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에서 활동하시는 청년 소연샘의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바로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연애 한 번 한 적 없는 소연샘께서 에로스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소연샘께서는 절에 들어가신 이모, 부모님을 따라 세 살부터 절에서 생활하셨는데요, 어려서부터 접한 예불과 너무나도 익숙한 법당! 큰 스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정진하고 수행해보지만 불쑥 일어나는 번뇌들로 인해 스스로를 여러번 탓하기도 합니다. 어느새 20대가 되고, 독립을 한 소연샘은 새로운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간디와 조르바! 간디와 조르바를 만나고 반드시 신체 곧 육신을 버려야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소연샘을 따라 “육신이 여의주가 되고,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되는 길”을 찾는 여정에 함께해주세요!
웰컴 투 더 에로스 로드
박 소 연(남산 강학원)
나는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다. 아니, 어쩌면 큰스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가족이 다 그랬다. 부모님과 이모, 셋은 단짝 친구였다. 관심사도, 지향하는 삶의 방식도 비슷했다. 세 사람 모두가 스승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도시가 체질에 맞지 않았던 부모님은 결혼하자마자 귀농을 결심했다. 거기서 자연농법을 실천하는 선생님께 농사도 배우고, 택견 수련도 하고, 옹기 장인을 찾아가 옹기를 빚기도 하고, 집도 직접 지어보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한마디로, 시골 생활을 200% 즐겼다. 이모는 서울에서 일을 하며 계속 현자들의 책을 읽었다. 세 사람은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읽고 그분의 아쉬람이 궁금해 인도에도 갔다. 현자가 죽고 없는 아쉬람에서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건물을 돌아보고, 바나나 잎에 정갈하게 싸인 점심을 먹는 것뿐이었다. 스승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큰스님을 만났다. 엄청난 파토스가 일었던 것 같다. 이모는 약국을 접고 출가를 결심했고, 부모님도 즐겁던 귀농 생활을 접고 수행을 위해 절에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큰딸, 작은 딸네가 모두 절에 들어가자 당혹감 반, 절에서 공부하며 노후를 보내겠다는 마음 반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세 살이었다.
이후로도 다이내믹한 사건이 많지만, 가족들 이야기는 이쯤 하겠다. 절 라이프가 시작됐다. 나는 방석에 누워서 예불 드리는 걸 구경했고, 발우공양 때는 꼭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고 싶어 했다. 스님들과 부모님이 낮 동안의 고된 일을 끝마치고 명상하면서 졸음과 사투할 때 나는 큰스님의 크고 넓은 방석에 누워 꿀잠을 잤다. 한여름 낮, 경내에 울려 퍼지는 <초발심자경문> 낭송 소리가 기억에 남아 있다. 자연스레 예불문을 외우게 되었을 무렵부터 예불과 명상, 30분 관음 기도는 내 일상이 됐다. 물론 제대로 한 건 아니었다. 목탁을 치고 관음 정근을 하며 절 한번 할 때마다 방석을 조금씩 밀어서 법당 대탐험을 했다. 적절한 거리에서 시작된 기도는 늘 불상 코앞에서 마무리되곤 했다. 할머니의 천주(천 알 염주)를 라면이라고 가지고 노는 불경스러운 짓도 많이 했다.
그리고 큰스님. 부모님이 큰스님을 대하는 걸 보면서 자연히 저분은 부모님의 스승님이구나, 느꼈을 거다. 큰스님은 자연스레 나의 스승님이 되셨다. 정말 많은 사랑을 주셨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큰스님을 많이 따랐고, 존경했다. 이제 수행은 내게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스승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건 제자가 성실히 수행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3년 반이 지나고 이제 절 근처의 집에서 살게 됐다. 초등학교에도 입학했다. 초등학교 1학년을 신나게 보냈다. 1년 동안의 내 일과는 늘 비슷했다. 동이 트기도 전에 가방을 메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학교까지 걸어가며 어머니와 함께 경허스님의 <참선곡>을 외운다. 신나게 낮을 보내고 돌아와 108배를 하고, 경을 읽고, 사경을 한다. 삶의 중심은 학교가 아니라 정진이었다. 2학년이 되고 홈스쿨링을 결정했다. 그때는 몰랐다. 홈스쿨링을 시작한 이후로 내가 어떤 고민들을 뚫고 지나가야 했을지를. 내 진짜 수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에로스를 화두 삼아서
2014년 8월 4일 / 제목: 도서관 가는 날
오늘 피아노 학원을 끝마치고 사촌 동생과 작은 도서관에 갔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보았는데 동탁이 왕윤의 꾐에 빠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양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구절이 인상 깊었다. 정말 색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계초심학인문>에 보면 재물과 여색의 재앙은 독사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나는 꼭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 밑으로 들어가 이생에 공부를 끝마칠 것이다.
열두 살에 쓴 일기다. 소위 사춘기가 시작됐다. 절에서만 살았는데 뭘 알았겠나 싶지만 인간의 본능인지 욕망의 행로인지 관심 가는 것은 많아져만 갔다. 당연히 이성도 포함해서. 이후로 꾸준히 저런 내용이 일기에 등장한다. 그 말인즉슨, 나는 꽤나 뜨거운(?) 애였다는 뜻이다. 수행에 장애가 생긴 것이다.
업을 닦아 나간다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한 티끌 꿈과 같은 세상에 살면서 무슨 관심이 이리도 많은지. 순간 나를 보면 공부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바깥에 정신이 팔려있다. 이럴 때면 내 자신이 너무 싫다. 이리 다짐하고, 쓰고, 참회한답시고 한 게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다. (破車不行 老人不修 莫速急乎. 부서진 수레는 갈 수 없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느니라. 급하지 아니한가. 『초발심자경문』 중에서)
열네 살에 쓴 일기다. 뭐에 저렇게 정신이 팔려있었던 건지. 아마 <정도전>이나 <징비록> 등 대하드라마에 빠져 있던 때였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나는 슈퍼 덕질러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그콘서트보다 대하드라마일 정도로 사극을 좋아했다. 역사 공부도 덕질의 일부였다. 소설도 웃기는 방식으로 읽었다. 부모님이 70권짜리 아동 문학 전집을 사주셨는데, 하루는 그중에서 로알드 달의 『마틸다』를 읽고 작가의 스토리 구성력에 반했다. 그 뒤로 로알드 달의 작품만 골라 빼두고 그것만 닳도록 읽었다. 가끔 지루해 못 견디겠을 때만 다른 작가들의 책을 한 권씩 읽었다. 또 추리소설 광인이어서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팽』,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영어만큼은 잘 공부해두길 권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인생 배우(?)도 만났다. 원래 영어는 <프렌즈>나 <모던 패밀리> 같은 미드로 공부하는 게 정석이었으나 내가 미국 문화에 물들까 염려하셨던 부모님의 반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다 <셜록 홈즈>가 드라마로 나왔다는 걸 알고 보게 되었고, 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완전히 빠졌다. 남자를 보고 두근거렸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근데 영어 공부엔 별 도움이 안 됐다. 일상적인 대화 대신 “난 사이코패스가 아니야 앤더슨. 고기능 소시오패스지.” 이런 문장이나 따라 외고 그랬으니까. 나는 한번 꽂히면 질리지 않고 좋아했다.
수행은 해야 되는데, 재밌는 게 너무 많았고 멋진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열다섯 살에 우연히 <노무현 입니다>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저렇게 깊고, 쓸쓸하고, 당당하고, 슬픈 분이 계셨구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이 다가오면 때때로 한숨을 길게 내쉬던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한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형성되었을 질문(‘빨리 물속에 들어가려는 잠수부들을 해경이 막고, 석고대죄해야 할 대통령은 끝내 유가족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철원 고석정에 갔다. 난 남한과 북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왜 우리는 같은 민족이면서 싸워야 하는가?’)을 했던 열두 살의 고민과 역사 공부,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 케미는 강렬했다.
이런 케미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생기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기도와 명상이 재미없었다. 내 삶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큰스님은 종종 중국 방거사의 딸 영조와 마조선사의 조카 장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곤 하셨다. 두 사람 모두 지극하게 수행했고, 크게 깨달았으며, 죽고 살기를 자유 자재했던 어린 여성들이었다. 내 목표는 그런 경지였으나 현실은 진득하게 수행하는 차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열심히 수행해서 이번 생에 결판을 내야 하는데 뭐가 이렇게 산만한지,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자책과 참회와 끓어오르는 열정, 에로스를 화두 삼아 나는 수행을 계속했다.
‘진짜’ 수행할 결심
‘몸은 본래 없는 것! 몸의 요구는 작정을 해서 받아들이지 말 것!’ ‘전생에도, 전전생에도 다 비슷하게 살았다. 연애고 결혼이고 안 해본 게 있을까. 이번 생은 다른 데 관심 쓸 시간이 없다. 항상 큰 것을 생각하자.’ 열다섯 살 일기장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있었다. 마음을 다잡아 관심을 끊고 수행에 집중하려 발버둥을 쳤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시작이었을 뿐. 배우 조승우, 조진웅, 한참 <도깨비>가 열풍이었던 시절엔 공유, 휴 잭맨, YB, 강산에, 국카스텐 하현우…. 다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사람과 영화, 드라마, 음악을 좋아했다. ‘아무리 잘생겨도 모두 꿈이다.’라는 말로는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2018년에는 판문점 선언이라는 설레는 일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통일…. 두 분의 자서전을 읽고, 화창한 봄날 함께 산책하는 남북 정상을 보면서 가슴이 뛰었다. 자주 두근거렸고, 그만큼 산만했다. 봄기운 탓인가, 연애도 너무너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홈스쿨링을 했지, 주위 사람들이 다 스님에 재가자 도반님들이었지 수행하기 참 좋은 조건 덕에 연애할 기회는 없었다.
스물한 살에 감이당에 왔으니, 세 살부터 따지면 절 공동체와 함께했던 햇수는 18년이다.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에너지를 갖고서 나는 어떻게 뛰쳐나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학교에 다시 간다, 혹은 절을 떠나 다른 곳에 새로운 걸 하러 간다는 옵션 자체가 나한테는 없었다. 내게는 큰스님과의 인연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큰스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정진해서 영조와 장설처럼 되는 것. 눈을 뜨고, 꿈을 깨서 스승의 은혜를 갚는 제자가 되는 것. 그 마음이 다른 모든 열정을 눌러 둘 만큼 강력했다. 이것도 일종의 에로스적 힘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독이 됐다. 나는 더 자책하기 시작했다. ‘절에 와서 정진이 아닌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보낸 내가 싫다. 정진이 재미있지 않은 내 경지를 혐오한다.’ 혐오한다니, 이렇게까지 생각했었나 나도 일기를 보면서 놀랐다. 종종 극도의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다. 큰스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추슬러지고, 회복되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게 안 됐다. 망상도 많고, 명상도 잘되지 않고, 스트레스만 받았다. 어째서 한 걸음씩 전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울과 자책에 점점 더 빠져들었을까? 인정 욕망 때문이었다.
2018년 12월 3일
망상이 쉬어지질 않는다. 멈추려고 해봐도 다시 망상에 젖어있는 나를 본다.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망상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큰스님을 뵈며 웃고 있는 날 보면 혐오감이 든다. 한마디의 칭찬을 마음속에서 은근히 바라고 있는 날 보면 기분이 진짜 더럽다. 계속 게으름을 피운다. 명상 시간에 편히 쉬지 못하고 그 시간을 견딘다. ‘언제 끝나지…?’ 하면서 말이다. 한 시간, 그 시간조차 쉬어지지 않는 내 경지가 너무 답답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같이 따라주지 않는 신체에 나는 분노했다. 이런 나를 보고 큰스님이 실망하실까 두려웠다. 늘 예쁨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큰스님은 세 살부터 그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대하시는데도 말이다. 또 이때 나에게는 일종의 위기의식 같은 게 있었다. 모든 게 나와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과도, 절에서의 공부와도 난 멀어져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난 잘하고 있지 못하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꿈을,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자괴감과 두려움, 막막함에만 휩싸여 아무것도 못 하는 인생 살아봐야 뭐하나. 제대로 살지 않을 것이면 그 삶을 이어가지 마라.’ 세상과 멀어지는 게 두려웠고, 그렇다고 절에서도 마음을 다해 공부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 이상 큰스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만으로, 큰스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수행할 수 없다. 내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영조가 되고, 장설이 되고픈 나의 이유를. 다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수행할 결심을 했다. 부모님, 큰스님, 익숙해진 절, 내게 편안한 모든 배경을 다 떠나서도 마음을 곧게 세울 수 있었으면 했다. 무턱대고 열정을 억누르면서 하는 수행, 내면에서 솟구치는 욕망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하는 수행은 그만두고 싶었다.
여의주이자 천국으로 가는 열쇠, 몸
이십 대가 되었고, 감이당에 왔고, 독립을 했다. 시공간이 완전히 바뀌었다. 새로운 시공간에서의 2년여 동안 부처님과 간디, 알렉시스 조르바를 의지해 지냈다. 간디를 처음 만난 건 청년고전학교 수업에서였다. 그때 들었던 곰샘의 강의가 아직도 마음에 뭉클하게 남아 있다. 조금 지나서 곰샘이 ‘마진실 세미나(마하트마 간디: 진리를 실험하라!)’를 여셨다. 곰샘 강의의 여운 반, ‘친구들과 간디 공부해서 인도 여행 가야지!’ 하는 생각 반으로 세미나를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간디한테 그렇게 빠져들 줄 몰랐다.
간디 공부를 하면서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산만하게 뻗쳐가던 생각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재작년에 글을 쓰면서 할머니의 부재로 인한 슬픔,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마음을 배웠다. 나의 정열을 죄책감을 갖고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을 자책으로 받아 안지 않게 되었다. 단 한 조각의 이로움이라도 세상에 건네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신념이 생겼다. 십 대의 시간을 간디의 마음으로, 간디의 걸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그게 큰스님이 바라셨던 것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약간 남는다.
간디의 걸음걸음을 이루는 건, 앞으로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테지만, 간디의 수정구슬 같은 투명함, 정직함, 단호함, 꾸준함이다. 인도 민중의 아버지로서 독립을 이끌었던 마하트마의 위대함보다 내게 더 큰 감동을 주었던 건 간디의 그런 면모였다. 알면 알수록 얼마나 인간적인지, 어릴 적 위인전을 읽고 받았던 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직접 고백하듯 오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간디가 위대한 영혼인 이유는 무오류의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실수하고 잘못을 범한 뒤에 그가 밟아가는 스텝이 간디를 위대한 영혼이게 했다. 잘못을 낱낱이 까발리고, 그런 마음 씀을 단호하게 끊어내고, 온갖 영역에서 진리 실험을 하며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 마음을 이렇게 쓰고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간디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다양하다. 사탸그라하(진리 실험), 아힘사(비폭력), 아파리그라하(무소유), 브라마차르야(금욕), <바가바드 기타>, 봉사, 양생 등등. 이 중에서 나는 작년부터 ‘브라마차르야’에 꽂혀 있었다. 이 모든 키워드 가운데 간디의 디테일을 엿볼 수 있는, 그의 하루하루와 가장 밀접한 주제인 것 같아서다. 금욕하라는 말이 어째서 그렇게 이어지나 의아할 수 있다. 간디의 이 말이 약간의 스포일러가 되어줄 것 같다. “육신은 때때로 라트나친타마니(여의주)로 불립니다.” (간디 전집 3권, 『비폭력 저항과 사회변혁』, 라가반 이예르 엮음, 허우성 옮김, 나남, 578쪽) 간디의 브라마차르야는 내 몸을 여의주처럼 쓰는 것이다. 여의주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다 이뤄주는 보배다. 불교에서는 마음, 혹은 불성(佛性)을 여의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간디의 브라마차르야는 육신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회복해 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육신이 여의주라고 불릴 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는 상태 아닐까. 몸 자체가 자유로운 마음의 투영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걸 다 이뤄주는 몸. 몸과 마음의 완벽한 일치됨. 자유. 간디의 브라마차르야는 자유와 동의어다.
그동안 내게 육신은 족쇄 같은 거였다. 온갖 정열의 도가니, 수행을 방해하는 원수, 언젠가 사라질 무상한 것, 극복해야 할 것…. 브라마차르야는 이런 금욕과는 엄연히 다르다. 무턱대고 욕망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정열에 지배당하지 않고 정열을 사용하는, 여의주–되기의 과정이다. 그래서 간디에게 브라마차르야를 실천하는 문제는 ‘흰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이’ 어려운 한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다.
간디 공부에 한참 빠져 있던 와중에 ‘씨드북 세미나’에서 조르바를 만나게 됐다. 조르바는 간디와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두 사람의 결이 매우 달라서 신선하고 재밌었다. 간디의 수행법이 보석을 정제하는 오밀조밀한 과정이라면, 조르바의 방식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현무암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대지와 만나는 느낌이랄까. 조르바는 한마디로 화끈한 사람이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춤추고, 연주하고, 일을 하는데 그 행위 하나하나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먹을 때 그의 마음은 앞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는 육반이 된다. 마실 때는 포도주가 되고, 사랑할 때는 여자가 되고, 일할 때는 갈탄광이 된다. 영혼과 육신의 완벽한 일치! 간디의 브라마차르야와 만나는 지점이다. 조르바는 말한다. 육신은(정확하게는 성기에 대해 말했던 부분이지만 지금은 육신으로 퉁치기로 한다) 장애물이 아니라고. “그건 천국으로 가는 열쇠라는 걸 왜 모르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9쪽)
세미나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반응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막혔던 숨이 뻥 뚫리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는 쪽, 여성을 ‘암컷’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이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다는 쪽. 그러나 이건 그저 한 단면일 뿐, 조르바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마초가 아니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면모 뒤에 숨어있는 조르바의 섬세함과 따스함을, 큰 연민의 마음을 갈탄광에서 석탄을 캐듯 조심스레 발굴해나가고 싶다. 하나 분명한 건 한평생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세상을 만끽했던, 영혼의 충만함과 육신의 즐거움이 일치된 조르바의 자유는 마초로 불리는 사람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여의주, 천국으로 가는 열쇠.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육신을 떠나야, 정열을 버려야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몸도,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온갖 정열도 다 쓰기 나름이다. 자유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다.

에로스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
다시 에로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연애도 한번 한 적 없는 내가 에로스(성욕)를 주제로 글을 쓴다니?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나도 갸우뚱? 했다. 사실 지금도 이 주제를 데리고 앞으로 마주할 꼬부랑길을 잘 해쳐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나. 하고많은 주제 중에 ‘브라마차르야’가 눈에 들어온 이상, 에로스의 화신인 조르바에 매료된 이상 에로스는 내 운명이 됐다. (씁쓸하게도) 나의 에로스가 연애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열정의 기반이 에로스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다 부질없다고 되뇌며 어떻게든 떨구려고 애썼던 에로스-욕망을 이제는 마음에 잘 간직한 채 길을 떠나 보려고 한다.
간디와 조르바는 사랑 장인들이었다. 에로스를 빼놓고 두 사람을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 키워드다. 간디의 경우 정말로 사랑했던 아내, 카스투르바이가 있었다. 인도의 바푸 간디가 질투 많고, 의심 많은 남편이었다는 게 믿기는가? 간디는 자신이 카스투르바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낱낱이 고백해뒀다.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아내를 사랑하다가 삼십 대 젊은 나이에 금욕 맹세를 했다. 도대체 어째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조르바의 경우에는… 첫째 부인, 둘째 부인, 오르탕스 부인, 수많은 부인이 있었다. 조르바도 처음부터 호탕한 자유인은 아니었다. 전쟁에 참여해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고, 사람을 암살하는 장면은 오싹할 정도다. 독립 정신 투철하던 청년은 어쩌다 과부 전담 카사노바가 되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국도, 이념도 다 버리고 에로스의 달인으로 존재를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 걸까?
여기에 더해 간디와 조르바가 알려주는 사랑법도 너무너무 궁금하다. 사랑은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지만 사랑 장인들의 노하우인데, 있어서 나쁠 거 하나 없다! 역시, 재밌는 주제인 만큼 할 이야기가 많다. 이번 여행에서 육신이 여의주가 되고,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한층 더 회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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