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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기를 만나다

[청년 사기를 만나다] 역사를 공부한다, 고로 살아간다

by 북드라망 2025. 7. 11.

역사를 공부한다, 고로 살아간다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에 관하여
교과서를 비롯해 정리된 역사에 익숙한 나에게 ‘역사를 쓴다’는 생각은 아주 낯설다. 그동안 내가 본 역사들은 친절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의 발단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지 등등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읽는 게 지루할지언정 머리 아프지는 않다. 역사 공부는 끈질기게 정리된 것들을 꼼꼼하게 외우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 교과서 역사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역사란 ‘써야 할 것’이라기보다 ‘읽어야 할 것’이고, 읽어야 할 역사는 곧 암기해야 할 정보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죽었으며,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식민지로 점령당했다. 안타깝거나 화가 나더라도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역사를 이렇게 읽고 암기해야 할 정보로만 받아들이게 됐을까? 역사란 애초에 변하지 않는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했던가?

어쩌면 우리가 역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도 ‘역사란 고정 불변하는 사실’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벌어져서 바꿀 수 없는 과거,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사건들의 연쇄. 이런 역사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역사를 공부하려면 어지간한 끈기와 열정으로는 어림없다. 굵직한 흐름만 아니라 주변의 디테일한 것까지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어떤 전조들이 있었고, 어떤 인물들이 얽혀있는지 복잡한 관계도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해도 정작 일상에서 쓸 일은 거의 없다. 관련 주제가 나왔을 때 잠깐 유식한 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바에야 그 정성으로 외국어를 하나 더 공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따져볼수록 역사 공부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이 모든 지루함은 역사가 나 자신과 무관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적어도 사마천에게 역사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사마천이 역사를 써야 했던 것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궁구함으로써 옛날과 지금의 변화를 통찰하여 일가의 말을 완성하기(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위해서였다. 즉 그에게 역사란 고정 불변하는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와 옛날과 지금을 관통하는 ‘변화’라는 원리에 대한 탐구다. 나아가 일가(一家)를 이뤄 동시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활동이다. 역사를 왜 쓰는가? 분명한 것은, 이유가 뭐든 역사 쓰기가 모두 현실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관한 절실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금을 절실하게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를 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읽을 수도 없다. 역사에서 쓰기와 읽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특정한 내용을 기술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특정 역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사실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이냐가 역사 공부의 첫 관문이다.



2. 폐허 위에서 시작하는 역사
《사기(史記)》라는 방대한 역사 쓰기를 시작하는 포문으로 사마천은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배치했다. 사마천은 ‘첫 편’을 매우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은 각기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역사를 그린다. ‘세가’는 제왕을 중심으로 통합되기는커녕 분열되고 갈라짐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에 관한 역사이고, ‘열전’은 그동안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사다. ‘세가’와 ‘열전’의 첫 편인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와 〈백이열전(伯夷列傳)〉은 각각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오제본기〉 또한 그렇다. ‘본기(本紀)’의 시작인 〈오제본기〉는 이 어지러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질 수 있었는지 제왕을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이고, 그러한 역사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다섯 명의 제왕(五帝)’을 기록한 역사다. 그런데 사마천이 주목하기 전까지 〈오제본기〉는 ‘역사’로 기술되지 못했다.

잠시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자. 그가 살았던 한(漢)나라 무제(武帝) 치하는 동중서를 필두로 유학이 다시 꽃피우던 시대였다. 각종 담론과 정책을 주도한 유학자들은 요순(堯舜)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왜냐하면 요순시대는 ‘현존했었던 유토피아’로서 땅에 떨어진 도(道)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요순보다 앞선 역사들이 경원시됐다. 하지만 요순이란 성인은 어떤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성인으로 출현한 것일까? 그들의 위대한 업적은 이전 시대와 무관할까? 〈오제본기〉는 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탐사 보고서다.

〈오제본기〉에서 오제(五帝)는 황제 헌원(黃帝軒轅), 전욱 고양(顓頊高陽), 제곡 고신(帝嚳高辛), 제요 방훈(帝堯放勳), 제순 중화(帝舜重華) 다섯 명을 가리킨다. 모두 고대 중국의 유토피아를 이룩한 성인들이다. 요순시대는 길가에 떨어진 황금도 줍지 않는다고 할 만큼 백성들이 자기 삶에 만족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요순의 태평성대도 그에 앞선 황제와 전욱, 제곡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아, 그대 순이여 하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도를 굳게 지켜라(允執厥中)’”고 가르침을 내렸던 것처럼, 후대는 선대로부터 통치의 핵심을 배운다. 구체적인 언사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오제본기〉에서 그것이 무엇이었을지 유추할 수 있다. 〈오제본기〉는 유토피아를 이룩한 성인들의 조건, 제왕이 되기 위한 덕이 무엇인지를 얘기하고 있다.

〈오제본기〉는 황제 헌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황제(黃帝)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본래 ‘공손(公孫)’ 부족의 ‘헌원(軒轅)’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헌원은 신농(神農)과 그의 신하들이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났다. 제후들은 신농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각자의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역사가 문명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보통 역사의 시작으로 문명 혹은 국가의 탄생을 가져온다. 창립자가 어떤 야만의 시절을 극복해서 문명/국가를 창건했는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환웅은 풍백과 우사, 운사를 이끌고 내려와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아 고조선 건립의 기반을 마련했고, 박에서 태어난 혁거세는 여러 부족을 연합해 신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헌원이 태어난 시기는 이미 신농이 다스리고 있었고, 조공을 주고받는 군신관계가 맺어져 있을 정도로 복잡한 정치체가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신농은 오제보다 앞서 선천팔괘(先天八卦)를 발명한 성인이다. 그는 인간이 이 우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문명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성인도 어찌하지 못하는 때가 왔다. 세상은 어지러워졌고, 그동안 자신이 발명한 것이 통용되지 않는 때가 왔다. 헌원은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 위대한 성인도 빛이 바랜 시대. 찬란했던 문명이 스러져 폐허가 된 시대. 사마천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한다.

헌원은 태어났을 때부터 남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했고, 어려서는 민첩하고 번득이는 재주가 있었다. 성장하면서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장성해서는 총명했다.” 덕을 닦고, 군대를 정비하고, 오곡을 심어 백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세상에 나아갈 기틀을 마련했다. 신농을 대신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제후들을 하나둘 정벌한 덕에 이름이 점차 알려졌고, 나중에는 제후들이 신농이 아니라 헌원에게 귀의했다. 천하를 놓고 신농과 판천(阪泉)이란 들판에서 세 번 싸운 끝에 이겨 신농 다음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농을 이긴 헌원을 기다리는 것은 편안한 일상이 아니라 본격적인 고생이었다. 헌원은 끊임없이 일해야 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제후가 있으면 가서 정벌해야 했고, 산을 개간하여 길을 닦아야 했으므로 하루라도 편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느라 일정한 거처가 없을 정도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전보다 귀신과 산천, 천지에 제사를 많이 지내야 했다. 신하들을 등용해 백성들을 다스려야 했고, 천지의 리듬을 파악해 구체적으로 인간 삶으로 번역해야 했다. 언제 어떤 식물을 심고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부터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발명해야 했으며, 인간의 삶과 죽음을 유발하는 이 세계를 궁구했다. 요컨대, 천지 사이에서 인간이 살아갈 기반, 문명을 건설한 것이다.

황제의 뒤를 이은 나머지 오제들도 비슷하다. 황제 이후로는 천하가 비교적 안정되는 흐름이었으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골칫덩어리 이민족도 있었고, 때가 바뀜에 따라 달력도 다시 제정해야 했다. 농사는 어떻게 짓고, 제사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등등 변화무쌍한 천지를 본받아 인간 삶의 양식 전반을 정교하게 발명하고 수정해야 했다. 그래야 제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은 제왕에게 감화될 수 있다.

“제전욱 고양은 (…) 차분하고 지략이 있어 사리에 밝았다. (…) 모든 동식물과 크고 작은 산천의 신들 그리고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 복속시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신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스스로 이름을 말했다. (…) 귀가 밝아 먼 곳의 일을 알고 눈이 밝아 미세한 곳까지 잘 살폈다. (…) 제곡의 은덕은 대지에 물을 대듯 고루고루 온 천하에 두루 미쳤고, 해와 달이 비추고 바람과 비가 이르는 곳이면 모두 복종했다.”

“제요(帝堯)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다. 사람들은 태양을 따르듯 그를 따랐고, 만물을 적시는 비구름을 보듯 그를 우러러보았다.”

순(舜)은 “일을 도모함에 주도면밀하고, 말을 하면 그 말대로 행했다. (…) 역산에서 농사를 짓자 역산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서로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고,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자 뇌택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리를 양보했다. 황하 언저리에서 그릇을 굽자 그곳 그릇은 모두 단단한 것만 생산되었다. 순이 1년을 살자 마을이 형성되었고, 2년을 살자 읍이 생겼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가 되었다.”


선양(禪讓)이란 행위가 발명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전사(前史)가 숨겨져 있었다. 제왕들은 자신의 자리를 책임지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제대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요 임금 이전에 제위에 올랐던 제곡 고신의 첫째 아들 ‘지(摯)’가 그렇게 쫓겨났다. ‘지’는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요 임금에게 제위가 돌아갔다. 제왕이 제왕답지 못하게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면 제위를 계승할 수 없는 것이다. 요 임금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도 비슷했다. 전쟁을 좋아할 뿐 제위를 감당할 덕이 없었다. 그러나 제왕으로서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인물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후보자들이 색출됐고, 순 임금은 거기에 부합했다. 요 임금은 연로한 자신을 대신해 순 임금에게 천하를 다스리도록 했고, 그렇게 약 30년이 지난 뒤에 순은 제위에 오르게 됐다. 유학자들이 찬양하는 요순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그러나 요순이 이룩한 태평성대도 저물 것이다. 다시 세상은 어지러워질 것이고, 제왕들은 다리털이 빠지도록 고생할 것이다. 그렇게 잠시 다스려졌다 해도 금세 어지러워지는 게 우리가 놓인 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안정된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삶은 위태로워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찬란했던 것이 스러졌더라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폐허가 될 이 세상에 그래도 발 딛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마천에게 그것은 역사 쓰기였다.

 
3. 사(史),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자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학자들은 오제(五帝)에 관해 칭송을 많이 했으나 시대가 멀고 오래됐다. 《상서(尙書)》에는 요(堯) 이후의 일만 기록되었다. 제자백가들이 황제를 말했지만, 그 문장이 품위가 높지 않아 독서가들도 분명히 말하기가 어려웠다. 공자가 전한 《재여문오제덕(宰予問五帝德)》이나 《제계성(帝繫姓)》을 유가에서 전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일찍이 서쪽으로 공동산(空桐山)에 이르고, 북쪽으로 탁록(涿鹿)을 지나왔으며, 동쪽으로 바다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과 회수(淮水)를 건넜다. 그 지역의 장로들이 흔히들 황제, 요, 순을 말하는 곳을 가보면 풍속과 교화가 본디부터 달랐으며, 대체로 고문의 내용과 위배되지 않았다.

내가 《춘추(春秋)》와 《국어(國語)》를 읽어보니, 《오제덕》과 《제계성》의 문장이 분명함을 알게 되었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깊이 살피지 않았을 뿐 그 책들에 기술된 내용은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 《상서》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 빠지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데, 그 흩어진 부분들이 왕왕 다른 서적에 보인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본래 견문이 얕고 좁은 사람이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러 학설을 합해서 차례로 논하고 그 중 특별히 우아한 문장을 선택하여 ‘본기’를 저술하였으며 《사기》의 첫머리로 삼았다.”


〈오제본기〉는 고대 중국의 유토피아를 건국한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마천 자신이 어떻게 오제에 대해 서술하게 됐는가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된다. 지금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오제본기〉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구체적으로 언제 있었던 시대인지 특정할 수 없는 지방의 민담 혹은 오래된 기록에 풍문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과 ‘역사학’이란 분과를 창시한 랑케 같은 초기 근대 역사학자들은 엄밀하게 사료와 더불어 실증될 수 없기 때문에 민담과 신화, 설화 등을 역사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실증 가능한 사료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화나 다름없는 요순 이전을 역사로 넣은 사마천은 엄밀하다고 할 수 없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신농과 황제는 인간이 아닌 무엇이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나 설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오제본기〉를 《사기》의 첫 편으로 넣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스무 살에 사마천은 경험을 쌓기 위해 약 3년 동안 중국 전역을 유람했다. 이 시기의 견문은 나중에 《사기》 여기저기에 활용되었다. 굴원이 투신한 연못과 항우가 마지막 일전을 결사한 강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비분강개(悲憤慷慨)에 공감했고, 과거 제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돌아다니면서는 국력의 강대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노나라 공자의 묘당에서는 아직도 배움의 열정이 이어지는 현장에 감동했다. 〈오제본기〉도 이러한 견문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한편으로는 공자가 전한 〈오제덕〉과 〈제계성〉에 요순 이전의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사마천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기록을 곱씹었다. 실제로 오제가 다스렸다는 지역을 직접 유람해보니 풍속이 다른 곳과 다른 바가 있었다. 기록과 견문의 교차 검증. 누군가는 허무맹랑한 신화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과거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었다. 사마천은 요순 이전의 오제들의 흔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것에 기반해 ‘역사’를 썼다. 즉, 사마천에게 역사가 성립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실증할 수 있는 사료가 아니라 특정 과거의 흔적 속에서 자기 삶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역사가 사료가 아니라 특정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구성된 삶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자리는 어디일까? 갑골문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역사가를 뜻하는 사(史)라는 글자는 한 손에 종족의 깃발을 든 모습 혹은 축문을 적어 나뭇가지에 붙들어 맨 형상이다. 기록 혹은 기록자의 의미보다 제사나 의식을 주관하는 샤먼이나 무당 같은 역할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고 듣는 존재로서의 ‘사(史)’. 시간이 흐르며 글자가 변화하듯, ‘사’의 의미도 변화했다. ‘사’는 주(周)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건과 사물을 기록하는 사람(史 記事者也)”이 되었다. 권력자의 말과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가장 가까이에서 남김없이 기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에 이르러 사마천은 ‘사’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변주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변화를 통찰하고 궁구하는 존재로서의 ‘사’. 사마천은 다양한 서적을 꼼꼼하게 살폈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 중국을 유람하며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책상에 앉아 과거가 어땠을 것이라 상상하는 게 아니었다. 직접 떠돌며 어떤 사람들이 과거-현재의 연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고 들었다. 그가 기록한 역사는 그러한 결실이었다. 요컨대, 사마천은 과거가 기록된 문서고부터 과거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모든 곳을 역사가의 자리로 삼았다. 역사가의 자리는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뒤섞이는 모든 곳이었다. 결코 온전하게 복원될 수 없는 과거의 흔적들은 역사가에 의해 다채로운 모습으로 풍성해진다.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오제본기〉를 읽으며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오제본기〉의 제왕들과 역사가는 통하는 지점이 있다. 제왕들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문명을 건설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아무리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건설된 찬란한 문명도 필연적으로 쇠락할 수밖에 없다. 평화로웠던 천하는 어지러워질 것이며, 하나되었던 사람들은 제각기 분열될 것이다. 제왕들은 그러한 운명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세심하게 천지의 운행을 관찰한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문명을 꽃피워도, 그동안의 문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폐허가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또 다시 폐허가 될 세상을 위해 노력했다. 폐허가 된 세상 위에서 또 다시 인간이 살아갈 길을 고민하는 제왕들이 나타날 것이며,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세상을 위한 자신들의 마음만큼은 이어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또한 이와 비슷한 존재라 생각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가 있다면,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위대한 인간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강대했던 제국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누군가는 이 세상을 떠난다. 생로병사는 반복될 것이며 누군가 겪었던 즐거움과 고통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무한한 천지의 운행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운명을 좌우하기에 무력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길을 걸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삶을 마무리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 나는 이 세계에 어떤 흔적으로 남을 것인가. 역사는 이러한 절실한 물음을 품은 자들에게서 시작된다.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예정된 쇠약함과 죽음, 부패를 어떻게 겪을 것인지를 질문할 때, 인간은 ‘어차피’ 흩어지고 말 삶에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흩어질 것인지를 궁구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유한한 삶을 좀 더 거대한 단위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럴 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조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보고 배울 수 있다. 삶은 생로병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을 테지만, 이를 겪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역사가 자신 또한 그들처럼 자기 삶을 실험하게 된다. 역사는 그러한 배움과 실험의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직업 같은 게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유한한 자신의 삶을 무한하게 실험하는 순간 사람은 역사가가 된다.


4.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리라!
〈오제본기〉는 유토피아를 건설한 성인들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역사가란 누구인가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가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게 아니다. 교과서에 익숙한 우리에게 역사가는 ‘연표를 정리하는 사람’ 정도지만, 연표가 곧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부산물 같은 거다. 오히려 역사가의 관심사는 삶에 있다. 얼마나 다양한 삶들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발굴해낼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관심사는 특정 분과 영역으로 묶이지 않는다. 철학과 종교를 비롯해 인간 삶을 질문하는 모든 영역에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특정 학문 분야라기보다 일종의 사유 양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막막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펼쳐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사유 양식으로서의 역사. 따라서 삶을 고민하는 한에서 역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연표를 외우는 게 아니라 다른 삶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특히 세상과 불화하고 때로는 자기 삶마저 냉소 짓는 사람들일수록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비록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지만, 보다 넓은 시공간 속에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이지만, 단 것을 절제하고 기꺼이 쓴 것을 감내하는 것도 인간이다. 지금 나의 행동과 결정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이 예측 불가능성에 의지해 삶을 기꺼이 맞이하는 것도 인간이다. 과거 세계를 식민지 삼았던 제국은 그만큼 많은 사람을 착취한 오명을 안게 되었고, 한때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모델이 되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놓인 시공간을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관측함에 따라 지금 여기의 삶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역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여행은 필수적이다. 현재가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가 얼마나 다양한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마천을 따라 ‘나 자신을 위한 역사’를 공부하고자 한다. 내 삶을 이 세상에 꽃피우고 지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삶이 있는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인과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통념의 역사를 파열시키는 역사를 읽고 배우기. 이 또한 역사 쓰기의 일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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