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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기를 만나다

[청년 사기를 만나다] 〈자객열전(刺客列傳)〉 : “역사”를 향한 자객의 붓

by 북드라망 2025. 12. 12.

〈자객열전(刺客列傳)〉 : “역사”를 향한 자객의 붓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열전(列傳), “역사”를 뒤집는 역사
《사기(史記)》 130편 각각은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우주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물과 사건이 얽혀 있으며, 하나의 편에 등장한 것이 다른 편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덕분에 우리는 역사를 풍성하게 읽을 수 있다. 이때 '풍성하다'는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편에서 소략하게 기술된 것을 다른 편에서 보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기록과 기록이 충돌한다. 그러한 비일관적 서술 앞에서 우리의 관점들은 뒤집힌다. 인물의 모습, 사건의 의미가 매번 다시 재생된다. 선악, 우열, 잘잘못 등을 가리는 습관적 가치 판단은 무너진다. 요컨대, 《사기》는 의미가 생성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다면체이자, 잠재성이 끊임없이 분출하는 장(場)이다. 무한하게 많은 우주들이 공존하고, 그 우주들이 충돌하며 새로운 의미를 낳는 멀티버스(multiverse) 역사“들”.

〈자객열전(刺客列傳)〉은 이러한 《사기》-멀티버스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권력자의 기록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삶을 복원함으로써 기존 역사의 단일한 시선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500년이 자객의 서사로 재생된다. 〈자객열전〉은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 제환공(齊桓公)을 위협한 조말(曹沫)로 시작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荊軻)로 마무리된다. 중요한 인물과 사건에는 항상 자객이 있었다. 즉, 이 시대를 좌우한 핵심적 요소로 자객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의 의의는 단순히 ‘자객이 주인공인 역사’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관점을 해체하는 또 다른 역사적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기존 역사의 주인공들은, 본기(本紀)와 세가(世家)에 기록된 것처럼 권력자들이다. 권력자들은 ‘보는 자’들이다. 그들의 대의와 비전, 원한과 희망에 따라 움직인 세상을 기록한 게 그동안 우리가 읽었던 ‘역사(History)’다. 우리는 ‘보는 자’의 자리에서 서술된 역사를 읽어왔다. 그런데 〈자객열전〉의 주인공들은 ‘보이는 자’들이다. 기존의 역사에서 그들은 권력자들의 시선이 미치는 순간에만 등장한다. 조연도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들을 주인공으로 기록했다. 자객의 영향력을 서술하기에 앞서 그들이 자객이 된 배경부터 묻는다. 역사의 주연과 단역이 교차하며 서술의 중심축이 흔들린다. 그 순간, 시대를 움직이는 중심도 권력자의 뜻[志]에서 ‘지기(知己)’라는 사건으로 이동한다. 사마천은 이름 없는 자들을 불러오고, 보이지 않던 존재를 역사 속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2.자객(刺客)의 기원, 지기(知己)
자객들은 처음부터 자객으로 존재한 게 아니었다. 이들은 지기(知己)라는 사건으로 인해 자객이 된다. ‘지기’를 직역하면 ‘나를 알아보다’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알아봄[知]’은 외형이나 취향 정도가 아니다.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깊이를 가진다. 따라서 ‘지기’라 하면 대체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는 친구[莫逆之友]’ 같은 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개념을 전혀 다르게 전유한다. 그는 ‘지기’를 동사적으로 푼다. ‘지기’는 관계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누가’ 나를 알아봤는가가 아니다. 알아본 대상과의 우정이나 의리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알아봤다’는 사건 자체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던 ‘나’를 알아본 순간, ‘나’의 삶은 흔들린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조말의 이야기는 자객의 원형을 보여준다. 조말은 노(魯)나라의 장수로 제(齊)나라와의 전투에 세 번이나 나섰으나, 모두 패배했다. 당시 노나라의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그럼에도 조말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장수로 기용했다. 이후 노장공은 화친을 맺는 대가로 제나라에 영토 일부분을 바치기로 했다. 노장공과 제환공이 만나 단상에서 맹약을 맺으려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조말이 숨겨두었던 비수로 환공을 위협했다. 환공은 전쟁에서 뺏은 땅을 모두 돌려주기로 했고, 노나라는 땅을 바치지 않고도 제나라와 화친을 맺을 수 있었다. 사마천은 조말의 이야기를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자객의 기원에 ‘지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전제(專諸)의 이야기는 ‘지기’가 수직적 위계 관계와 무관하다는 걸 보여준다. 조말의 이야기만으로는 ‘지기’와 군주에 대한 충성 사이의 구별이 쉽지 않다. 겉보기에 조말의 행동은 자칫 충직한 신하의 헌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제의 이야기는 ‘지기’가 종래의 사회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제는 오(吳)나라의 역사(力士)다. 아마도 높은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伍子胥)는 보통 사람들 속에 묻혀 있던 전제의 남다름을 알아봤다. 그는 남몰래 왕위를 찬탈한 준비를 하고 있던 공자 광(光)에게 전제를 추천한다. 공자 광은 이를 받아들여 전제를 대접한다. 그냥 식객으로 대접한 게 아니라 “선객으로 대접했다(善客待之).”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전제는 왕을 암살하겠다고 말한다. “공자 광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저의 몸이 그대의 몸입니다(公子光頓首曰 光之身 子之身也).” 이후 전제는 목숨을 던져 암살에 성공하고, 공자 광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춘추오패 중 한 사람인 합려(闔閭)다. 그는 전제의 공을 잊지 않고 그의 아들에게 봉지를 주고 높은 벼슬에 임명한다.

조말과 전제의 이야기는 자객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그들의 비수로 노나라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고, ‘합려’라는 패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르지만, 어쩌면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자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통치자들의 관점이다. 사마천은 묻는다. 자객들은 왜 자객이 돼야만 했는가? 여기서 본기나 세가와 다른 열전만의 독특함이 떠오른다. 자객들에게는 암살 대상에 대한 원한도 없고,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대의도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망으로 자객이 됐다. 이 지점에서 ‘지기’는 문법적 구조를 뒤집는다.

‘지기’에서 나를 알아본 주체는 상대방이고, 나는 그 대상이다. 하지만 ‘지기’를 판단하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주체는 ‘나’다. 자객들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예양), “나는 지금부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힘을 다하리라(政將爲知己者用)”(섭정). 요컨대, ‘지기’에는 두 가지 사태가 겹쳐 있다. 첫 번째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것, 두 번째는 이를 통해 어떠한 삶을 결단하는 것이다. 자객들은 자신을 알아본 이에 대한 보답하는 삶을 살기로 한다. 문제는, 자객들이 결단한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객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는다. 조말은 관중이 말린 덕에 살 수 있었지만, 전제는 암살 직후 주변 측근들에게 죽었다. ‘지기’가 ‘나를 죽이(死己)’는 사태로 치닫는 것은 역설적이지 않은가? 예양(豫讓)과 섭정(聶政)의 이야기는 더 처참하다. 예양은 암살을 위해 “몸에 옻칠을 해 문둥이처럼 꾸미고, 숯을 삼켜 목을 쉬게 만들고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섭정은 협루(俠累)를 죽인 뒤에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냈다.” 자객으로서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진다. 왜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이들을 이해할 수 없기는 자객의 주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해하면서까지 암살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자객들이 안타까웠다. 그 재능과 정성을 다르게 발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예양의 대답은 이렇다. “기왕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를 죽이려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서 군주를 섬기는 짓이 되네(是懷二心以事其君也). 또한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네! 그러나 이를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군주를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럼을 느끼게 만들도록 하려는 것이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자객들은 단지 자신을 알아본 이를 위해서만 자객이 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역사적 지평 속에서 새롭게 의미화하려 했다. 예양은 자신의 삶을 후대가 본받을 만한 하나의 표본으로 남기고자 한다. 맥락상 ‘두 마음’은 지백과 조양자에 대한 것으로 읽히지만, 예양 자신의 살고자 하는 마음과 ‘지기’를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도 읽힌다. 일전에 지백이 죽을 때 예양은 산으로 도망쳐 숨었다. 어쩌면 그도 목숨이 아까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알아본 이를 위해 죽겠다는 결심, 후세에 두 마음을 품을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바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돌봐야 했다. 어쩌면 그의 자해는 비겁한 자신의 마음을 죽이는 일종의 재계(齋戒)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모순된 행위로서의 자해. 사마천은 바로 그 모순의 틈에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한다.

섭정 또한 비슷하다. 그는 위(魏)나라 사람인데,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이곳에서 백정으로 밥벌이를 하며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한(韓)나라의 대부 엄중자(嚴仲子)가 찾아와 몸을 낮춰 교제한다. 이에 감동한 섭정은 나중에 노모가 죽은 다음 엄중자를 찾아가 그의 정적을 암살한다. 이것만 놓고 보면 섭정은 엄중자의 호의에 감동해 움직인 피동적인 인물처럼 읽힌다. 하지만 섭정 역시 펼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그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시장에서 백정 노릇(降志辱身居市井屠)”을 한 것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뒤집어 말하면, 본래 그는 뜻을 펼쳐 이 세상에 자신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노모가 죽었으니 이제 거리낄 것은 없어졌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엄중자를 위해 자객이 되기로 한다. 그것은 예양처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이 세상에 각인하기 위함이었다. 자객이 됨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을 백정 이상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사마천은 자객이란 존재의 의미를 피와 날카로운 비수가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숭고한 노력에서 찾는다. 타인을 위한 행동이 결국 자신의 삶을 재생하고, 죽음으로 걸어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자객들이 죽음으로 ‘지기’에 보답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처지에서 그것 말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해하면서까지 자객이 돼야만 했던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죽음을 무릅쓸 만큼 강렬하다. 욕망이 행동을 강제하고, 그러한 행동이 세상에 거대한 흔적을 남긴다. 자객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쓰기 위해 자해와 죽음을 감수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객열전〉은 ‘열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열전은 본기나 세가와 전혀 다른 질서, 곧 욕망으로 움직이는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사마천에게 역사는 권력자의 연대기가 아니다. 자신을 알아본 타자와의 만남, 그 만남으로 인해 삶이 뒤흔들리는 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응답하는 결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이것이 그가 열전에 기록한 역사다.

 
3.방약무인(旁若無人)한 자들의 존엄
따라서 〈자객열전〉의 주제인 ‘지기’는 우정이나 충성과 결이 다르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결단으로부터 촉발된 사건이다. ‘지기’가 성립하려면 가장 먼저 ‘알아봄[知]’에 반응할 ‘나[己]’가 있어야 한다. 그 ‘나’는 무엇인가? 이대로 살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나’다. 예양은 지백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섭정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백정 노릇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삶은 주어진 것도 아니고, 참고 견뎌야 할 것도 아니었다. 어떤 현실적 이유에서든 간에 결국에는 끝내 되찾고 다시 세워야 할 것이었다. ‘지기’는 그러한 답답함을 터뜨릴 계기다. 〈자객열전〉의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형가는 자객들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갈구하는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형가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 자객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지만, 사마천은 자객이 돼야만 했던 그의 삶을 복원한다.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천하를 떠돌며 유세하고, 현사(賢士)들과 교제했다. 그러다 연(燕)나라에 가서는 백정과 축(築)을 잘 타는 고점리(高漸離)와 친해졌다. 형가는 이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매일을 즐겼다. 이때 이들은 “서로 즐거워하고, 그러다 금세 서로 울기도 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相樂也 已而相泣 旁若無人者).” 안하무인(眼下無人)과도 통하는 방약무인(旁若無人)이라는 사자성어는 사실 자족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장자(莊子)》에서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리(子犁), 자래(子來)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 벗이 되었다(四人 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방약무인’이란 어떤 결여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막역지우(莫逆之友)를 구가하는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자객들의 욕망이 ‘우정’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형가는 벗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벗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고 술에서 깨어나면 다시 세상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대로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으리라. ‘방약무인’한 인간에게도 우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이 있었다. 이 지점에서 ‘지기’는 우정과 구별된다. 우정만으로 자기 삶이 세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 형가는 연나라의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아 진시황을 암살하기로 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이 세상에 거대한 흔적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사마천은 그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기록한다.

태자와 빈객 중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흰 의관(衣冠)을 하고 형가를 배웅했다. 역수(易水) 가에 이르러서 노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길에 오르니,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화답해 노래를 불렀다. 변치조(變徵調)로 노래를 하자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노래했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도다(風蕭蕭兮易水寒) /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壯士一去兮不復還)”

다시 강개한 우조(羽調)로 노래하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은 관을 찌를 정도였다. 이에 형가가 수레를 타고 떠나며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는 길을 연나라의 고위 인사들이 배웅한다. 무사히 진시황의 목전에 도착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고, 친구 고점리가 형가를 위해 연주했다. 이에 화답해 형가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역수’라는 강에서 불렀으므로 역수가(易水哥)라고 한다. ‘변치조’와 ‘우조’는 고대 중국의 음률들이다. 장조와 단조처럼, ‘변치조’와 ‘우조’는 각각 처량한 느낌과 격양된 느낌을 표현한다. 음률의 전환은 형가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준다. ‘변치조’로 불렀을 때는 이제 죽음을 각오해야 할 자신의 처지가 자못 슬펐을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매정한 임무를 군말 없이 맡았지만, 막상 떠나려니 미련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광(田光)과 번오기(樊於期)는 스스로 목을 베어 형가가 암살에 성공하길 기원했다. 형가는 그들과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는 것이다. 그들을 생각하며, 다시 결연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가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염돼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고,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은 관을 찌를 정도”로 치솟기도 했다. 칼과 독서를 좋아하던 일개 유세가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자객이 되었다.


그러나 형가의 칼솜씨는 형편없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에 스치기만 해도 죽는 맹독을 바르고 진시황 눈앞에까지 갔음에도 암살에 실패했다. 진시황의 소매를 붙잡고 칼을 휘둘렀으나 스치지 못했고, 진시황은 당황해 칼을 뽑지 못하고 있었다. 기둥 하나를 놓고 빙빙 돌면서 추격전이 이어졌다. 겨우 진시황이 칼을 뽑아 반격을 가하자 형가는 순식간에 제압됐다. 화가 난 진시황은 형가를 죽이고,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형가와 관계된 모든 이들을 수배했다. 그 명단에는 형가의 친구 고점리도 있었다. 이제 자객 이야기는 형가에서 고점리로 넘어간다. 그는 친구를 따라 진시황을 죽일 자객이 되기로 한다.

고점리는 어쩌다 진시황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됐을까? 형가의 실패 이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남의 머슴이 되어 몸을 숨겼다. “오랫동안 괴롭게 일했는데, 그 집 마루 위에서 손님이 축을 타는 소리를 듣고 주변을 방황하며 떠나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점리는 오랫동안 숨어서 두려움에 살아봐야 끝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물러난 뒤, 자신의 짐짝 속에서 축과 좋은 옷을 꺼내 차림새를 고치고 다시 나타났다.” 고점리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몸을 피하긴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고, 형가처럼 진시황 앞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형가와 마찬가지로, 진시황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형가와 고점리로 인해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암살의 두려움에 시달렸다. 천하를 통일한 황제가, 열전의 이름 없는 자들에게 좌우되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형가와 고점리는 목숨을 던지고서라도 삶을 되찾으려 했다. 형가는 ‘방약무인’의 외로움에서, 고점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객이 되었다. 비록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삶이 이렇게 남겨지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 끝내 어디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 다르게 남을 수 있었다. 〈자객열전〉 곳곳에서 자객들의 그러한 뜻을 알아본 자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관중(管仲)과 조양자(趙襄子)는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에게서 자신의 삶을 방기하지 않는 최소한의 배려를 발견했다. 그러한 열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비록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사회적 질서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경할 만했다. 그리하여 관중은 조말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렸고, 조양자는 자신을 죽이려 한 예형을 예자(豫子)라 높였다. 그리고 자객들의 소식이 퍼지면 이른바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皆爲涕泣).”

하지만 진시황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형가와 고점리의 뜻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어졌다. 더 이상 자객들이 왜 나타나는지, 어떤 이들은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묻는 이들도 사라졌다. 그것은 현실에서 자객들처럼 삶의 존엄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를 건너 사마천은 자객들을 알아봤다. 그는 그들을 역사에 밀려난 자로 두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붓을 세웠다. 이들은 왜 자객이 돼야만 했는가, 자객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 등등. 사마천은 그 물음을 품고 역사에서 잊힌 이들의 이야기를 복원했다. 〈자객열전〉을 서술함으로써 그들을 애도한 것이다. 나아가 이는 다시 그런 이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자객들처럼 존엄을 지키려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그런 이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

 


4.붓을 든 자객
태사공은 말한다.

“형가에 대한 세상의 이야기에 태자 단의 운명을 일컬으며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고 말의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하는데 과장된 말이다. 또 형가가 진시황을 상처 입혔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다. 일찍이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생(董生)은 하무저(夏無且)와 사귀어 이 일을 자세히 아는데 내가 기록한 것과 같이 말해주었다. 조말(曹沫)부터 형가에 이르는 다섯 명은 그 뜻이 혹은 이루어지고 혹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목적은 뚜렷했으며 그 뜻을 위배하지도 않았다.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 되겠는가!”


역사에서 자객들을 조명하는 렌즈는 역사라는 지평을 한없이 넓힌다. 자객들을 역사에 기록한 건 단지 과거의 비극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존엄을 지키려 한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패와 무관하게, 그들의 결단은 통치자들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의 단면을 드러낸다. 사마천은 바로 그것을 역사로 기록했다. 이는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이기도 하다. ‘대의’로 포섭되지 않는 욕망이 시대를 움직이고, 그 욕망이 보여주는 불가해한 생(生)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란 눈에 보이는 권력의 기록만이 아니다. 그 사이사이에 숨 쉬던 욕망과 결단, 사라져버린 목소리 역시 역사이고, 그것들을 되살리는 게 역사가의 책무다.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역사가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에 대한 예민함이다. 무엇에 예민해야 할까? 욕망, 혹은 삶이다.

〈자객열전〉에서 사마천은 의미 없는 죽음으로 사라질 뻔한 자객들의 죽음에서, 삶을 향한 욕망을 포착했다. 그 시선은 세상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던 권력자들의 시선에 균열을 냈다. 이 순간 사마천은 역사가이면서 자객이다. 그는 자신의 존엄을 세우고자 했던 자객들의 뒤를 잇는다. 다만 그는 비수가 아니라 붓을 든다. 그의 붓은 권력자들의 역사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역사를 쓴다. 권력자들이 하나의 질서와 언어로 세계를 재편하려 했다면, 사마천은 열전을 서술함으로써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언어와 무수한 욕망을 복원한다. 〈자객열전〉은 그 대표적인 기록이다. 사마천은 기존 역사에서 지워진 자객들을 되살렸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사마천은 그들을 구원함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건져 올렸다. 권력자들의 시선으로 재단되었던 역사가 무수한 욕망과 불가해한 삶이 합하고, 충돌하고, 뒤섞인 시공으로 새로워진다. 사마천은 붓을 든 자객이다. 역사를 죽여 또 다른 역사를 되살리는 역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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