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세가(孔子世家)〉, 무너진 시대에서 펼쳐낸 인간의 길[道]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사마천을 통해 다시 본 공자
《논어(論語)》는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공자의 가르침 모음집이다. 여기에다 그 가르침을 소화하고자 했던 제자들의 좌충우돌이 함께 담겨 있다. 따라서 《논어》를 읽는 재미는 공자의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논어》를 읽으면 읽을수록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나누는 공부하는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가르침의 내용도 그렇지만,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케미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들의 배움은 미리 정해진 것을 답습하는 활동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함께하는 이들과 나누는 과정이 곧 그들의 배움의 내용이자 배움이 펼쳐지는 장(場)이었다. 그러나 공부하는 삶과 별개로, 공자에게는 땅에 떨어진 도(道)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평생의 염원이 있지 않았던가. 공자는 끝내 그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 철인이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또 자공을 보고 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 그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노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이었다. - 〈공자세가(孔子世家)〉
이 장면은 죽기 직전 공자가 자공에게 남긴 말로, 《논어》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확실히 공자의 말년은 상실의 연속이었다. 53세의 나이로 천하를 14년 동안이나 돌아다녔지만 어떤 통치자도 공자의 뜻을 알아보지 못했다.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끼던 제자 안회와 자로, 아들 리(鯉)가 연달아 죽었다. 공자의 상실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논어》를 읽은 사람에게는 이 대목이 좀 당황스럽다. 공자는 스스로 “일흔 살에 마음 가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말하지 않았던가. 즉, 욕망과 천지자연의 이치가 완전하게 일치한 경지에 도달한 그다. 그랬던 공자가 자신의 운명을 이토록 안타까워하다니. 그렇다면 사마천이 이처럼 공자의 한탄을 묘사한 데에는 자신의 문제의식이 투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사마천은 치욕을 견디고서라도 역사를 기록해야만 했다. 그러나 견디기 위해서는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자신처럼 치욕을 당했으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을 물색한다. 주(周)나라 문왕부터 초(楚)나라의 굴원, 노(魯)나라의 좌구명, 손자, 여불위, 한비자 등등 다양한 사건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견뎌낸 인물들을 발견해낸다. 공자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사마천이 발견한 공자는 그저 실패한 자가 아니었다. 온갖 실패를 맛보고도 어떻게든 견뎌낸 이도 아니었다. 공자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비록 자신의 시대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의 기록이 〈공자세가(孔子世家)〉다.
2.공자, 사마천, 다케다 다이준, 그리고 나
세가(世家)는 어떤 기록인가. 일단 세가는 천자가 아닌 제후, 혹은 그에 버금가는 재상들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세가를 읽어보면 그 이상이 기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세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쇠퇴하는 세상을 기록했다. 어질고 현명했던 시조들의 공덕도 유통기한이 다하는 때가 온다. 밖으로는 나라들이 서로 침략하고 멸망시켜 대대로 이어진 제사가 끊기고, 안으로는 군주의 자리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삼촌과 조카, 왕과 신하가 서로 죽고 죽인다. 전란이 심해질수록 백성들의 삶은 처참해진다. 배고픔과 허기에 시달려 갓난아기를 옆집과 바꿔먹고, 해골을 쪼개 땔감으로 삼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형제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고, 어린 조카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가 장성한 조카의 신하로 물러난 이야기 들은 전설 속 이야기다. 살아남기 위해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시대, 탐욕과 집착으로 범벅된 세계, 이것이 세가가 그리는 세계상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서도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들이 있다. 사마천은 그들을 놓치지 않는다.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에는 계찰이,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는 범려가, 〈진세가(晉世家)〉에는 태자 신생이,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비간과 기자, 미자가 있다. 요컨대, 사마천은 폭군과 암군의 등장과 더불어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시대를 기록하고, 그 속에서도 시대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을 함께 담아낸다. 이들이 등장하면 세가의 피비린내가 조금은 씻겨지는 듯하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세상에도 인간이 살아갈 길은 남아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가 세가에 기록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는 “하늘의 운행을 즐거워하고, 자신의 명(命)을 깨달았으므로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했다. 공자는 자신이야말로 땅에 떨어진 도(道)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인간이라고 자신했다. 그것이 하늘이 정한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 사명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공자의 낙천(樂天)주의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왜 공자는 다른 인물들처럼 노나라의 역사를 다룬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공자세가〉라는 별도의 기록으로 남겨져야 했을까?
다케다 다이준에 따르면, 〈공자세가〉는 그저 ‘공자’라는 개인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공자는 도탄에 빠진 이 세상을 안정시키려는 인물들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동시에 그러한 선의를 갖고도 외면당한 인물들을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군자(君子)의 나라인 노나라에서 뜻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노나라의 권력자들에게 공자의 생각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천하를 14년 동안이나 떠돌았건만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약소국이건 강대국이건 공자의 뜻을 알아보는 통치자는 없었다. 공자를 알아보기에는 그들의 뜻이 너무 비루했던 것이리라. 공자는 자신의 이러한 처지를 ‘상갓집 개(喪家之狗)’로 비유한다. 상갓집 개는 주인을 잃고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적선 받은 음식으로 연명하는 비루한 처지다. 공자가 보기에, 주인을 만나 능력을 펼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상갓집 개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다케다 다이준은 공자의 ‘상갓집 개’와 같은 처지가 역으로 당대의 타락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공자는 천하에 울려 퍼지는 백성들의 신음을 듣고, 피와 눈물이 흘러 강이 되는 것을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의조차 저버리고 탐욕에 집착하는 통치자들의 만행에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기에 어떻게든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이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공자를 등용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지켜야 할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자가 왜 〈노주공세가〉에 편입되지 않고 따로 〈공자세가〉라는 별도의 기록으로 존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자세가〉는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16개의 세가 뒤에 오는 17번째 세가다. 다케다 다이준은 기존 세상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서 〈공자세가〉가 기능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공자세가〉는 ‘공자’라는 한 인간의 실패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파괴가 창조와 맞닿아 있듯, 〈공자세가〉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공자세가〉 다음으로 한(漢)나라 12개 세가가 이어지는 흐름이 그러한 순리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살았던 다케다 다이준은 “폐허”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폐허는 단순히 무너진 건물과 오염된 땅과 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를 돌보는 상냥함이 사라지고,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짓밟는 폭력이 당연해진 그곳이 바로 폐허다. 그러나 다케다 다이준은 또한 알고 있었다. 잔혹할 만큼 무지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폐허가 된 세상에서 다시 삶을 모색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이러한 눈으로 〈공자세가〉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나의 시선이 겹친다.
오늘날 우리도 폐허가 된 세상을 살고 있다. 제6차 대멸종과 팬데믹, 방사능 오염 같은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다케다 다이준은 전쟁이 남긴 물리적 상흔과 도덕적 붕괴 속에서 폐허를 실감했지만, 나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과 뭘 해도 이 세상은 망할 것이라는 비관주의에서 폐허를 마주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위기를 넘어 삶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 다행히 이 세상에는 바람을 안고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망했다’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보는 사람들이. 공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마천은 그렇게 공자와 후대인을 이어준다. 그렇게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된다.
3.다른 삶을 향한 끈질긴 욕망
태사공은 말했다.
“《시경(詩經)》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 따라간다’라는 말이 있다.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공자를 동경하고 있다. 그의 저술을 읽어보니 그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중니의 묘당, 수레, 의복, 그릇을 보았다. 유생들이 그 집에서 예를 익히는 것도 보았는데, 나는 공경심에서 그곳을 배회하며 떠날 수 없었다.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영화를 누리다 죽고 나면 그만이었다. 공자는 평민이었지만 10여 대가 지나도록 배우는 자들이 그를 떠받들고 있다. 천자와 왕후로부터 중원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사람들은 공자의 말씀을 마음으로 익히고 있으니, 지극한 성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당대에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사마천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공자의 제자 수를 3천 명이라고 얘기했는데, 그만큼 공자의 삶이 매력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시간이 흘러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武帝) 시기에도 공자의 인기는 여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자를 마음으로 동경하면서 신분의 귀천과 재물의 빈부를 떠나 공자처럼 살고자 했다. 사마천도 그 중 하나다. 공자의 묘당에서 그의 행적을 곱씹느라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공자가 보여준 것은 자유로운 삶이다. 그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미혹되지 않는다(不惑)’, ‘천명을 알게 됐다(知天命)’, ‘어떤 말도 있는 그대로 듣게 됐다(耳順)’ 같은 구절들은 그 자체로 생각해볼 만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사람들을 끌어당긴 공자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을 겪어도 당당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공자는 제자들과 천하를 주유하면서 여러 위험을 겪었는데, 한 번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람들에게 포위된 적이 있다. 초(楚)나라 소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람들은 초나라가 공자를 얻어 더욱 강성해지면 주위에 있는 자신들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해 공자를 막은 것이다. 공자와 제자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식량은 떨어졌고, 굶주림에 지쳐 제자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굶어 죽든 살해당하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강의하고 책을 낭송하고 거문고를 탔다.” 그 소리들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빛나는 눈으로 경청했을 자로가 공자에게 화내듯 질문했다. “군자도 이처럼 곤란할 때가 있습니까?(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아마 자로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자신들은 망가져 가는 이 세상을 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애초에 보상을 바라고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그 노고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자신들은 하나둘 쓰러지는데 스승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걸까?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간 스승님의 간절한 노력이, 그리고 스승을 따라 걸어온 자신들의 길이 모두 부정당한다고 생각됐을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은 너무 평온하기만 하다. 이 상황도 너무 억울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스승님의 당당함도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의 마음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공자라고 그 마음을 몰랐을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군자야말로 진실로 곤란함에 처할 수 있다. 소인은 곤란해지면 넘쳐난다.(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공자의 이 말은 단순히 인내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곤란함을 감내하며 살아갈지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곤란함을 피해 다닐 게 아니라 곤란함 속에서도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 이것이 ‘군자(君子)’라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 군자는 곤란함 때문에 자신이 걸어갈 길[道]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을 고민해본 적 없는 소인은 곤란함에 처하면 허둥지둥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그 순간 인간은 비겁해진다. 공자는 다급한 상황일수록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유하길 바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들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공자는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줄 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자로, 자공, 안회를 불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詩)》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똑같은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각기 달랐다.
자로는 우리가 충분히 인하지(仁) 못하고, 지혜롭지[知]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공자는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가 끝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일과 은나라 왕족 비간이 심장이 꺼내져 죽은 일을 예로 들며, 충분히 인하고 지혜로운 사람들도 곤란한 일을 당한다고 반박했다. 자공은 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천하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 도를 좀 낮춰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공자는 훌륭한 장인의 생산물도 항상 사용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는데, 도를 더 닦지는 못할망정 낮추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안회는 자공과 비슷하게 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천하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이어지는 말이 다르다. “도를 닦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치욕입니다. 그리고 도가 잘 닦인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에 더욱더 군자의 참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안회의 대답은 자로, 자공의 대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로와 자공은 공자가 통치자를 만나 뜻을 펼치는 미래를, 자신들이 공자를 보좌하며 능력을 발휘하는 미래를 꿈꿨다. 그것은 아름다운 미래다. 그 미래를 꿈꿀수록 현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반면에 안회는 그런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등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들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통치자들에게 달린 일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를 닦는 일이다. 이것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신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안회는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다만 그가 파악한 현실은 곤란함이 인간의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현실은 문제의 연속이다. 물론 문제마다 곤란함의 정도가 다르지만, 하나의 문제가 해결된 뒤에 찾아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상황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곤란한 문제들을 감내한다는 것과 동의어일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문제를 겪을지에 대해 어느 정도 결단할 수 있다.
안회는 외면당하는 현실을 견디기로 했다. ‘도’를 닦기로 결심한 이상 그것은 감당해야만 하는 곤란함이었다. 하지만 그 곤란함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고,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도’를 닦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징표일 수 있었다. 안회의 대답은 처음 공자가 자로에게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가 “군자야말로 진실로 곤란함에 처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묵묵히 현실을 견디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는 소인들과 달리,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 고민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곤란한 문제들로 부닥칠 것인지 결단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자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공자의 삶이 우리에게 내재된 어떤 욕망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을 포기한 인간은 공자나 안회가 겪은 것과 같은 곤란함을 겪지 못한다. 다르게 말하면, 공자와 안회가 보여준 것 같은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없다. 어떤 고귀함은 곤궁함 속에서만 확연히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던 것처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 자한편 27장).”
공자라고 어찌 자로와 자공과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까? 자로처럼 자신의 도가 모자란 건 아닌지 자책했을 수도 있고, 자공처럼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공자도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러한 공자를 보면서 “죽을 때까지” 불우함을 견뎌내는 게 무엇일지 상상한다. 그는 굴원처럼 바위를 안고 멱라강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태자 신생처럼 자살하지도 않았고, 계찰처럼 왕조에 묵묵히 봉사하지도 않았다. 목숨을 버리지 않았지만, 시류에 휩쓸릴 수도 없었다. 공자가 한 일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할 마법 같은 계책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상황 자체를 다르게 볼 여지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불우(不遇)했을지언정 무력해지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4.뜻을 세우다, 길을 걸어가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한다’는 뜻을 지키기로 결심했지만, 그 결심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가는 삶이 무엇일지 알아내야 했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그 삶을 살았던 이들을 통해 궁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알게 된 것은, 뜻을 지키는 삶은 고귀한 만큼 고통스럽고 고독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황량하고 척박한 곳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며, 때로는 ‘실패’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마천은 또한 알았을 것이다. 바로 그 실패가 후대에게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공자의 실패가 있었기에 비로소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이 이어졌다는 것을.
주희는 《중용(中庸)》 서문에 다음과 같이 공자를 찬미했다. “우리 선생님[공자]은 비록 마땅한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나, 지나간 성인들을 계승하여 다가올 학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셨다. 그 공은 도리어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뛰어나다.(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 어떻게 보면, 〈공자세가〉는 본기의 어떤 기록보다 위상이 높다. 어떤 본기의 위대한 통치자들도 자신이 놓인 시대 이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요 임금과 순 임금, 우 임금의 공덕은 넘쳐 흘러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미쳤다고 하지만, 공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지는 못한다. 공자는 다가올 이들을 위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道)을 역사에 드리웠다[垂]. 이것은 어떤 위대한 성인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공자를 세가에 기록한 이유다. 시대가 거듭될수록 공자의 실패는 더욱 고결하게 빛난다. 하지만 사마천이 말하고자 한 것은 ‘공자’라는 한 개인의 위대함만이 아니다. 사마천에게 공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등대였다. 등대가 망망대해를 떠도는 수많은 배들이 의지할 불빛을 남기듯, 공자의 삶은 시대 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길잡이가 됐다. 이런 점에서 〈공자세가〉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한 시대를 잘살았던 권력자가 아니라 고독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자신의 뜻을 끝까지 지킨 지사(志士)들이라는 것,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것을 전달하는 복음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춘추전국시대의 17개 세가와 한나라의 12개 세가 사이에 공자를 기록한 이유가 아닐까.
때때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시도가 실효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에 낙담하곤 한다. 기후위기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19 때 경험한, 생각보다 훨씬 막강한 자연의 회복력을 믿는다. 우리가 다르게 산다면 우리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 다소 비관적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에 우리의 노력은 미약하고, 위기를 직면하기에 인간의 탐욕은 무지하다. 이런 시대에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어떤 뜻을 세우고,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질문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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