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건강을 정의(定義)하라
한현정
건강, ‘정상’과 ‘표준’에 대한 환상
현재의 우리는 오염된 공기와 먹거리, 그리고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질병에 노출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건강은 가장 중요한 바람이 되었고 일상은 건강과 밀착되어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약이 끊임없이 광고되고 매일 접하는 매체에는 각종 건강 정보가 넘쳐난다. 우리는 또 질병의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가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정기적인 검진으로 자신의 몸을 체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전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여자는 동행한 상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서 하라는 거? 그거는 했지.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 한 지 얼마 안 됐거든. 근데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서 사원 부모 건강 검진해 준다고 해서 또 받으려구. 국가에서 하는 건 씨티 같은 거 없잖아. 근데 여기는 그것도 해준대. 돈도 안 내는데 이 좋은 걸 왜 안 하겠어? 돈 내고도 할 판인데.”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건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2년마다 시행되는 국가 건강검진을 걸러서는 안 되며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CT 같은 첨단 장비를 이용한 정밀검진으로 내 몸속 깊은 곳에 일정 장소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병인을 깡그리 찾아내고 후벼 파서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밀검진이라는 의료 서비스는 정말로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병인을 모조리 찾아내 줄까? 또 찾아내기만 하면, 그래서 없애버리면 건강한 걸까?
건강검진은 대체로 환자가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의료가 찾고자 하는 질병만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검사항목도 이를 기준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정해진 검사항목을 벗어난 질병은 포착되지 않는다. 사실 건강검진이 내 몸 속 모든 병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생각은 망상인 것이다. 거기다가 질병이 의심되는 부위를 씨티로 촬영하는 경우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유방암과 갑상선암의 발병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가 있으며 고가의 검사일수록 컴퓨터 단층촬영이 많아 방사선 피폭이 증가하지만 이 촬영이 질병의 조기 발견에 도움이 된다는 객관적 증거는 부족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질병의 조기 발견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면서 거기다 몸에 해롭기까지 한 고가의 정밀검진이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과하게 무지한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는 검진 결과 통보서의 정상 범위라는 수치에 민감하다. 내 친구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표준 영역을 넘어섰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챙겨 먹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의 혈압이 정상 범위를 넘겼다고 열심히 혈압 강하제를 먹는다. 남편은 미열이 있다고 생각될 때마다 체온계를 찾아 본인의 체온을 확인한다. 체온계를 찾아달라는 부탁이 귀찮은 나는 ‘이마만 만져보면 알 일을 꼭 체온계로 확인해야 하나? 목젖이 부어올라도 체온계가 수치가 36도면 감기가 아니라 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몸 상태가 저조하다는 사람 앞이라 볼멘소리를 속으로 삼키곤 한다. 현재의 우리는 이처럼 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무시하고 의료적 수치를 건강의 지표로 삼는다. 하지만 정상이나 표준은 시대마다 다르고 몸과 건강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표준이라는 수치를 이렇듯 신봉하는 건 우리가 지나치게 의료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는 약 60조 개라는 어머어마한 숫자의 세포가 끊임없이 죽고 새롭게 생겨나며 그 수명 또한 제각각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죽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이 생겨나는 이런 쉼 없는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몸이다. 그렇다면 수치로 표현되는 완벽한 건강 상태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이반 일리치는 의학은 모델이 아닌 주체 그 자체를 실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 연구의 정직성이 존재하지 않아서 화학분석이 도자기의 미적 가치에 가르쳐주는 정도로 밖에 가르쳐줄 수 없다(『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치. 미토. 272쪽)고 말한다. 그럼에도 의학은 건강한 몸이 있음을 전제로 그런 몸에 표준이 될법한 수치를 부여하는 놀이를 하고 있고, 건강한 몸에 집착하는 우리는 그 놀이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셈이 아닌가. 건강검진으로도 획득할 수 없고 정상 범위 설정도 허망한 것이라면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제도화된 의료에서 벗어나기
아무튼 건강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내부 상태와 환경 조건이라는 양자에 투쟁하는 경우의 강도를 나타내기 위한 일상어에 불과하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 ‘건강한’이라고 하는 말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의 성질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어떤 국민의 건강은 정치적 행위가 환경의 조건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 대한, 특히 약자에 대한 자기 신뢰, 자율성, 존엄성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의존한다. 그 결과 건강 수준은 환경이 자율적인 개인의 책임 있는 대처 능력을 발휘하게 할 때 최고가 될 수 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치. 미토. 16-17쪽)
동양의학 속의 인간은 질병을 품고 사는 존재다. 『동의보감』에서는 생명에 기운이 생기고 형체가 갖춰지는 단계에서 ‘아’(痾)숙병 라고 하는 병증과 함께 생명이 완성되는데 ‘아’는 미병(未病)으로 아직 발현되지 않은 병이라고 말한다.(『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 김정선. 북드라망. 44쪽) 동양의학의 관점대로라면 나라는 생명체는 병과 함께 태어났으므로 병은 나의 실존 조건이며 병과 건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한다. 병과 건강이 한 덩어리라면 건강과 질병은 어떤 분명한 경계가 없이 몸속의 연속적 흐름 속에 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므로 건강은 어떤 특별한 상태가 아니다.
차가움과 건조함의 계절이 도래하면 우리는 감기나 독감에 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마스크를 쓰고, 옷을 따습게 입고, 자주 그리고 꼼꼼하게 손을 씻는 작은 실천으로 우리를 병나게 할 수도 있는 자연조건과 싸우지만 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자신의 몸이 가진 내부의 힘(면역력)이다. 그런데 우리 내부의 이 위대한 힘은 몸과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건강은 식사, 체력, 노동, 병원체의 침입으로 인한 단련 등 일상의 행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이런 행위로 자신의 신체를 강건히 함으로써 환경 조건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결코 어렵지도 굉장하지도 않은 능력인 동시에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므로 우리의 삶은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60조 개라는 엄청난 수의 세포가 한편으로는 죽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쉼 없는 흐름 속의 변화 과정이 바로 몸이며 건강과 질병은 이런 연속적 흐름 속의 어떤 움직임이다. 때문에 몸을 매개로 사는 우리는 질병이 포함된 삶에 전반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동의보감이 말하듯 건강은 질병과 한 덩어리라면 이 둘은 서로의 적이 아니고 서로를 보살피고 보완하는 동지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병에 걸린 신체를 나쁨, 불행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아픈 몸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 더 나아가 병을 용감하게 수용하고 이를 내 삶을 유용하게 변화시키는 동인으로 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따위는 필요 없다.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며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이들이 허다히 많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도 깊은 내면에 질병으로 인한 시련을 견뎌 낼 큰 힘이 있음을 믿고 질병과 적극적으로 대면하면서 정신적 안정 유지와 신체적 균형 찾기에 힘쓴다면 상태의 개선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병을 고치는 최선의 처방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자신의 병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공부해서 이를 바탕으로 신체의 개선을 위한 자기 훈련의 의욕과 능력을 꾸준히 발휘한다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참을 만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신체의 기능적 장애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노력이 건강이 아니라 치유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병이 없는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조화로운 상태를 향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고 또 이런 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이 치유라면 치유의 과정이 곧 건강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건강은 병을 초래한 삶의 양식을 바로잡아 몸의 모든 기관이 유기적 관계의 균형을 되찾게 하는 자신만의 노력이므로 의료에 의한 통제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하고 독특한 자신의 몸과 자신이 맺는 관계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료라는 허망한 유토피아 속에서 건강을 찾아 헤매느라 건강검진과 건강 지표라는 표준 수치를 신앙처럼 받든다. 그건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자기 몸에 대한 앎이 없기 때문에 각종 수치로 무장한 이 맹랑한 과학을 맹신하고 의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한 앎을 구축하고 의료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건강검진과 정상 범위라는 수치에 얽매이지 않는 한편 몸에 대한 탐구로 신체에 대한 앎을 확보하고 신체를 병들게 하는 환경을 개선하며 정신 수양, 섭생, 체력 증진 등을 통해 몸과 정신을 강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몸과의 관계를 의료의 간섭이 아닌 자신과 맺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행사하는 것. 이것이 곧 일리치가 말하는 건강이다.
무릎에 병이 있던 내 친구는 한때 통증으로 보행이 불편했었다. 이런 경우 의료화된 우리는 별생각 없이 수술을 선택하겠지만 그녀의 결정은 ‘주체적으로 몸만들기’였고 실천 방안은 운동이었다. 그녀는 자기 무릎을 자신이 바꾸어 보겠다는 자율성으로 매일 수영장에 다니며 물속에서의 다리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자 통증이 견딜 만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너스레를 떠는 친구는 “혹 좋아지지 않아도 이 정도면 아주 굿”이라며 무릎에 보호대를 단단히 매고 활기차게 걸어 다니고 수영장에서 사귄 노인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산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자기 치료에의 기회(『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치. 미토. 249쪽)로 삼음으로써 무릎에 병이 있는 환자에서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노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친구야말로 자기 신뢰, 자율성, 존엄성에 유리한 환경의 창조와 함께 병에 대한 자신의 책임 있는 대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최고의 건강을 구가하는 사람이 된 것이며 일리치의 가르침을 눈부시게 증명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는 집 가까이에 있는 부천 순천향병원에는 한동안 “병을 고치는 건 하늘이고 의사는 그 과정을 도울 뿐이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질병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요인은 하늘이나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감당하는 몫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존에 대한 열망과 이의 성공을 위한 투지와 자기 실천 등 환자 자신의 선택과 집중 같은 것들 말이다.
노년의 나는 건강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까?
나는 노년의 삶을 사는 노인이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몇 배나 더 많은 내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아픈 곳도 있고 체력 또한 많이 부족하다. 문제는 이런 고장은 고칠 수가 없고 오히려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며 아픈 곳은 더 많아질 거라는 데 있다. 이런 내게 필요한 삶의 기술은 뭘까?
우선은 건강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남으로써 늙음으로 인한 질병의 제거에 연연하기보다는 조금은 담대한 마음으로 병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또 그런 가운데 남은 삶을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병에 걸린 신체를 불행으로 규정해서 몸에서 병을 제거하려 들 것이 아니라 병듦 역시 삶의 과정임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도구로 삼아 새로운 삶을 발명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해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늙음에 대한 대처 능력의 발휘이며 삶에 대한 능동적 전략이 아닐까? 내 속 깊숙한 곳에는 질병으로 인한 시련을 인내할 수 있는 아주 큰 힘이 있음을 믿고 이런 능동적 전략을 펼치면서 씩씩하게 살아간다면 최고의 건강 수준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몸과 마음의 활동력을 보강하고 몸에 대한 공부로 늙음으로 인한 신체 상태의 악화 방지에 힘쓰는 꾸준한 실천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삶에 대한 통찰이 곧 삶의 기술일 것이므로 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양생, 즉 지혜를 일깨우는 공부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읽은 책 속에서 나는 브리콜라쥬라는 단어를 배웠다. 브리콜라쥬는 한정된 조건 속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한다. 나는 내 삶을 브리콜라쥬로 만들어내는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 삶을 브리콜라쥬로 만들어가는 동안 내 건강 수준은 최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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