 몰락하게 만드는 폭군이 교대로 등장한다. 통치자의 덕이 곧 왕조의 흥망을 결정짓는다. 오랜 시간 속에서 나라의 흥망이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진시황본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혹된 통치자들만이 기록돼 있다. 국가의 흥망에 앞서 이 미혹됨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진시황의 절대적 권력과 영생에 대한 집착은 그가 제국을 통치하는 핵심 기반이다. 통치자의 역량이 아니라 일개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덕분에 다른 본기에서 읽을 수 없는 역설과 비극, 심리가 드러난다.
〈진시황본기〉는 ‘진시황’이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어떻게 제국을 세우고, 무너뜨렸는가를 추적하는 탐색이기도 하다. 진시황은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차지했고, 다시 살아남기 위해 제국을 건설했다.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통치를 고민한 것이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난립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이 고민 속에서 “진시황”이라는 존재는 진나라의 역사 안에 머물 수 없다. 여기서 사마천은 본기의 형식을 바꾼다. 〈진시황본기〉를 기점으로 본기는 왕조가 아니라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릴 덕목’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는 나약한 인간의 흔들리는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3.두려움과 의심으로 이룬 제국, 진(秦)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 한나라의 멸망을 시작으로 221년 제나라의 멸망과 함께 천하 통일을 이룩했다. 열세 살(기원전 246년)에 왕위에 올라 즉위한 지 26년 만의 일이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영토가 하나의 나라로 편입됐다. 영화 《영웅》에서는 진시황의 이러한 행보를 ‘천하의 전란을 종식하기 위한 대의(大義)’로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진시황이 무엇 때문에 천하 통일에 매달렸는지 알 수 없다. 사실 천하 통일은 맹자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 중반 무렵부터 퍼지고 있던 이상이다. 양양왕(梁襄王)은 맹자(孟子)에게 “천하는 어떻게 하면 안정되겠습니까?(天下惡乎定)”, “누가 천하를 통일하겠습니까?(孰能一之)” 같은 것들을 물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약육강식과 무한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게 했을 법하다. 그러니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시황은 백성에 대한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에 근거한 왕도정치를 행하는 대신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다. 요(繚)라는 신하는 진시황의 인간됨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왕의 사람됨은 높은 콧등에 째진 눈, 사나운 짐승 같은 가슴팍,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각박하고 마음이 호랑이나 이리 같고 자신이 곤란해지면 쉽게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지만 뜻을 이루면 역시 쉽게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내가 서민 신분인데도 나를 만나면 늘 스스로 몸을 낮춘다. 만약 진왕이 천하에 대한 뜻을 이루고 나면 천하가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와는 오래도록 교유할 수 없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사마천의 요의 눈을 빌려 진시황이란 인간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천하가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天下皆爲虜矣)”이라는 부분이다. 나는 여기서 진시황의 오만함이 아니라 약함을 읽는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위대한 인간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칭호를 황제(皇帝)라 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 일을 해낸 최초[始]라는 점을 강조하며 “진시황(秦始皇)”이라 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을 세웠다. 사마천은 비석의 실제 기록을 〈진시황본기〉 곳곳에 기록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자신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태평성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진시황의 자화자찬 속에 두려움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천하를 자신의 발밑에 두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이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연나라 태자 단이 보낸 자객 형가(荊軻)와 장량이 보낸 역사(力士), 궁궐 밖에서 만난 도적떼는 그러한 의심을 더욱 키웠다.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라다녔다. 그는 여전히 춘추전국시대의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혹 자신의 말을 발설하지 않을까, 행적이 노출되지 않을까 언제나 두려워하며 주위 사람을 의심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머무를 경우,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발설한 것이로다” 그리고 그 당시 곁에 있던 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후로는 황제가 행차한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시황은 진나라가 만세 동안 이어지기를 바랐고, 세상이 그런 통일 제국을 연 자신을 기억하길 바랐다. 전국에 비석을 세워 모든 백성이 자신의 위업을 노래하길, 법령과 문자, 도량형을 통일해 자신이 내리는 명령이 시골 구석에도 그대로 시행되기를 바랐다. ‘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각인해야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황제는 어떤 순간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 불안함은 죽음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모두를 의심하면서 진시황은 불멸에 집착했다. 불사의 약을 구하려 방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방사(方士)들의 말에 기대어 기이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황제가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인 짐(朕) 대신 진인(眞人)이라 자칭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간 진시황의 기벽이라기보다 두려움이 낳은 집착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다양한 사상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자백가의 학설들을 불태우는 분서(焚書)를 행하고, 이민족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개 인간의 운명에 갇히는 게 두려웠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잊히고, 죽어 사라질까 무서워했다. 그래서 병적으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모든 요소를 차단하려 했다. 요컨대, 진시황의 제국은 힘으로 세워진 것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놓여 있었다. 두려움은 의심으로 이어지고, 의심은 배제를 낳았다. 타자를 몰아내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모조리 제거하려는 공포 정치가 펼쳐진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7월 병인일, 진시황이 사구평대에서 서거했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서거했기 때문에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진시황의 관을 온량거(轀輬車)에 싣고 예전에 총애받던 환관으로 하여금 함께 타게 하여, 이르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國事)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했다. 오직 호해와 조고 및 총애받던 환관 오륙 명 정도만 황제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때마침 여름철이어서 황제의 온량거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고기 1석(石)을 수레에 싣게 하여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했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시황은 전국을 순수(巡狩)하는 길 위에서 죽었다. 죽기 전 유언을 남기긴 했으나, 곁에 있었던 측근들에 의해 그의 죽음은 조작되었다. 측근들은 자신들과 친한 호해를 다음 황제로 내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진시황의 죽음을 감춰야만 했던 신하들은 죽은 진시황을 대신해 나랏일을 처리했다. 문제는 악취다. 진시황이 죽었던 시기가 마침 여름이었던지라 부패는 걷잡을 수 없었다. 측근들은 마차에 말린 고기를 실어 냄새를 가리려 했다. 이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단순히 진시황의 시체가 농락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진시황의 측근들은 진시황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생전에도 “진시황은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에 군신들도 감히 죽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진시황은 죽고서야 ‘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관념이 아니다. 시신이 썩는 악취가 진동했다. 불멸을 꿈꾸고, 영원토록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진시황은 한낱 부패하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결국 썩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진시황의 자기방어는 무너졌고, 이후 중국 통치자들이 유용하게 활용했다.
4.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역사 읽기
진시황이 꿈꿨던 불멸은 사마천의 기록에 의해 실현됐다. 단, 그가 비석에 새겼던 ‘위대한 통치자’의 모습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진시황은 공과(功過)에 따라 달리 평가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의 삶을 단언하는 대신,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진시황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의 마음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진시황을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한 명의 인간으로 그렸다. 여기에 특별히 비판이나 조롱은 들어 있지 않다. 두려움은 나약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고, 때로는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두려움 때문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진나라는 망했다. 따라서 〈진시황본기〉는 제국을 건설한 무자비한 통치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두려움에 떨었던 한 명의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
진시황은 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가? 마음이 굳건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려움이란 불확실한 사건 앞에서 발생하는 슬픔이다. 과거의 아픔과 실패 등이 미래에도 반복될까 염려하는 사고방식이 두려움을 발생시킨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없다. 어떤 사건들이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삶에 두려움이란 내재된 필연에 가깝다. 진시황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 시대에서 유독 두려움에 질린 인간이지만, 그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죽는 게 두렵고, 배신이 두려웠던 그의 마음은 지극히 평범하다. 다만 권력자였기 때문에 그 평범한 두려움은 그럴듯한 개혁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타자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누구보다 타자를 더 두렵게 실체화했다.
‘진시황’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진시황들을 목격하고 있다. 트럼프는 장벽을 세워 이민자들을 몰아내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외치며 ‘미국인’만을 위한 세계를 건설하고 있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에서 “종북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다. 어디 이 둘뿐일까.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성향도 그렇다. 특히 SNS에서는 피아식별이 확연하다. 나와 같은 진영이면 “좋아요”, 다른 진영이면 “싫어요”다. ‘너만 없으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너 때문에 세상은 망가졌다’는 두려움은, 반대의 감정처럼 읽히지만 실은 하나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타자 없는 세상’을 꿈꾸는 ‘동일화’의 논리다. ‘강력한 나라’, ‘안전한 나라’를 외치는 정치인들과 보통 사람들에게서 진시황이 품었을 두려움이 읽힌다. 〈진시황본기〉 속 “진시황”이 서 있는 자리와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자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진시황본기〉를 우리를 비출 오래된 거울로 삼을 수 있다. 사마천은 두려움이 어떤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가는지 탐구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이 어떤 세상을 건설하는지, 그 세상의 결말이 무엇인지 기록했다. 진시황이 보여준 것처럼, 타자를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안전을 얻는 게 아니라 세상을 잃는다. 그렇다면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두려움을 넘어설 길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진시황본기〉의 미래를 생각한다.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것을 기록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질문하는 작업이다. 과거의 기록으로서 〈진시황본기〉가 타자를 배제하려고 했던 진시황의 미혹에 관한 기록이라면, 〈진시황본기〉의 미래는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두려움 너머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에 관한 기록 아닐까? 나는 〈진시황본기〉를 읽으며 그 미래를 열어낼 길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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