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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기를 만나다

[청년 사기를 만나다] 유협열전(游俠列傳) : ‘나’를 위한 자존적 투쟁

by 북드라망 2025. 6. 20.

유협열전(游俠列傳) : ‘나’를 위한 자존적 투쟁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불온한 이들을 기록하다
《사기(史記)》를 읽다 보면, 놀라운 영웅담을 만날 수 있다. 《논어(論語)》에서 제자들과 배움을 일상으로 삼았던 공자가 제자 자공을 사신으로 보내 전국을 좌우하는 낯선 모습을 볼 수도 있고[〈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13년간 홀로 서쪽을 떠돌았던 장건[대원열전(大宛列傳)]의 소설 같은 모험담도 읽을 수 있다. 그런 반면, 이걸 공식 역사책에 기록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불온’한 이야기들도 있다. 특히 〈유협열전(游俠列傳)〉이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협열전〉은 《사기》의 모든 기록 중에서 가장 불온한 이야기인 것 같다. 유협(游俠)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은 그 자체로 당대 한나라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협열전〉은 한(漢)나라의 유명한 다섯 명의 협객 주가(朱家), 전중(田仲), 극맹(劇孟), 왕맹(王孟), 곽해(郭解)에 대한 기록이자 유협을 역사에 기록하고자 하는 사마천의 실험이다. 유협이라고 했지만, 협객(俠客)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면,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활약했던 자객과 달리 유협은 한(漢)나라의 협객들을 가리킨다. 〈자객열전(刺客列傳)〉과 비교하면, 유협은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고 자객은 은혜를 갚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기술하기 전까지 역사 속에서 유협 혹은 협객이란 존재는 주목된 적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딱히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탁월한 덕성이나 업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된다고 해도 이들은 권력자들을 빛내는 조연에 불과했고, 유협이나 협객이 아닌 주변 인물로 분류됐다.

가령, 난세(亂世)에서 유협이나 협객은 용맹한 장수로 등용되거나 혹은 자객처럼 적의 우두머리를 암살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되지만, 치세(治世)일 때는 법을 무시하는 폭력배에 불과했다. 경제(景帝) 때 오왕(吳王) 유비(劉濞)를 중심으로 동성(同姓)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이란 사건이 있었다. 주아부(周亞夫)라는 신하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극맹이란 유협을 등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이렇게 큰일을 저지르면서 극맹을 구하지 않았다니, 그들은 이미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이 해결되고, 사회 질서가 안정될 즈음에 유협은 사회의 골칫거리가 된다. 실제로 유협은 보통 사람들보다 폭력적인 면이 있었다. 유협으로 이름난 몇몇은 도굴과 강도를 서슴지 않았고, 살인도 꺼리지 않았다. 때문에 난세의 권력자들은 유협을 얻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치세일 때는 국가의 질서를 견고히 하기 위해 유협 같은 이들을 소탕했다. 특히 한나라 문제(文帝)부터 유협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그런데 사마천은 〈유협열전〉을 기술함으로써 ‘사회의 불안 요소’였던 유협과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의 관계를 뒤집는다.

 



사마천이 보기에, 유협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동분자가 아니라 질서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직업을 갖고 도덕 관념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만, 유협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 즉 협(俠)을 우직하게 실천했다. 유협들이 ‘협’을 실천하는 것은 돈이나 명성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협은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는 가치다. 예를 들어, 낙양의 두 집안이 심하게 갈등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명사(名士)와 현인(賢人)도 원만하게 중재하지 못한 것을 해결한 인물이 곽해다. 곽해는 두 집안 사람들에게 “저 곽해는 다른 고을에서 온 자로서 어찌 이 고을 현사들의 권위를 뺏을 수 있겠습니까? 당분간 나의 말대로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가 돌아간 후에 낙양의 인사들을 중재하게 한 다음 그들의 말을 들었다고 하십시오”라고 말한 다음, 몰래 그곳을 떠났다. 자신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사람들로부터 칭송되든 비난받든 조건 없이 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유협의 고귀함이자 자유로움인 것이다. 이러한 유협의 매력에 빠져 “사귀고자 애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유협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위험한 신호였다. 유협이란 존재가 선망의 대상이 될수록 제국의 질서는 자연스레 약화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기틀을 닦기 위해 한나라 초기 황제들이 유협들을 발본색원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이런 유협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면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가 ‘하나의 질서’를 강제하는 폭력 집단처럼 보이게 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유협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사마천의 마음이다. 그는 유협을 말살하는 것이 당시 한나라의 정책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협의 고유한 덕성을 기술했다. 그동안 조연에 불과했던 유협이란 인물 유형에 가해진 편견과 비하를 걷어내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포착했다. 자칫하면 유협 같은 이들을 미화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릉의 화(李陵之禍)’ 같은 사건을 다시 겪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어코 유협을 역사의 주역으로 조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협이란 탁월한 인물 유형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문장가로서의 직감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 국가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유협에 이입하여 국가의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을까?

 


2.역사를 쓰기 위해 역사에 저항하기
사마천의 마음을 상상하기에 앞서, 잠시 니체를 경유하자. 니체는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에서 역사가의 욕망이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어떤 욕망이 투영되는가에 따라 그는 ‘기념비적 역사’,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 역사’로 역사의 양상을 구별했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의 역사다. 이들에게 ‘과거’는 인류가 본받아야 할 훌륭함을 간직하는 시대고, ‘현재’는 그러한 과거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다. 하지만 역사를 지나치게 ‘기념비화’ 하게 되면 ‘과거만큼 훌륭하지 못한 현재’가 평가절하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골동품적 역사’는 현재를 과거의 산물로 설명하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의 역사다. 이들에게 ‘과거’는 ‘기념비적 역사’의 과거만큼이나 훌륭하지는 않으나, 지금 우리를 있게 한 토양이다. 그 덕에 아무리 비참하고 고립된 실존도 살아갈 수 있는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골동품적 역사’ 역시 과잉된 경우에는 오래된 관습만을 옳다고 여기는 고리타분함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역사를 사용하는 방식도 이 두 가지 종류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특히 고전(古典)을 대하는 태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때때로 ‘고전’은 현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곤 한다. 그 세계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생태적 감수성이 아직 남아 있고, 개별화되다 못해 서로를 소외하는 현대인들을 구원할 공동체가 존재한다. 고전의 세계에 대한 낭만적이고 경건한 숭배는 상대적으로 현실을 무력하게 만든다. 좋은 과거와 나쁜 현재.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실체화하는 역사는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포착할 수 없게 한다. 우리가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을 고양시키고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다. 니체는 이를 ‘비판적 역사’라 말한다.

‘비판적 역사’는 종속된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현실에 새로운 색채를 부여하고자 하는 자들의 역사다. 앞의 두 역사가들과 달리, 단순히 역사를 기억하기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물을 소화하는 것처럼, 경험과 기억이 버무려지고 소화된 결과가 ‘역사’다. 우리가 기념비로 세우고, 골동품으로 보존한 역사 역시 이러한 조형의 작업물이다. 비판적 역사가들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훌륭했던 과거를 깨부순다. 그것은 과거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삶에 유용하지 않은 모든 역사는 “소멸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역사에 기록하는 특권은 언제나 무언가를 망각하고 변형시키는 특권과 더불어 성립한다.

사마천으로 돌아와 보자. 내 생각에, 사마천 또한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를 욕망했다. 그가 살았던 한나라 무제(漢武帝)의 시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던 진(秦)나라와 달리 안정된 체계를 구축했고, 유목민을 정벌하며 유례없는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이만큼 발전하고 확장된 제국은 없었을 정도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마천으로서는 자신이 사는 시대에 자부심을 느꼈을 법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마냥 한나라를 찬양할 수만은 없었다. 사마천이 당한 궁형(宮刑)이란 사건은, 그 형벌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떠나, 그가 한나라에 동화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었다. 나아가 ‘제국’만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역사가 아니라 제국의 질서로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역사를 궁리하도록 추동했다. 사마천이 열전(列傳)이란 독특한 형식을 발명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고민이 한몫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비판적 역사’를 욕망하는 역사가들처럼, 사마천은 ‘제국’이라는 단일한 중심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역사가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그러한 주류적 서사에 저항하고 다른 서사를 구성하는 새로운 역사를 꿈꾸지 않았을까. 제국과 황제들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덕(德)을 발휘하는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기.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이 놓인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의심해야만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유협열전〉을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유협열전〉에서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의심하고 부정해야 했던 사마천의 저항을 읽는다.

 

 


3.‘격을 깨트림(破格)’으로서의 격(格)
〈유협열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파격적’이다. 《열전》의 다른 기록들과 비교하더라도 〈유협열전〉은 이질적이다. 〈유협열전〉의 인물들이 너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독특한 재능을 뽐내거나 활약함으로써 시대에 발자취를 남긴 다른 인물들과 달리, 유협은 주목할 만한 무엇이 없다. 가령, 〈백이열전(伯夷列傳)〉의 백이와 숙제는 천하가 바뀌는 것을 막지 못했어도 주나라의 통치를 의심할 수 있는 질문을 남겼다. 사마천은 이들의 행적을 기술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품었을 고뇌를 상상했다. 단순히 인물의 생애를 정보적으로 전달하기보다 그들의, 그리고 사마천의 마음자리가 드러나도록 기술했다. 하지만 유협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은 단편적 정보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유협’이란 인물 유형도 결코 비범하다고 할 수 없다. 사마천은 유협을 ‘향곡지협(鄉曲之俠)’, ‘포의지협(布衣之俠)’, ‘여항지협(閭巷之俠)’, ‘필부지협(匹夫之俠)’ 같은 단어들로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유협이 보통 사람들과 섞여 외견상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마천은 곽해란 유협을 직접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고, 말솜씨도 본받을 구석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특출난 바가 없기 때문에 유협을 역사에 남기는 것은 더없이 실험적으로 느껴진다.

역사적으로 평가하기에 유협은 다소 모호한 데가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선악(善惡), 시비(是非) 등의 이분법적 잣대가 유협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협은 타인을 돕는 데 있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으며, 말함에 매우 신중하지만 한 번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어김이 없다. 게다가 자신이 빈천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이는 공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군자의 덕목 그 자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협은 더없이 도덕적 인간이다. 그러나 수시로 법을 어기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데 거부감이 없으며, 잔혹한 성정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유협은 결코 도덕적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유협이란 존재를 역사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동안 우리가 삶과 역사에 들이밀었던 이분법적 잣대를 깨부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곽해(郭解)를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외조카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자초지종을 살핀 다음에 용서했다. 한 번은 마을의 어떤 사람이 자신을 우습게 본 적이 있었는데, 상대방을 어떻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덕행이 모자라서 그럴 것이라며 그의 노역을 대신하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일을 부탁하면 반드시 해냈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만족하게끔 잘 대접하고 설득했다. 그렇다고 곽해가 도덕의 화신인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원한이 많아 잔인한 생각을 품었고, 일이 뜻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직접 살인하는 일도 많았다. (…) 또한 가짜 돈을 만들고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도 훔쳤다.” 나이가 들어서는 신중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잔혹함을 품고 있어서 “분노가 폭발하면 돌연 화난 눈을 부릅떴다.” 행적과 기질을 종합해보건대, 아마도 곽해는 폭력배의 기질이 다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질이 어떤 국면에서는 협을 실천하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느냐 불응하느냐에 따라 평가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예컨대 한국인들이 참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김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암살자’ 혹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대의 시각에서 보면, 독립운동가들은 질서에 불응하는 ‘암살자’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독립투사들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민족의 한(恨)을 풀기 위해 살신성인하는 영웅들이다. 유협에 대해 가해지는 편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유협들에게 사회적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사마천이 왜 유협에 주목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비록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소한 의로움에 집착하는 것 같아도, 유협에게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는 애초에 유협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보통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와 사회적 명망, 출세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유협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우직하게 실천하기를 바란다. 대체로 사람들이 자기 한 몸 건사하느라 더더욱 이기적이고 편협하기로 결심할 때, 유협은 오직 자신의 신념 하나만을 굳게 실천했다. 〈유협열전〉 안에서 그것은 유학의 군자적인 면모,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유협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사마천이 유협에 주목한 것은 주어진 가치에 복종하기보다 고유한 가치를 따르는 자는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유롭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험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항시 부딪칠 수 있는 것이다(且緩急人之所時有也).” 유학에서 이른바 도(道)를 체득한 성인, ‘인(仁)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순 임금은 가족들에 의해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이윤과 부열이란 전설적 신하들은 등용되기 전까지 빈곤한 처지를 감내해야만 했다. 역사 속 어떤 영웅들도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어떤 특출한 재능과 배경도 없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사마천은 말한다. 역사 속 위인들도 위험 속에서 곤란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평범한 재능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혼탁한 흐름을 건너려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況以中材而涉亂世之末流乎)?”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유협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위태롭게 살았다. 아니, 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빈천하고 온갖 위험 속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주가(朱家)와 극맹(劇孟)은 검소하다 못해 돈이 없어 항상 옷이 남루했고, 반찬 없이 밥을 먹었다. 제남(濟南)의 간씨(瞯氏)와 진(陳)의 주용(周庸), 곽해는 협객으로 이름났는데, 이들을 흠모하는 사람들만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황제들은 사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죄명으로 유협들을 수시로 처형했다.

사마천이 유협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들 또한 위태롭게 살았다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쓸 때, 유협에게는 살아남는 것보다 고수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삶에서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여김에 따라 자연스레 어떤 사건들로부터 덜 영향을 받게 된다. 위태롭게 살아가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유협들에게는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실천해야 하는 올바름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회피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태로운 것이 아닐까.

 


4.자신을 지키는 삶, 자유
사마천은 왜 〈유협열전〉이라고 편명을 붙였을까? ‘유협’이란 집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협객은 원래 여기저기 떠도는 이방인임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곤궁한 처지를 강조하기 위해 유(游), 즉 ‘물처럼 여기저기 흘러다니다’라는 글자로 표현했다고 하기도 한다. 나에게 ‘협’은 물처럼 정형화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협(俠)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협객의 소양이지만, 그렇다고 협이 곧 도덕은 아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평범한 덕목이지만 모든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백하자면, 중학생 때 무협지를 읽기 시작한 뒤로 가슴 한편에 항상 ‘협’을 품고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받을지언정 나와 남, 이것과 저것, 이익과 손해 등 경계를 세우고 계산하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협객의 당당한 태도가 멋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협을 흠모하는 내 마음에는 인정욕구가 깔려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협열전〉에서 나타난 협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협객이 협을 실천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이란 특정한 형상으로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변형되며 살아간다. ‘나’란 주체는 매 순간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문제는 이 관계들로부터 자신을 조형하기보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살아간다는 데 있다. 외모를 가꾸고, 무언가를 잘하려고 하는 등 자기 자신보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럴수록 삶은 능동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가치에 휩쓸린다.

유협들을 생각한다. 이들은 ‘평범하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행하면서 자신을 지켰다는 점에서 비범하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자유로웠다. 〈유협열전〉에는 자유로워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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