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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기를 만나다

[청년 사기를 만나다] 비참함 속에서 끌어올린 숭고한 이야기

by 북드라망 2025. 9. 12.

비참함 속에서 끌어올린 숭고한 이야기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고독한 역사가 사마천
역사가가 고독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역사’라는 거대한 지평 속에서 시대를 바라본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금 다른 거리 속에서 사건과 관계 맺는다. 이 거리 덕분에 역사가는 어떤 시대적 분위기에도 완전히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이 거리 때문에 그는 언제나 동시대인들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고독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무제의 명령하에 한나라 군대는 동서남북 이민족들을 정벌하며 세상을 정복했다. 역대 어떤 위대한 황제들도 극복하지 못했던 강력한 흉노 제국도 한나라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연전연승. 그야말로 무패의 행진이었다. 이민족들을 몰아낸 땅은 곧 교역로로 활용됐다. 서쪽을 향한 실크로드가 열린 것이다. 역대 어떤 위대한 군주들도 이러한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학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모두가 한나라의 앞날은 더없이 빛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봉선(封禪)을 비롯해 고대 성왕들의 의례를 거행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사마상여를 비롯한 뛰어난 문인들은 붓을 놀려 ‘찬란한 한나라’를 노래했다. 백성들은 화려하게 세워지는 기념비적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한나라 사람임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시대에서 악취를 맡았다.

사마천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한나라는 곧 망할 것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효무본기(孝武本紀)〉에서 무제는 한나라를 대단하게 한 뛰어난 군주라기보다 불로장생에 현혹돼 방술사들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군주로 기록돼 있다.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에서는 요직에 올라 충신들을 내쫓으며 국정을 농단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음험한 선비들을, 〈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는 국가 권력에 위협되는 유협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한나라 황제들을, 〈혹리열전(酷吏列傳)〉에서는 무리한 군사 원정과 토목 사업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관료들을 비판했다.

사마천이 서술한 것처럼, 무제의 말년 한나라는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군사 원정과 토목 사업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바닥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원망의 소리가 나라에 울려 퍼졌다. 폭풍 같은 성장을 위해 얼마나 무리하고 있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이후 어떤 한나라 황제도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무제가 업적을 위해 밀어붙인 일들이 한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셈이다. 사마천은 한나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한발 앞서 읽었고, 그만큼 고독했을 것이다.

 

한무제 (출처-위키백과)




2.‘역사를 안다’는 것에 관하여
《사기(史記)》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방대함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살았던 당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썼다. 개인이 썼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가 다루는 역사는 방대하다. 여기서 “방대하다”는 것은 양적으로 긴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역동적인지,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획될 수 없는 세계를 최대한 다양하게 포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기》에는 모든 인간 군상과 인간이 살아갈 세계, 그야말로 ‘전부’가 기록돼 있다. 사마천은 어쩌다 이토록 방대한 작업을 계획하게 됐을까?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역사를 서술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 사실들을 주워 모아서 기록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인류의 발생과 종말의 모든 것을 통합하여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의 이치를 규명하려 합니다. 위로는 황제 헌원(軒轅)에서 아래로는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표(表)〉 10편, 〈본기(本紀)〉 12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합계 130편을 써서 인간 세계를 연구하고, 고금의 역사 변화를 통찰하고, 한 인간의 이야기를 엮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이른바 기전체(紀傳體)라는 《사기》의 고유한 구조는 이렇게 발명됐다. 흔히들 기전체를 인물 유형에 대한 분류로 해석한다. 본기(本紀)는 세상을 다스린 황제와 임금들을, 세가(世家)는 본기의 인물들 옆에서 함께 세상을 살아낸 제후들을, 열전(列傳)은 본기와 세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독특한 인물들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전체는 단순히 인물들을 유형에 따라 분류한 무미건조한 형식이 아니다. ‘기전체’는 본기와 세가, 열전만이 아니라 사건을 기록한 표(表), 서(書)까지 포함한다. 분명 이러한 형식들이 처음부터 주어졌던 것은 아닐 테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마천의 질문, 그러니까 우리가 놓인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지, 이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러한 세계에서 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등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것일 테다. 요컨대, 기전체는 사마천이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품은 근본적인 질문들로부터 도출된 결과였다.

세상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 이 세상은 어떻게 해야 안정될 수 있을까? 본기는 이러한 질문을 품고 서술된 역사다. 본기의 포문을 여는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전설적 성군 다섯 명이 등장한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통치가 시작하는 지점이 문명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전에도 성인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세상을 안정시킨 찬란한 문명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흔적도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지는 게 이 세상이다. 오제(五帝)들은 이러한 지평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도하는 자들이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뒤에도 무언가를 다시 쌓아 올리는 이들, 아직 밟지 않은 멸망의 한 걸음이 놓여 있어도 기죽지 않고 나아가는 자들이 〈오제본기〉의 주인공이자 본기 내내 반복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역사가 튀어나온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그런데 혼란스러움은 인간의 악의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선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세가는 바로 이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세가의 시작인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의 주인공 계찰은 이러한 세상을 살아내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형제들에게, 조카들에게 왕위를 선양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행위는 내란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계찰에게서 오제처럼 세상을 안정시키는 역량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 피어날 수 있음을 보았다. 세상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세가는 마음 하나에 의지해 세상을 헤쳐나가는 이들을 주목한다.

열전이 그리는 세상은 본기와 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입신양명을 욕망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우국지정에서 이상을 욕망한다. 이와는 반대로 중심에서 탈주하려는 욕망도 있다. 통치자들의 대의명분이 그 자체로 어떤 폭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로 인해 열전에서는 본기와 세가의 가치가 뒤집힌다. 땅에 떨어진 도(道)를 다시 세우려고 군대를 일으킨 주나라 무왕이야말로 사실은 무도(無道)한 자가 아닌지 의심하는 백이와 숙제로 열전이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백이와 숙제를 비롯해 정답 없는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간 용감한 이들을 열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표(表)와 서(書)는 인간을 중심으로 기록한 역사가 아니다. 표는 얼핏 연표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이상이다. 연표는 하나의 시간에 따라 매끈하게 사건을 정리한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를 관통하는 시간은 하나의 순서로 통합될 수 없다. 표는 하나의 사건이 시대적으로 어떠한 파장을 일으켰는지, 각 인물과 집단 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다. 이는 개별적인 역사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다르다. 사마천은 각자의 고유한 역사를 지닌 수많은 집단들이 서로에게 침투하는 가운데 어떤 공통된 리듬을 자아내는지를 보았다. 부분이 모여 이뤄지는 전체가 아니라 다양한 역사가 공명할 때 시대가 어떻게 채색될 수 있는지를 관찰한 것이다.

서는 제례에 관한 기록이다. 고대 중국에서 제례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발명한 기예다. 사소한 순간까지도 인간사는 천지의 운행과 무관한 적이 없다. 흥망성쇠, 길흉화복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좌우되지 않으며,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지금 천지가 어떻게 운행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 발맞추는 것까지 포함한다. 농사를 짓기 위해 절기를 파악하는 것처럼, 언제 어떤 색의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디서 누구를 향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등등을 신경 써야 한다. 즉, 천지와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 서에 기록돼 있다.

기전체는 이 다섯 가지 형식을 통해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자리는 어디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독특하면서도 필연적인 문체다. 랑케로부터 시작된 근대의 역사는 마치 창조주 신이 이 세상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역사 바깥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인간이 이족보행을 하고, 두 손을 활용해 기술 도구들을 발명한 것을 ‘진보’이자, 신이 인간인 우리에게 부여한 본성인 것처럼 기록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기술이 실상 교묘하게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찬란한 미래를 약속할 것이라 믿었던 과학 문명이 우리를 파멸하고 있음을 우리를 알고 있다. 사마천이 기전체의 다섯 가지 형식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역사는 단일한 흐름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세상에 뛰어드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사마천은 역사를 통해 무수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분기하는 역동적인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다. 거기에 명료한 해답은 없으나, 적어도 역사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오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에 그의 역사 서술은 어떠한 역사보다도 생동감 넘친다.

 

사기 초판본

 


3.‘자신’을 향한 무한한 여정
사마천이 한나라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는 ‘역사’라는 지평으로부터 모든 것을 사유했기 때문에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즉, 역사를 통해 그는 독특한 현실 감각을 체득했다. 세상은, 삶은, 사회의 도덕과 인간의 의도로 굴러가지 않는다. 한편에는 땅에 떨어진 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공자의 대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초나라를 무너트리기 위해 십 년을 견딘 오자서의 살기 어린 원한도 있다. 도덕적으로 둘 중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있겠지만, 삶을 이어가는 동력으로서는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남길 수 없다. 애초에 우리는 무엇이 인간을 살게 하는지,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인간의 탁월함은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삶은 도덕보다 충동을 따르고, 세상은 완벽하기보다 모순적이다. 길흉화복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선악과 시비가 서로 섞이는 아이러니한 세계. 아무리 성대한 국가도 한순간에 쇠락하고, 별볼일 없는 곳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세상을 호령하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 이러한 변화무쌍함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종종 이해할 수 없으나, 바로 그것들이 삶과 세상을 보다 다채롭고 역동적이게 만든다. 이러한 이해는 딱히 교훈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이를 알았기 때문에 사마천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시대를 우상화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 모두를 낳은 것은 ‘비참함’이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런 화를 당하여 고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게 했습니다. 무슨 낯으로 다시 부모님의 산소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 대가 흐른다 해도 씻기지 않을 치욕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끊어지는 듯하고 집에 있으면 멍하니 정신을 잃은 듯하며,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말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사불우부(悲士不遇賦)〉를 참고하면, 궁형의 트라우마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 회복될 수 없었다. 당시 고대 중국인들에게 신체의 손실은 근대인인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사마천은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사형이 신체적 의미의 죽음이라면, 궁형은 사회적 의미의 죽음이었다. 사형수는 궁형을 선택함으로써 목숨을 연명할 수 있으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포기했다’는 오명을 감수해야만 한다. 사마천이 그랬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해 궁형을 택했으나, 살아있는 내내 불결한 존재로 취급됐다. 이는 한 인간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치욕이 아니었다.

사마천의 심정을 상상해본다. 그는 역사를 쓰면서도 밤낮으로 번뇌했을 것이다. 종종 억울해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때로는 단장(斷腸)의 고통이 밀려왔을 테고, 때로는 정신 놓고 멍하니 방황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이 처지를 하소연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다시 정신을 차리면 치욕의 순간이 떠올라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실 정도로 긴장했을 것이다. 〈비사불우부〉의 절망 섞인 한탄은 사마천의 마음을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오히려 더욱 사무친 사마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제목부터 슬픔이 흘러넘친다. 풀이하자면, 때를 만나지 못한(不遇) 선비(士)의 슬픔(悲)에 관한 노래(賦)다.

 

“비록 몸 있으나 세상에 드러낼 수 없고(雖有形而不彰) / 헛된 능력 있으되 세상에 펼치지 못한다(徒有能而不陳) / 어째서 곤궁함과 현달함은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고(何窮達之易惑) / 선함과 악함은 나누기 어려운가(信美惡之難分).” - 〈비사불우부(悲士不遇賦)〉


 첫 두 구절, 몸과 능력이 있어도 이 세상에 펼칠 수 없다는 구절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다. 왜 이렇게 됐을까? 사마천은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자신이 무지했기 때문일까? 충분히 능력을 갈고닦지 않아서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더 열심히 수양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곤궁함만큼이나 현달함 또한 사람을 미혹에 빠뜨린다. 모르기 때문에 빠지는 미혹이 있다면, 알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미혹 또한 있다. 사마천이 그랬다. 충심으로 군주에게 간했으나, 돌아온 것은 사형이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별할 수 있다 자신했으나, 이 자신감은 도리어 사마천을 곤경에 내몰고 말았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 인간의 앎은 언제나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선함과 악함을 나누지만, 자신이 미혹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버린 인간에게 그것들은 쉽게 나뉘지 않는다. 살아있는 내내 역사를 썼으나, 그가 다다른 진실은 통달할 수 없는 세상사였다. 고귀하게 만들었던 것이 구렁텅이에 빠트리기도 하고, 구렁텅이에 빠트렸던 것이 도리어 숭고한 삶으로 이끌기도 한다. 사마천은 역사를 쓰기 위해 치욕을 감수했으나, 그 치욕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보관했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큰 마을과 도시로 퍼져나간다면 전에 당했던 굴욕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만 번이나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명을 덮어쓰고 세상에 사는 것은 쉽지 않고 지위가 낮은 곳에 있으면 비방의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공자는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春秋)》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마천은 그러한 공자를 따라 역사에서 인물들을 알아보고, 그러한 자신을 후대가 알아보기를 바랐다. 누구를 알아보고자 했을까? 백이와 숙제처럼 덕이 있으나 자취 없이 사라진 현인들이었다. 한비자와 굴원처럼 자신의 곤란함을 글로 승화한 문인들이었다. 오자서처럼 고통을 참아내고 공명을 이룬 대장부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역사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치욕을 당하고도 살았던 사람들이 즐비했다. 치욕을 갚은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치욕을 안고도 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다. 사마천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누구보다 지기(知己)를 바랐던 공자가 그 서러움을 재료 삼아 지인(知人)을 실천했던 것처럼, 사마천은 자신이 당한 치욕을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동력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분(憤)으로만 얼룩져 있지 않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대해서는 절절하게 이입했으나, 그가 기록한 역사는 궁형을 감내해야만 했던 분함 이상으로 다채롭다. 유머러스한 대목도 있고, 아름다운 대목도 있다. 사마천처럼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해 분노하고 회의하는 사람도 기록돼 있지만, 그러한 인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도 기록돼 있다. 사마천은 무수히 많은 삶을 지나치면서 자신의 치욕조차 입체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를 쓰는 출발 지점에 있었던 치욕이 역사를 여행하면서 색채가 조금 달라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역사를 읽고 쓴다 해서 치욕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지만, 치욕이 마냥 치욕으로만 남지 않을 수는 있다. 그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가 분함을 안고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쓰는 동안 그 분함은 그를 부자유하게 하는 족쇄가 아니라 수많은 삶을 여행하도록 하는 동력이 됐을 것이다.
  

4.뜻을 놓지 않은 이들을 위한 이야기
종종 우리는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 ‘삶이 끝난 것 같다’, ‘문제투성이인 이 세계를 바꾸기에 나는 너무 무력하다’는 식의 비관에 빠진다. 전쟁과 기후재앙, 팬데믹 등 반복되는 재난은 끝이 보이지 않고, 뿌리를 알 수 없는 혐오는 환대와 연대를 주저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지만, 이미 무언가를 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우리에게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관은 더 큰 희망을 가지는 것으로 극복될 수 없다. 비관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조급한 희망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희망을 품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들, 더 자세히 말하면, 아무리 곤란하고 치욕스러운 상황에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얘기들이.

삶이 엉망으로 되어갈 때 애나 칭은 산책을 한다고 했는데, 역사를 읽는 것도 일종의 산책일 수 있지 않을까. 《사기》에는 막다른 길에서도 삶을 이어나가는 인간의 노력이, 희망과 절망도 갖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기록돼 있다. 사마천은 역경을 겪음으로써 모두가 위대해질 것이라 예언하지도 않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응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삶이 과연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다.

사마천은 후대의 지혜로운 자들을 기다린다. 자신이 치욕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났던 것처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다르게 조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리라고 믿는다. 당장은 동시대인들로부터 외면받아도 끝내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삶이 곤란해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 또한 이 세상에서 고유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믿음.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절실하리라는 믿음. 이 믿음 속에서 사마천은 불확실한 이 세계와 그러한 세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인간들의 분투를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었다. 이 믿음은 단지 후대를 위한 것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마천이 역사 속에서 발견한 인간의 역량이었고, 무엇보다 사마천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길이었다. 사마천에게 역사는 갖은 풍파에도 뜻을 버리지 않은 인물들을 기리는 의례이자 치욕에서 자신의 삶을 건져 올린 구원이었다. 역사를 쓰는 동안 사마천은 자신의 비참함을 되새겼을 것이나, 다양한 거리 속에서 인간사를 조망하는 그의 작업은 그의 삶을 더없이 숭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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