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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기를 만나다

[청년 사기를 만나다]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by 북드라망 2025. 8. 29.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역사를 반복하는 어리석음
“역사는 반복된다.” 누구나 아는 흔한 격언이다. 이어 다음과 같은 말이 붙는다. ‘그러므로 역사를 배움으로써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내가 역사에서 마주한 반복은 ‘잘못을 해도 바뀌지 않는 인간의 무지’였다. 대체로 우리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을 겪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코로나19를 비롯해 온갖 사건으로 나타난 기후위기를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전지구적 네트워크망을 이용한 소비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다. 수많은 물건이 손가락 터치 하나로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연휴에는 나들이하듯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한다. 양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었건만, 포탄과 미사일이 다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이뿐일까. 얼마 전에는 비상계엄도 선포됐다. 비상계엄이라니.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물 같은 그 단어를 이 시대에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이 무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매 순간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든 넘기기만 하면 된다는 듯 살고 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을 겪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끔찍한 일을 반복하고야 마는 게 내가 역사에서 배운 인간세(人間世)의 진면목이다. 공자, 붓다, 소크라테스, 예수, 스피노자, 톨스토이 등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들도 이 인간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반복되는 것은 역사라기보다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이 어리석음은 극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일은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역사를 배우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마천의 ‘세가(世家)’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이 세계를 여과 없이 담아냈다. ‘본기(本紀)’나 ‘열전(列傳)’에 비해 ‘세가’에서 유독 많이 반복되는 동사가 ‘시해했다(弑)’와 ‘멸망했다(滅)’ 두 글자다. ‘시해’란 신하가 군주를 살해했을 때 쓰는 글자다. 그러나 군주답지 못한 군주를 살해했을 때는 ‘시해’라 하지 않고 ‘죽였다(殺)’고 쓴다. ‘시해했다’는 말이 많이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신하가 올바르지 못하게 군주를 죽이는 사건이 많았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멸망’이란 글자가 많이 쓰인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반영한다.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개념은 고대 중국에서 그리 당연한 게 아니었다. 상대국의 수도를 점령할 정도로 전쟁에서 이겼다 해도 그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는 게 예(禮)였다. 고대 중국의 제후들은 타고 올라가면 같은 조상을 공유하거나, 혹은 함께 나라를 다스렸던 동지(同志)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는 언제든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존의 기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멸망’이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사정 볼 것 없어졌다는 뜻이다. 최소한의 역지사지(易地思之)조차 발휘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시해했다(弑)’와 ‘멸망했다(滅)’ 두 글자를 통해 사마천이 ‘세가’에 어떤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가’에서는 좌절이나 냉소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믿음이 투영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세가’에서 나타나는 엉망진창인 세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본기’와 달리, ‘세가’에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다스릴 성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위대한 인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본기’의 제왕들처럼 세상을 안정시킨 이들이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세가’에 기록된 위대한 성현 공자(孔子)조차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음에도 이 세상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요컨대, ‘엉망진창’은 ‘세가’에 기록된 세계의 기본 조건이다. 그런데 세계가 나아질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할까? ‘엉망진창’인 세계를 그릴 뿐인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마천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세가’를 서술했을까?


2.세가(世家), 분열하는 세계에 대한 기록
세가는 가장 중원에서 먼 오(吳)나라에 대한 기록인 〈오태백세가〉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본기와 세가의 관계를 염두에 둔 사마천의 의도가 담겨 있다. 한편으로 세가는 본기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나, 본기를 가능케 하는 주변의 역사다. 세가는 본기에 영향을 끼치는 동시대의 기록, 그러나 본기에 밀려 기억되지 못한, 그럼에도 기억되어야 할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오태백세가〉는 오나라의 시조인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나라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다.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인들에게 이곳은 형만(荊蠻)이라 불리며 미개한 야만인들의 땅으로 인식됐다. 오나라를 세운 태백과 중옹은 사실 이 지역 출신이 아니다. 이들은 당시 주(周)나라를 다스리던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첫째와 둘째 아들, 즉 지위와 권세를 누리던 왕자들이었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재능 있고 어진 성품을 가진 셋째 아들 계력(季歷)과 그의 아들 희창(姬昌, 문왕의 이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태백과 중옹은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스스로 저 멀리 변방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자름으로써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형만 지역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태백과 중옹의 인품을 추앙하며 그들을 왕으로 세웠다. 그렇게 탄생한 나라가 오나라다. 태백과 중옹의 선양 덕분에 계력과 희창은 주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었고, 이후 무왕(武王)은 무도한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도탄에 빠진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 주나라의 역사가 본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데는 태백과 중옹이 왕위를 양보한 전사(前史)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를 참고하면, 제19대 왕인 수몽(壽夢)에 이르기 전까지, 그러니까 기원전 841년부터 586년까지 오나라의 기록이 없다. 이는 오나라가 황하 유역의 국가들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다. 그만큼 오나라는 중국에 낯선 타자였다. 사마천은 이러한 오나라를 중국 역사에 넣었다. ‘주나라’라는 가장 찬란한 문명을 가장 미개하다고 무시했던 변방과 연결했다. 주나라가 본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전사를 〈주본기(周本紀)〉가 아니라 저 멀리 변방의 〈오태백세가〉에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오태백세가〉는 주나라의 역사 기술을 위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오태백세가〉에는 세가라는 고유한 세계를 서술하기 위한 질문이 담겨 있다.

〈오태백세가〉는 오(吳)나라를 중심으로 원한과 증오가 반복되는 세계의 기록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자서(伍子胥)다. 그는 대대로 초(楚)나라 왕을 섬겨온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누명을 쓰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때, 그는 홀로 복수를 다짐하며 초나라를 탈출하여 경쟁국인 오나라로 망명했다. 오자서 덕에 강력해진 오나라 군대는 초나라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고, 오자서는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내몬 왕의 무덤을 파 그 시체를 채찍질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오자서의 운명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마치 오나라 사람이 된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오나라를 섬겼으나 끝내 오나라 왕의 눈 밖에 나 자결을 명 받은 그는 언젠가 초나라 왕에게 복수를 다짐했듯이 오나라 왕을 저주했다.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오나라 왕의 관을 짜도록 하라.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성 동쪽 문에 걸어 월(越)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이면서 오나라로 도망갔고 끝내 초를 공격해 초왕의 무덤을 파 채찍질했으며, 오나라 사람이 되어서는 오나라 왕을 저주하고 오의 멸망을 예언했다. 기필코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사무친 원한. 하지만 이러한 원한은 비단 오자서라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한은 세가라는 지평에서 활동하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보편적 마음이기도 했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왕위를 지키고 차지하기 위해 의심하고, 죽이고, 시해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오태백세가〉 여기저기에 그러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오왕 여제(余祭) 7년(기원전541년), 초나라의 공자 위(圍)가 초나라 왕 협오(夾敖)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왕(靈王)이다.” “오왕 여매(餘眛) 2년(기원전529년),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그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오왕 합려(闔閭)는 기존의 왕을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고,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는 형이 수도에 없는 틈을 타 왕위에 오르려 했다.

원한과 복수의 바람이 중국 전역에 휘몰아쳤다. 합려는 평생 초나라와 싸웠고, 그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를 죽인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했다. 월나라 또한 오나라에 적지 않게 시달려온 터라 증오가 남달랐다. 한 번은 오나라와의 접전을 앞두고 사기를 증진하기 위해 병사들을 세 줄로 나란히 정렬한 다음 스스로 목을 베게 했다. 상대방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또 미워해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일반 백성들도 이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초나라와 오나라의 국경 지대에 인접한 마을에서는 뽕잎을 따는 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고, 이 다툼은 점점 규모가 커져 국가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 국경과 문화 가릴 것 없이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원한, 증오로 전염되는 게 〈오태백세가〉가 그리는 세계다.

 



이 복잡한 얽힘은 세가만의 독특함이다. 본기 12편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세상을 다스린 중심인물이나 집단을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한 역사라면, 세가 30편은 공시적(共時的)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병립하는 역사다. 앞선 시대의 흔적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지 고민하는 본기의 제왕들과 달리, 세가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얽힌다. 완전히 같은 시간대를 다루는 것은 아니나, 비슷한 시기에서 일어난 사건과 주요 인물들이 자주 겹친다. 한 인물, 하나의 사건이 여러 세가에서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부딪히는 덕분에 세가 30편은 본기와 다른 고유한 자장을 갖는다. 다케다 다이준은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본기’의 어마어마한 통일과정과는 또 다른 복잡한 현상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세계의 중심이 하나가 아니고 또한 정지하고 있지 않은 이상, 이 세계의 병립상태는 불가피해진다. 단일하게 하나로 복귀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확산되면 중심에 다수가 병립하기 때문에, 각각의 중심의 내용도 결정적일 수가 없고, 유형까지도 왜곡되기 쉽다. 그래서 ‘세가’는 ‘세가’끼리 짜 넣고, 서로 뒤섞이며, 다른 ‘세가’의 내부를 드나들면서 그칠 바를 모르고 상하증감한다. - 다케다 다이준, 《사마천과 함께하는 역사 여행》, 110쪽
 
통일이 있다면, 분열도 있는 법. 둘은 애초에 다른 운동이 아니다. 단일한 운동이 통일과 분열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를 본기와 세가라는 상이한 형식으로 포착했다. 본기를 통해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는 운동을, 세가를 통해 무수한 것으로 분열하는 운동을 기록했다. 세가가 분열하기 때문에 본기의 통일은 더욱 화려할 수 있었고, 본기의 통일적 힘으로 인해 세가의 분열은 그처럼 처절할 수 있었다. 이 역설과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세상이 이러한 힘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일 테다.

문제는 이처럼 분열하는 세계를 살아내는 인간들의 마음이다. 오자서는 온몸으로 시대의 분열을 살아냈지만, 끊임없이 복수하고 저주하는 동안 마음은 넝마가 됐을 것이다. 이와는 다른 삶의 길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오태백세가〉가 세가의 포문을 여는 이유를 나는 이 지점에서 읽어내려 한다. 분열과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누군가는 오자서처럼 살아가겠지만, 그게 꼭 유일한 길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자신의 올곧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마천은 계찰(季札)이란 인물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3.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결심
계찰은 〈오태백세가〉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저주와 복수심이 증폭되고 유혈이 낭자한 시대 한가운데서 계찰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지 않는 고귀하고도 드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아름답거나 매력적이지 않다. 얼핏 무력하거나 우유부단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복수와 증오에 사로잡혀 마음이 넝마가 되지는 않았다.

계찰은 오나라의 전성기를 열은 수몽의 넷째 아들이다.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고, 형제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인품이 돈후한 것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비록 머나먼 변방 오나라 태생이었지만, 중원의 어떤 군자보다도 더 군자다웠다. 한 번은 그가 사신이 돼 중국 전역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예악(禮樂)에 박식했던 그는 연주되는 노래가 어느 나라의 노래인지를 알아맞혔고, 노래를 통해 그 나라의 정치 수준과 운명을 읽어냈다. 그리고 제(齊)나라, 정(鄭)나라, 위(衛)나라, 진(晉)나라 등을 돌아다니며 안영(晏嬰), 자산(子産), 손문자(孫文子), 숙향(叔向) 등 쟁쟁한 인사들을 만나 조언해줬다. 그들은 계찰의 조언을 받아들여 분란을 피하거나 행실을 고쳤는데, 그만큼 중원에서도 계찰은 인품과 학식이 높은 군자로 알려졌던 듯하다.

옛날 고공단보가 막내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것처럼, 수몽도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태백과 중옹의 후손들답게 세 명의 아들들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막내 계찰이 왕위를 이어받도록 마음을 모아 설득했다. 계찰은 태백과 중옹의 후손답게 집을 떠나 밭에서 농사지으며 왕위를 받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계찰의 시대는 더 이상 태백과 중옹이 살았던 시대가 아니었다. 태백과 중옹의 선양은 빛나는 주나라의 태평성대로 이어졌지만, 계찰과 형제들의 선양은 오나라의 혼란과 멸망에 일조했다.

계찰과 나머지 가족들의 대립은 수몽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고, 결국 장자인 제번(諸樊)이 왕위를 이어받게 됐다. 그러나 제번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왕위 계승의 원칙을 장자 상속에서 형제 상속으로 바꿨다. 하지만 계찰은 셋째 형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왕위를 거절했고, 오나라 사람들은 셋째의 아들인 공자 요(僚)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제번의 아들 합려는 형제 상속이 되지 않는다면 장자 상속을 따라야 하며, 따라서 다음 왕위는 수몽의 장자의 계보를 잇는 자신이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몰래 반란을 준비하던 중 오나라에 망명한 오자서를 얻어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합려의 정당성보다 반란에 대한 계찰의 반응이다.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계찰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그가 오나라에 돌아온 것은 반란이 수습된 이후였다. 따지자면 계찰보다 더 적법한 계승자는 없었다. 수몽부터 계찰의 형제들, 오나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찰이 왕이 되기를 바랐다. 명분도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도 얻었다. 계찰이 마음만 먹으면 세력을 형성해 합려를 몰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찰은 그러지 않았다. 백이와 숙제가 그러했듯이, 왕실의 어른으로서 어떻게 사촌을 죽일 수 있냐며 혼내지도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혈족 간의 정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선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며 백성들이 군주를 잃지 않고 사직을 받든다면 그가 바로 나의 군주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산 사람을 섬겨 천명(天命)에 따를 뿐이다. 내가 일으킨 난이 아니면 추대된 군주를 따르는 것이 선조들의 법도다.”


〈오태백세가〉를 읽을 때마다 답답해지는 대목이다. 계력과 문왕이 주나라를 성대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배경에 태백과 중옹의 선양이 있었던 것처럼, 합려가 반란을 일으킨 배경에도 계찰의 끈질긴 왕위 거절이 있었다. 그러니 계찰에게도 얼마간은 반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찰이 한 일이라고는 죽은 왕의 무덤에 가서 한 번 통곡하고 사신으로 떠났던 임무를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새 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그저 왕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일개 소심한 지식인이었을 뿐일까? 그러나 계찰의 말 한마디가 유독 걸린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오나라가 전란에 휩싸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일개 인간의 삶으로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인간의 행위는 의도와 무관하게 굴절된다. 계찰과 형제들의 좋은 뜻도 오나라 내전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게 우리가 사는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무엇이 더 결정적인 요인인지, 어떤 요인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켰는지 사건의 전체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왜 누군가는 불행해지는데 누군가는 불행을 피할 수 있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의 운명을, 또 다른 누군가는 상대방을 탓한다. 그러나 계찰은 합려도, 합려를 도와 반란에 참여한 이들 누구도 질책하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왜 그래야만 했을까?

계찰괘검(季札掛劍)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직역하면, ‘계찰이 칼을 매달아 놓았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계찰이 사신으로 전국을 종횡무진할 때 서(徐)나라에 들른 적이 있다. 그는 군주의 권위를 대행하는 보기 드문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서나라 군주는 계찰의 검이 마음에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계찰은 서나라 군주의 마음을 읽었으나 사신의 임무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차마 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에 들렀을 때는 이미 서나라 군주가 죽은 후였다. 계찰은 보검을 풀어 서나라 군주의 무덤가 나무에 묶어두고 떠났다. 누군가 물었다. “서나라 군주는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계찰이 대답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처음 내가 그에게 이미 주려고 했는데, 그가 죽었다고 어찌 내 마음을 배반하겠는가(豈以死倍吾心哉)?” 요컨대, 상황이 변했다 해서 마음이 변할 수는 없다는 것. 이로부터 ‘계찰괘검’은 보통 ‘신의를 중요시한다’ 혹은 ‘자신의 뜻을 굳건히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좀 더 상징적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칼은 살인 도구이자 권력의 상징이다. 합려가 왕을 시해할 때 쓴 도구도, 계찰이 사신임을 증명하는 상징도 칼이다. 칼을 쥐고 있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칼을 쥐려 했다. 복수를 위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더 날카롭고 강력한 칼을. 그러나 칼을 쥘수록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위태로워진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던 오자서마저 그 칼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피할 수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계찰은 칼을 내려놓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신의 임무가 끝나자 서나라 군주에게 칼을 선물했다. 칼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계찰은 천하를 떠돌면서 ‘칼’의 위력을 실감했으리라. 전쟁을 반복하며 나라를 넓히는 강대국들을 보았을 것이고, 군주를 시해해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려는 야욕도 보았을 것이다. ‘칼’만 있다면 세상을 호령하는 패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칼’을 쥐고 있는 한 두려움과 불안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패자가 되리라는 야망의 원동력은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한다는 두려움, 나보다 더 강한 누군가에 대한 시기와 질투이기 때문이다. 계찰은 칼을 내려놓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칼 대신 마음을 지켰다.

“어찌 내 마음을 배반하겠는가?” 이 한 마디가 계찰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을 의미하는 듯하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마음은 쉽게 동요한다. 계찰의 시대는 ‘살아남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등등 어쩔 수 없다는 명분에 따라 온갖 행위가 정당화되는 시대였다. 오자서 같은 복수귀가 끊임없이 탄생하고, 그런 사람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란을 부추기는 시대. 살아서는 원수의 시체를 모욕하고, 죽어서는 원귀가 되어 저주하는 시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수와 증오에 온 삶을 태웠으나 계찰은 그렇게 마음을 방치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더 지옥같이 만드는 것은 복수와 증오에 사로잡힌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도덕관념이 무너지고, 가해와 피해가 인과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얽힌 시대에서 마음을 지키는 일은 복수하고 증오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악마 같은 상대방에 대한 복수를 단념하고, 삶의 주요한 원동력이었던 증오를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상대방과 나 자신에 대한 관계를 다르게 맺는 일인 것이다. 관계를 변형하고, 다수의 욕망을 의심하고, 내 삶의 방향을 다르게 정하기.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계찰에게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날 길이 없다. 오나라로 돌아오면서 이미 내전의 소식을 들었을 테고, 그때부터 그의 마음도 심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마저 합려를 응징하고자 했다면, 오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복수와 증오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오자서처럼 자신 또한 자신의 삶을, 오나라를,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계찰은 세상을 더 지옥 같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계찰은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것이 〈오태백세가〉에 계찰이라는 이질적인 인물을 넣은 이유라 생각한다. 〈오태백세가〉를 비롯해 ‘세가’ 여기저기에서 피비린내가 나는데, 계찰이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다. 계찰 혼자 다른 세계를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권력에 가까웠던 계찰이다. 가장 원한에 물들기 쉬웠다는 얘기다. 누구보다 시대적 흐름에 휩쓸리기 쉬운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보다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 계찰이다. 왕위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고, 군주를 시해한 합려와 그 무리에 대한 원망도 내려놓고, 어쩌면 무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를 내려놨을지도 모르겠다. ‘계찰괘검’은 칼을 내려놓고 자기 마음을 지킨 계찰의 결단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오마이뉴스



4.엉망진창인 세계에서 역사를 공부하기
역사가의 임무는 바로 계찰과 같은 삶을 발굴하는 것이리라. 오자서처럼 복수에 진력하는 삶이 있다면, 계찰처럼 자신의 마음에 엄습하는 복수와 증오를 물리치며 다르게 살아갈 여백을 발견해내는 삶도 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자서 같은 길을 택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을 강구하고, 그러다 자멸하고, 더 많은 비극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나 계찰처럼 다른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오태백세가〉의 등장인물 중에서 계찰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조언했고, 비극을 피하도록 도왔다. 물론 그의 노력은 시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최소한 그는 자신을 지켰다.

사마천이 세가의 세계를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계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아무리 엉망진창이라도 인간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 계찰이 ‘칼’에 대해 질문했던 것처럼 자신이 놓인 지평을 이리저리 질문할 수도 있다. 질문하는 과정만으로도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고, 그리하여 사건을 다르게 겪을 여백을 발견할 수 있다.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삶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혼란스러운 세상 가운데서도 고귀한 삶이 피어날 수 있음을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엉망진창인 세계로 ‘세가’를 그렸고, 유혈이 낭자하는 〈오태백세가〉를 가장 처음에 두었으며, 계찰이란 인물을 그 속에 기록했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동안 《사기(史記)》를 읽을 때 세가를 다른 서술에 비해 가볍게 읽었다. 본기에 비해 정통적이지도 않고, 열전에 비해 파격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가야말로 우리가 종종 세상에 대해 느끼는 막막함을 가장 잘 포착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통해 우리는 종종 이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 무엇인지, 우리가 겪는 사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지만, 세가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잘 살아내기 위한 탁월함이 무엇인지 찾기를 원하지만, 세가는 단지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저 끊임없이 분열하는 세계와 언제나 그 분열을 감당하려는 인간의 끈질긴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인과가 복잡하게 뒤엉켜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노력과 의도는 참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런 끈질긴 시도야말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道)이 아닐까.

맹자는 말했다. “군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까닭은 마음을 보존하기 때문(孟子曰君子所以異於人者 以其存心也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 下)〉 28장)”이라고. 그러니까 군자를 군자답게 만드는 것은 지위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고, 명석한 두뇌도 아니다. 군자 역시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그러나 군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보존한다. 즉 마음의 떳떳함과 선함에 바탕을 두고 사건을 마주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역량을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자에게 삶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조되는 것이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우리는 영웅을 찾는다. 그럴수록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우리의 걸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자리를 응시하면서 한 땀 한 땀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직조하는 자에게 고달픔은 있을지언정 원망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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