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노년을 위해
글 / 경혜
(노는 게 젤 좋지만 어쩌다 시작한 공부에 매달려 있는 중입니다.
공부하면서 만난 학우들과 여러 인연으로 만난 지인들 덕분에
독락(獨樂)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동락(同樂)의 맛을 알아 가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일했는데 또 일을 하라구?
“휴, 이제 끝인가?” 시어머니 장례 잘 치르고, 아이가 무사히 군대를 제대하고, 동생 병수발과 장례까지 다 마무리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아이 키우고 매일 식구들 먹을 음식하고, 청소하고, 시어머니 보살피고, 온갖 자질구레한 집안 대소사 챙기고, 직장 다니는 남편 뒷바라지하고, 때에 맞춰 휴가를 반드시 가야만 하는 남편에 맞춰 휴가도 다녀야 했던 수많은 집안일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남편이 슬그머니 제안을 하나 해 왔다. 노년을 위해 적게나마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집안일이 줄었으니 남는 시간에 돈을 좀 벌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수시로, 슬쩍슬쩍 내비쳤다. 연금을 받으면 몇 살부터 얼마를 받을 수 있는데 그걸로는 풍족하지 않으니, 모을 수 있을 때 당신도 취업해서 같이 모아 놓으면 좋지 않겠냐는 취지였다. 그러면 노후에 편안하게 여행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하고 블라블라......
결혼하고 지금까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림만 했으니 말 그대로 ‘전업주부’로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내 경우, 다른 가정주부들이 겪었다는 모욕과 차별, 비하를 거의 겪지 않았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적어도 돈을 벌어오는 노동과 가사노동은 그저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서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정도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사가 줄었다고 해서 갑자기 일자리를 얻어보라는 얘기를 들으니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가사노동을 임금을 받는 일보다 못한 것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40세만 넘어도 여성들을 쓰고자 하는 일자리 자체가 거의 없는데, 만약 있다 하더라도 노후를 준비한다는 목적에 맞는 정도의 보수를 받기는 요원한 일인데, 도대체 어디 가서 어떤 일로 돈을 벌란 말인가?’
가까운 동네 마트나 대형 계산대, 백화점 매장들뿐만 아니라 방문 학습지 등등 멀고 가까운 많은 곳에 고용되어 일하는 중년여성들은 많고도 많다. 가사노동에 임금이 없다는 이유, 거기에 더해 직장에 다니는 게 더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취업을 하도록 만드는 계기다. 계속 직장을 다니다가 얼마 전에 일을 그만두고 함께 공부하는 분께서 공부를 하는 건 좋은데 돈을 안 버니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 같아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돈을 버느냐 벌지 못하느냐가 사람의 쓸모를 가누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척도로 사용하는 게 마땅한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살 수 없다. 살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을 버는 방법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대대손손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어딘가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일당이든 주급이든 월급이든 노동과 임금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임노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고용되지 않고 다른 ‘활동’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생산성이 반드시 임금과 맞바꾸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냐 묻는다면 어떨까?
일리치는 산업사회를 구성하면서 새롭게 가치를 부여받은 임노동과 정반대로 모든 면에서 쓸모없다고 평가된 존재를 위한 여러 활동(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 노동에 대한 가치 평가도 그중 하나다. 그렇다면 지금 매겨진 가치에 대해 뒤집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월한 임노동자와 열등한 그림자 노동자들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나에게 노동은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돈으로 환원되는 경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노동이나 활동을 사유할 수는 없을까? 일리치를 읽는 일은 바로 그런 사유를 해 보는 일이라 여겨진다.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
상품집약적 사회에서는 임금 노동의 생산물을 통해서만 기본적 필요가 충족된다. 이점에서는 주거와 교육이 다르지 않고 교통과 분만이 다르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는 직업윤리마저도 임금을 받는 고용만을 인정하고 독립적으로 먹고 사는 행위는 폄하한다. 그러나 임금노동의 파급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급 노동을 두 유형의 상반된 활동으로 갈라놓기까지 한다. 임금 노동이 예전의 무급 노동 영역을 잠식해온 현상은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새로운 종류의 무급 노동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줄기차게 외면당해 왔다. 즉 산업노동과 서비스에 대한 보완물로서의 강제 노동 또는 산업적 예속은 산업 체제 밖에서 이뤄지는 자급자족적 노동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27~28쪽, 사월의책)
일리치는 근대 이후 만들어진 산업사회를 ‘상품집약적’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무슨 뜻일까? 돈을 주고 거래되는 생산물을 통해서만 살 수 있도록 거의 모든 사회 구조가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산업사회가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은 “500년에 걸친 전쟁”(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224쪽, 사월의책)이다. 산업사회의 형성 초기에 가장 큰 문제는 자본도 공장도 기계도 있는데,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중세를 넘어온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매일 공장에서 일하고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이들이 노동자가 되었는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공장에 가서 기계 부품처럼 몸을 쓰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과정이 필요했다. 바로 폭력이다. ‘매일, 공장에서, 노동하는 몸’으로 바꾸기 위해 온갖 억압과 폭력이 가해졌던 기나긴 시간들, 화폐를 이용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운 사회 구조로 만들고, 돈을 벌고 써야 살 수 있다는 인식을 새겨 넣는 시간들, 이를 통해 노동자가 만들어졌고, 생산, 노동, 소비라는 틀을 갖춘 근대 산업사회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각자가 해야 할 만큼의 일을 하고 생산물을 얻는 생활 방식은 모두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했던 각자의 ‘자기 일’은 획일적인 임노동으로 대체되었다. 여성이 겪은 폭력은 이중적이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적극적으로, 심지어 남성을 이끌며 대항했지만 결국 임노동자가 된 남성을 보완하는 가정주부, 즉 그림자 노동자라는 자리로 내몰렸다. 우월한 임노동을 하는 남성과 이를 보완하고 보조하는 여성이라는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알고 나면 여성들이 가사노동이 아닌 임노동을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열등한 노동에서 벗어나 얻어낸 독립이라거나 진보라고 여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보자. 여성이 집 밖에서 일자리를 얻고 취업하게 되면 ‘가사노동’이라는 ‘비루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집안일은 노는 일, 돈을 못 벌면 무능하다는 생각은 왜 그토록 당연하게 여겨져 온 걸까? 돈을 벌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임노동에 ‘기대어’ 산다는 압박을 느꼈던 순간에, 나 또한 ‘돈을 안 벌면 쓸모가 없다’는 생각에 동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부담 혹은 죄책감을 불어 넣고 있는 건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우월 아래 있는 이 사회가 가진 당연하고 보편적인 전제들 아닐까?
3. 그림자는 또 다른 그림자를 낳고
산업적 양식을 정착시킨 임노동은 남과 여라는 두 가지 성을 우월한 노동자와 그를 보조하는 노동자로 나누고 고착시켜 왔다. 가부장제도 아래 여성이 남성에게 핍박받고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했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산업사회에 반드시 있어야 했던 존재인 임노동자에 맞추어 여성이 그림자 노동을 할당받게 된 과정과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근대 산업사회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 자연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보살피는 이와 보살핌을 받는 이들 양쪽 모두가 능동적인 활동들, 마음이 깃든 수고로움으로 오가는 모든 활동들을 ‘덤’으로, 즉 2차 노동으로 전락시켰다. 직장인이 있는 집에서는 대개 비슷한 매뉴얼, 비슷한 패턴으로 임노동자를 보조하는 그림자 노동이 필수적이다. 음식, 청소, 빨래, 육아가 임노동을 더 잘하도록 하는 일에 불과할 때, 가사노동에 주부가 창의성을 발휘할 부분은 없다.
그림자 노동에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급여는 회사 혹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어딘가에 고용되어 정해진 일을 하고 그 댓가로 받는 돈을 뜻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는 당연히 집에서 주부들이 하는 노동은 급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노동자가 받는 급여는 무급의 그림자 노동이 있기에 가능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임노동자가 집 밖에 나가 일하는 동안 누군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 식구들 먹을 음식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집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집 밖 노동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생각해 보면 ‘무급 노동’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알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한 일’은 집 안과 집 밖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노동을 보완하는 다른 모든 노동들은 그림자 노동이다. 경제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상품을 만들 뿐 아니라 그 상품을 유용하게 만드는 활동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림자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더해 점차 ‘돈을 받는 노동’으로 바뀌고 있는 다른 일들, 즉 육아, 가사 대행, 노인 돌봄은 그림자가 낳는 또 다른 그림자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일리치에 따르면 그림자 노동은 급여를 필요로 하지 않던 일들이 경제화되는 곳에만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산업사회 이전에 여성이 하던 집안일과 산업적 생산양식으로 만들어진 사회에서 여성이 하는 가사노동은 전혀 다른 것이며, 급여를 받을지라도 서비스가 되고 고용 노동으로 바뀌어 허드렛일로 전락한 돌봄, 노인 부양, 가사와 청소와 같은 일은 그림자 노동이다. 이런 그림자 노동을 끝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가사노동까지 해야 하는 경우라면 그림자 노동을 안팎으로 하게 되는 셈이다.
임금 노동은 우월하다, 노동하는 남성은 우월하다, 동시에 여성은 남성이 노동하는 동안 집안에서 다른 모든 노동을 도맡아야 하고 이는 당연히 열등한 일에 불과하다 등등의 생각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공장을 만들고 기계를 돌려 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생산하고 그로부터 이윤을 창출해내야 하만 하는 자본가들이 강제와 폭력을 통해 억지로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인식이다. 지금도 임금노동은 가사노동에 비해 우월하며, 임금으로 환원되지 않는 활동은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저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톺아보고 질문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정답’이 있을 리 없을 텐데, 사회는 항상 모범답안을 만들어 선택을 종용한다. 사회가 만들어 내놓은 예시들은 아무리 많아도 예속을 벗어나는 선택이 될 수 없다. ‘경제논리’라는 일원적 가치기준을 벗어나 내 존재가 진정 기뻐하는 활동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않는 한, 즉 선택지를 스스로 만들며 살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따라서 문제는 임금 노동이냐 그림자 노동이냐가 아니다. “우위에 있는 남성 임노동자도 그림자 노동을 할당받은 여성과 임노동으로 배제당한 남성들도 모두 예속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자로서의 활동에 대해, 임노동만이 생산적이자 가치 있는 것으로 한정지으면서 동시에 기타 다른 모든 활동은 가치가 없다는 결정을 내려버린 산업적 생산의 근본적 독점 아래”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31쪽, 느린걸음) 있는 한 임노동과 그림자 노동은 다르지 않다.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을 통해 노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산업사회가 파괴한 ‘존재를 위한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어떻게 노년을 맞이할 것인가?
남편은 늘 은퇴를 꿈꾼다. 은퇴 이후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픈 일들을 하며 사는 생활을 꿈꾼다. 그렇기에 은퇴하고 나면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TV를 보다가 좋은 여행지가 나오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이들이 나오면, 늘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은퇴하면 저기에 가야지, 저렇게 살아야지.” 종종 내가 한 음식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도 이렇게 말한다. “은퇴하면 요리도 배워야지. 요리 배우면 진짜 맛있게 내갸 먹고 싶은 거 다 해 먹고 살 거야!”
사실 나이로 치면 머지않아 은퇴할 때이긴 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될까? 지금은 못하는 일들을 모두 은퇴한 이후에 하려고 할까? 마누라인 내가 돈을 벌 생각이 없기 때문이란다. 자기마저 회사를 안 다니면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리냐며, 나를 타박한다. 하지만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돈을 벌면 우리 남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까? 모든 일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에 적합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그게 가능할까? 궁금하다. 남편은 과연 은퇴한 뒤에 꿈꾸던 대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진짜 즐겁게 살 수 있을까?
글을 쓰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존재를 위한 활동이란 어떤 걸까? 나와 남들이 함께 기뻐하는 일이라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오롯하게 나에게 기쁜 일들에는 어떤 게 있을까? 환금성과 소비로 삶을 구성할 것인가 공유할 수 있는 즐거움과 조건들을 찾아내고 실현하는 방식으로 살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나도 즐겁고 다른 이들도 함께 즐거운 일이 무엇일까를 묻고 찾는 일은 결국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된다.
“사랑, 일, 돌봄 어느 경우에서든 인간에게 좋은 것들은 <관계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논쟁의 여지없는 진리”(필립 로스코, 『차가운 계산기 경제학이 만드는 디스토피아』, 20쪽, 열린책들)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사실 ‘돌봄’이라는 말이 싫었다. 장사치들에게 잡아 먹힌 말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될 수 있으면 쓰고 싶지 않았고, 쓰지 않으려 해왔다. 하지만 이제 내 식으로 ‘돌봄’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자 노동으로, 가사노동으로, 오직 여성이나 주부들만 하는 차원 낮은 일로 가치가 절하되었을지라도,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개운하게 빨래를 하고, 아이를 보살피고,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돌봄’은 여전히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이다. 그런 의미를 되살리고 되새기면서, 보살피고 돌보고 나누면서 사는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누군가 여기에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면? 노땡큐다. 아직은, 여전히, 아마 앞으로도! 사람을 보살피는 일, 사람과 나누는 활동 안에 있는 유쾌함이 내 존재를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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