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천 개의 길을 품은 대지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 순수한 것은 없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되도록이면 또래들과 역사를 함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내 또래들에게 역사는 그렇게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다. 왜 그럴까? 사실 나 또한 ‘역사’에 시큰둥했다. 돌이켜 보면, 무조건 암기해야 된다,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고리타분하다 등등의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유명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에 대해서도 유통기한이 지난 민족주의적 발언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때는 이미 어떤 ‘역사’가 전제돼 있다. 청년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할 때의 ‘역사’란 일반적으로 ‘한국의 역사’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다. 학교에서 공부한 역사는 ‘나’라는 존재를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설명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숨쉬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숨에는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내가 이렇게 ‘한국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외세에 맞서 민족의 얼을 지킨 위인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단군에서부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 장보고, 이순신, 유관순 등등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도 이렇게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 이런 식의 역사는 혈통적이고 가족적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고 길렀던 것처럼 선조들의 희생이 지금 우리의 삶을 가능케 했음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학교 교육에서 배운 역사는 ‘우리’를 선조로부터 혈통과 얼을 물려받고, 다시 그것들을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계승자처럼 규정한다. 자식을 낳고 더 번성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이민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가족을 만들어 후손을 남기는 것에도 별 생각이 없다. ‘우리’의 친구들은 민족과 국적을 뛰어넘어 다양한 피부색을 가지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무대는 더 이상 ‘나라’와 ‘민족’이 아닌 세계인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한국’과 ‘민족’이란 단어는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때문에 기성세대가 역사를 통해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강요할 때는 저항감마저 생긴다. 나와 내 또래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 역사는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할수록 순수한 혈통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순수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유럽인’조차 그들이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야만인들과 섞임으로써 태어난 정체성이다. 9~13세기 동안 ‘유럽’으로 인식되는 문화적 경계선은 수시로 변형되고 있었다. 노르만인과 무슬림, 헝가리인 등등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이라 불렀던 자들과 교류하고, 동맹을 맺는 가운데 ‘유럽’의 범위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라는 전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여러 대륙과 문화를 아우르는 ‘세계’라는 심상은 13세기 몽골인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현재 독일의 라인강에서부터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덕분에 거의 모든 문화권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었고, 광범위한 관계망 속에서 유례없는 섞임이 일어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이처럼 국경과 민족이 세워지기 전부터 섞이고 있었다. ‘단일민족’으로 여겨지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 옛날 한반도의 일부였던 고구려는 중국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여러 부족민들의 나라였다. 근현대를 거치면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우리 또한 여러 피가 섞이며 지금 이곳에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순수한 혈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역사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면, ‘순수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는 혼란함 그 자체다. 역사적으로 존재는 서로에게 예상치 못한 영향을 주고받고 낯선 곳으로 이동하면서 변이를 반복했다. 역사를 서술할수록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과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역사 서술이란 인식의 혼란스러움을 즐기는 지적 유희일 수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는 분명 다른 어떤 학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심미적인 즐거움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에 이끌리는 것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학문적 작업 이전에 그곳으로 인도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추구하고 밝혀야 할 ‘하나’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과 무관하게 심미적 즐거움 때문에 역사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증명해주기보다 우리가 알고자 했던 것을 뒤집는다. 전자가 정형화된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후자는 정형화된 앎들을 부수며 자발적으로 혼란스러움을 만끽하는 좌충우돌의 운동이다. 블로크가 말한 역사란 전자보다 후자에 더 가까웠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명확한 답을 알고자 역사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움을 경험하며 역사를 탐구하게 된다.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역사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사기(史記)》를 읽으면 사마천(司馬談, B.C 145~86)도 혼란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역사를 서술하는 동안 심미적 즐거움을 함께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도저히 한 사람이 썼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광범위한 시공간과 다양한 삶을 다룬다. 그의 시선은 먼 신화시대에서부터 자신이 숨 쉬고 있는 당대에까지, 황제에서부터 일개 평민에까지 거의 모든 곳에 닿아 있다. 물리적인 거리는 역사를 쓰는 데 방해되지 않는다. 수백 년 전의 일도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서술했다. 정말 그 인물이 된 것처럼, 그 시대에서 살아 숨쉬는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또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면서, 모르는 것에 향해 이끌리는 본능 때문에 이렇게 쓰게 된 것 아닐까?
《사기》에서는 한 인물과 시대에 대한 상(相), 사건의 중대함과 윤리적 선택 등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한 편에서는 강대하고 표독스러웠던 권력자가, 다른 편에서는 새로운 인재들의 눈치를 볼 만큼 유약하게 그려진다. 온 몸을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개혁을 단행했던 인간이 속 좁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었던 시대적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촛불이 일렁이는 정도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의미 같은 건 역사 서술을 통해 얼마든지 깰 수 있다. 아마도 사마천은 《사기》를 서술하면서 세계와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혼란스러움을 경험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2.역사로 체험한 ‘세계’
(…) 이리하여 그 사서(史書)의 문장을 차례대로 논찬하게 되었다.
그후 7년째 되던 해,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이에 깊이 탄식하며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쓸모가 없어졌구나!”라고 말하였다. - 사마천,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은 자신의 글쓰기를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말했다. 분(憤)이란 글자는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분’은 혼자서 어떻게 삭이지도 못하고, 해결할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다. 사마천은 이런 ‘분’에 기반해서 역사를 썼다. 그의 ‘분’이 무엇이었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릉의 화(李陵之禍)’라는 사건을 살필 필요가 있다.
전말은 이렇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B.C 156~87, 즉위: B.C 141)의 치하는 중국 역사 최초로 중국 바깥을 정복하는 시기였다. 무제는 수많은 장수를 보내 중국 밖을 지배하던 유목민(특히 흉노족)과 싸우도록 했다. 그 중에 ‘이릉(李陵, B.C ?~ 74)’이란 걸출한 장수가 있었는데, 적은 수의 병력으로 흉노의 대군과 싸우다 항복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충심으로 이릉을 변호하고자 했는데, 그만 그 과정에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후 이릉이 흉노에 항복한 것도 모자라 벼슬을 받고 병법을 가르친다는 소문까지 들리자, 무제는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당시에는 사형을 대신할 방법이 두 가지 있었는데, 50만전이라는 거금을 내거나 궁형(宮刑)이라는 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돈이 없었던 사마천으로서는 사형과 궁형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기존의 삶을 넘어가기를 요구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사형을 모면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한 남자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한 명의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남자가 얼마나 비참하게 취급받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궁형을 받을 바에야 사형을 택할 정도였다. 하지만 섣불리 사형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마천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역사 편찬의 작업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을 맡았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조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조상들의 업(業)을 이어받는 것은 존재를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치욕을 무릅쓰고서라도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역사가로서의 소명을 마무리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지킴으로써 동시대인으로 남을 것이냐. 단순히 생과 사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는 힘을 감당해야 한다.
《사기》를 읽을 때마다 사마천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게 된다. 결국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지만, 조상 대대로 이어진 유서 깊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치욕을 안고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치욕을 치욕인 채로 남겨두면 살아갈 수 없다. 치욕을 안고 살기로 한 건 어디까지나 치욕보다 더 강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욕을 감당하자. 대신 역사를 정리하고, 글을 쓰자. 하늘 아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운명을 탐구하고, 어떤 운명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덕(德)을 기록하자. 이제 중요한 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다. 어떻게든 치욕스러운 삶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치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관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역사 쓰기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만 했다.
이러한 고민은 사마천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궁형을 통해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지만, 동시에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당한 일을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운명적으로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작업은 이전까지 그가 알고 있던 상식과 믿음, 윤리적 가치, 도덕적 규범 등을 고수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주파하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낯설게 보아야 했다. 그러한 여행의 무대가 바로 역사였으리라. 역사 속에는 자신이 경험해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못했던 삶, 상상은 해봤으나 결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 삶 등등 기존의 사고로는 인식할 수 없는 삶들이 즐비했다. 그는 이런 삶들이 가득한 과거를 여행하며 세계를 부수고, 새롭게 건설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그가 어떤 세계도 그대로 믿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세계’를 만났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발분저서’를 ‘글쓰기를 통해 만끽한 자유의 책’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이 자유는 결코 낭만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처절함을 맛본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처절함 속에 두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모습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사마천을 통해 배웠다. ‘분’함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분’한 자에게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한 번 ‘분’하면 마음의 시야는 더없이 좁아지고, 작은 사건에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분’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운 삶의 출발점에 설 수도 없다. 사마천은 ‘분’했기 때문에 역사를 썼고, 《사기》의 많은 부분은 그의 마음이 ‘분’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역사를 쓰는 동안 그의 마음이 ‘분’함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음을.


3.‘분(憤)’할 때는 역사 공부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도 어떤 ‘분’함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사마천처럼 형벌을 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막한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마천과 지금 우리는 ‘분’함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몸,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비루하고 쓸모 없어진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됐다. 《사기》를 완성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결심했다고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결심한 그 자리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앞날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이렇게 살고는 싶지 않다. 잘살고는 싶지만,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너무나도 지겹지만, 그것 외에 어떤 키워드로 기존 정치를 넘어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전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구체적 목표를 향해 살아왔지만, 지금 우리 세대는 딱히 뚜렷한 목표가 없다. 어떻게 보면 문제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지만, 또 다르게 보면 어떤 것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삶의 지향점, 목표, 해결해야 할 문제, 정체성,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 이것이 지금 청년들이 앓고 있는 ‘분’함의 모습이다.
‘분’함을 겪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모습은 사실상 거의 비슷하다. 분노와 체념과 무기력. 누구는 지금 자신에게 이런 불확실한 삶을 물려준 부모세대를 원망하기도 하고, 누구는 더 노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만이 ‘분’함을 해소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관적으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연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지쳐버린 사람들은 그만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삶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저 묵묵히 견디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말은 공허하고 반동적이다. 이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길이 있을까?
사마천이 역사를 통해 ‘분’함을 능동적으로 발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분’함에 매몰되지 않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내게는 역사가 그런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드넓은 대지다. 흔히 역사를 ‘과거’를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복잡한 힘들을 가로지르며 살고 있다. ‘지나온 것들(歷)을 서술하기(史)’. 나는 역사를 탐사하면서 ‘나’를 가로지르는 힘들, ‘나’를 통해 드러나는 복잡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삶은 언제나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주변과 더불어 바로 설 수 있었다. 국경 밖의 존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뿌리를 공유하는 친척들이었고, 배경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지형과 기후는 마음과 의지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 삶은 이렇게 펼쳐질 수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한, 그러나 분명 ‘나’를 있게 한 역사를 보면서 가끔 ‘나’의 개체적 삶이 세계라는 전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마천에게 역사는 자신이 살았을지도 모를 수많은 시간들이 잠재한 무대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르게 살았던 사람들, 다른 조건 속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비루한 삶이 다르게 이해될 수 있음을 믿었다. 사마천은 비록 역사를 쓴 것 외에 달리 한 게 없지만, 역사를 썼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체험했다. 나는 사마천을 읽으면서, 역사를 탐구한다는 것은 현재를 다르게 이해하고, 그리하여 미래를 다르게 그려내는 일이라는 것을 배운다. 우리 또한 사마천을 따라 역사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지금 우리를 막막하게 하는 이 세계 자체를 다르게 만날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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