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를 헤매는 마음의 여로
미영(B움)
1. 엄마의 카톡문자
“우리 딸, 날씨가 춥다. 오늘도 조심해라~ 사랑한다.”
팔순 노모가 내게 보내온 카톡 문자이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스마트폰의 기능을 배우시더니 지금은 SNS를 통해 이곳저곳에 먼저 안부를 전하고 계시다. 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운동법이나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좋은 말들이지만, 종종 정치 찌라시 같은 글도 섞여 있다. 투박한 사투리로 시시콜콜 살림살이를 참견하던 시골할머니가 갑자기 강렬하고 노골적인 정치언어를 구사하는 투사가 되셨다. 언제 이렇게 변하셨지? 코로나시기에 좋아하는 운동도, 배움도, 모임도 다 단절된 상태에서 집안에서 TV채널만 돌려보신 탓일까. 케이블TV와 종편방송에서 끊임없이 노출되는 뉴스나 시사토론을 시청하시니 정치평론가와 다름없는 말빨도 생기셨다. 괴로운 일은 자식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엄마의 철저한 사명의식을 대하는 거다. 한 식구가 순식간에 사는 지역에 따라 편다툼으로 변하는 상황은 이미 수차 겪은 터, 모처럼 모여 화기애애한 집에서 뉴스를 틀면 불화와 불통에 불이 붙는다. 전쟁과 강력한 흑백논리의 이데올로기 시대, 허리띠를 졸라맨 경제성장의 시대에 가족을 지키며 살아내신 엄마의 경험은 그런 사명감을 강화한다. 심정적으로는 현실정치에 관한 논란을 떠나서 노년의 엄마가 이런 활발한 열의와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관계를 맺으시고,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 거라고 이해하고 싶다. 새로운 디지털매체는 문자에 익숙하지 않았던 부모님들까지도 온라인 사회적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여 의식을 변화시킨다.
당신보다 가방끈이 긴 자식들의 결정을 믿고 따랐던 예전과 달리 엄마는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말을 진리처럼 맹신한다. 건강관리, 노후설계, 황혼부부의 대화법까지 확실한 경력을 지닌 전문가의 권위를 믿으신다. 하긴,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예전 같으면 어른들이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을 일들을 유튜브나 구글링을 통해 답을 찾는다. 이 ‘인플루언서들’은 학위와 자격증의 전문가이기보다 재야에서 인정한 고수들이다. 너덜너덜한 요리백과 대신 수많은 유튜버가 알려주는 요리정보를 따라 집앞 배송 상품으로 음식을 해먹는다. 시장에 나서는 엄마의 발걸음처럼 나의 손가락은 인터넷 세상에서 검색과 검색, 클릭과 클릭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미 단순한 정보사회를 넘어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온갖 기술이 집적된 매체의 변화과정은 개인의 마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매체의 변화에 나 자신도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것 같다. 나는 매체들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 것일까? 어떤 변화에 마주한 것일까?
2. 매체, ‘나’를 만들다
‘자기’는 낱말과 기억, 생각과 역사, 거짓말과 서술 등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문자적 구성개념이다. 구술 시대 구전 서사시와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서술과 자기는 서로 떼어놓기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자기의 일부처럼 자아낸다. 20세기의 시민은 갖가지 과학의 눈을 통해 자기를 글월이 켜켜이 쌓인 케이크처럼 바라본다. 18세기 이후로 국가는 신문 대상이 된 자기들의 집합체가 되었다.(이반 일리치,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113쪽)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지만, 구술문화에서는 낱말로 구성되는 자기를 연결하는 연속성을 갖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신체조차 ‘나의 팔, 나의 가슴’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오래된 신화나 전설처럼 구전되는 서사시는 누구도 똑같이 반복할 수 없는, 시인의 즉흥적 노래다. 대상을 마주 보지 않으면 무엇을 전달하는지 알 수 없던 그들에게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세밀한 감각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삶은 자연환경에 의해 규정되는, 그 안에서 소통한 결과였을 것이다.
자신을 규정하는 ‘나’라는 소유의 형식을 갖는 주어, ‘자기’라는 개념은 문자문화의 구성물이다. 주고받은 낱말은 기억과 생각의 저장소를 거치며 과거의 경험을 현재와 연결한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언어로 해석된다. 자연에서 인간을,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남자와 여자를, 신분별, 인종별 각각의 계열에 따라 구분하고 분리하는 과정은 기존의 익숙함을 뒤흔들었다. 18세기 이후 근대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응답을 한편으로는 교화적으로, 한편으로는 폭력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존재를 ‘개인’이라는 고립된 유형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진보 내지는 문명화라고 배웠고, 그 결과물이 바로 근대적 주체인 ‘나’다. 나는 문장의 주어다. 나는 생각의 주인이다. 고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나’는 수치화된 정보로 기술된다. 맞은편에 앉은 의사는 컴퓨터로 데이터를 스크롤하며 검사기록지에 눈을 맞춘 채 무감한 어조로 말한다. “지난번 간수치보다 이번에 수치가 좀 올라갔네요. 그리고 담낭에 뭐가 좀 보입니다. 다시 검사하고 결과를 보지요” 신체 진단기록은 내가 어떤 몸인지 알려준다. 학교에서는 나의 성적표가, 회사에서는 실적분석표가, 은행에서 신용평가서가 나를 설명하는 문서들이다.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통과의례를 각종 인장이 찍힌 증명서가 대신할 만큼 우리는 투명하게 기록된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하늘에 진실을 맹세하던’ 시대는 아득한 전설처럼 멀다. ‘붙잡아 꼬챙이에 꿸 수 있는 특정개구리’의 허파와 힘줄, 혈관을 샅샅이 해부하듯 분명하고 확실한 삶의 방식이 문자시대의 정답이다.
‘컴퓨터도 없는데 어떻게 살았어요?’라며 스마트폰 키즈들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며 묻는다. 흑백의 시대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화려해진 80년대 컬러텔레비전은 인쇄 출판물과 함께 확실한 지식과 교양, 정보, 오락기능까지 담았다고 여겼다. 모든 경기를 다 챙겨볼 정도로 프로야구 열기는 입시열기보다 더 뜨거웠었고, ‘필! 본방사수’ 드라마로 전국민이 귀가를 서둘렀던 만큼 보고, 듣고, 느끼기에 열심이었다. 나 자신이 대중미디어의 일방향적 정보전달의 이미지를 향유하는 수동적인 문화소비자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 동일성으로 교육, 문화, 정치, 경제발전 등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었다는 것도.
지난날의 문화적 향유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일방향적 메시지에 순응하는 신체가 되거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보를 비판하는 양자택일에 놓인 개인의 삶이었다. 그런다 달라진 매체 환경 속에서 나는 혼돈스럽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3.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나는 어디에?
첨단기술 매체인 디지털네트워크 미디어는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 나와 소통하는 대상은 기계시스템이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내가 보는 것은 이미 알 수 없는 수많은 데이터 처리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다. 시간과 장소의 한계 없이 다방향의 새로운 정보로 관계를 맺으며 세상 모든 일에 접속할 수 있다. 일리치와 푸코의 저술을 세세히 검색할 수도 있고, 온라인 공부네트워크로 배움을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쇄물과 영상미디어라는 매개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살아왔지만, 현실의 나는 데이터를 보유한 기계와 한 몸이 된다. 데이터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나의 욕구를 더 잘 알아채고 알고리즘을 연결해준다.
딸의 애플워치는 본인이 밤낮으로 자동 제공한 정보가 빅데이터에 연결되어 현재 건강상태를 알려준다. 스트레스지수, 심박수, 운동시간, 수면의 질까지. 자고, 걷고, 웃고, 화내는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이 데이터로 취합되어 정보화되면서 명령기호를 전달한다. 그렇게 제공받는 데이터로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하고 운동을 더 하든지 잠을 더 자든지 판단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데이터의 명령이라 해야 할까, 연결활동이라 해야 할까? 신체는 급기야 기계와 한 몸이 된 것이다. 이제 웨어러블 기술과 디지털 네트워크 매체는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주체가 자기존재를 확인하고자 했던 문자시대의 정체성과 다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일까?
근대가 말과 글이 관계를 지배한 시대라면,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는 각종 SNS,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동영상 이미지 등 관계를 규정짓고 연결하는 통로가 다양화되었다. ‘나’는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인다. 위계없는 정보가 흐르는 자유로운 공간인 만큼 익명으로 개별화되기도 하고 또 다른 형태의 탈중심화된 집단도 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디지털매체를 통한 접속으로 자기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적극적 수행과정’이라 여겨야 할지, ‘중심 없는 부유상태’라 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
스마트폰 유저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이나 확장’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반면에 기계에 의존함으로써 기억력, 수행력, 상상력, 친밀함, 등 각자의 특유한 감각능력이 상실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움의 이유는 뭘까. 아직도 ‘나’라는 인간 주체의 우월적 확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여전히 같은 맥락으로 진보와 발전에 기계화된 인간의 자기상실을 비판하는 인간다움-휴머니즘적 의식이 뿌리깊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더 이상 인간중심의 동일자적 사유로는 세상의 변화에 직면할 수 없을 것 같고, 낡은 사고를 붙잡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확실한 것은, 이미 50대 중년인 나의 일상에서조차 스마트폰은 신체화되었고, 90세의 친구 아버지에게 ‘지니’는 말벗 친구이며 119 SOS연결자라는 사실이다. 디지털네트워크와의 관계가 인간유기체의 감각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일리치가 과학을 위한 과학, 어떠한 윤리적 방향성도 갖지 않은 맹목적인 기술개발을 ‘프로메테우스적 부끄러움’이라 비판한 바를 되새기고 싶다. 내가 원하는 삶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서로 더불어 도우며 사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내게는 또다른 명령기호로 읽힌다. 교묘하게 ‘더 나은’이라는 계산기가 작동되면 삶에서 자율성을 잃고 시스템에 예속된 채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길을 잃게 된다. 매체가 선사하는 편의성과 효율성이라는 유혹에 예속된 신체는 자기의 확증편향적 선택을 스스럼없이 행사한다.
현대과학기술의 총화인 디지털매체는 이미 우리의 인식과 존재를 구성하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일부다. 한 순간에 생각하고 느끼고 보는 모든 감각을 작동시키는 접속이 일상화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나는 디지털의 메커니즘이나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습관이 나의 세세한 일상까지도 수동화된 사고방식으로 굳어버리게 하진 않을까 두렵다. 밝은 미소로 인사하는 대신 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바쁜 세계와 접속 중이라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들에 도리어 무관심해지는 것은 아닌가. 복잡한 발생과정을 따져보기보다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가. 일리치가 ‘인공두뇌를 모형으로 삼는 세계, 컴퓨터를 감각 지각 뿌리 은유로 삼는 세계가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소란스러운 정보의 세계 속에서 속단은 위험하다. 주체의 의지가 사라지고 있는 공간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예민하게 되물어야 한다. 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에 의해 즉각 변형되어버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새로이 출현한 것들, 내가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저 소수의 새로운 것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예리하게 단련시키고 싶다”(263,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는 일리치의 마음을 되새긴다.
일리치가 12세기로 돌아가 옛 글월을 회상했던 이유는 과거와 단절되어버린 듯한 21세기 현재의 삶을 끌어안기 위해서였다. 새롭게 출현한 낯선 것과 적극적으로 만나기 위해서였다. 매체변화의 가속도에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맞추느라 조급하고도 불안했던 나의 마음을 발견했으니, 이 마음을 마주하고 나의 리듬과 방향성을 만들면서 걸어가면 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나에게 기꺼운 인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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