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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리치

[내인생의일리치] 아메바언어에서 삶을 살리는 언어로!

by 북드라망 2024. 4. 19.

아메바언어에서 삶을 살리는 언어로!

 

김미영


아~ 스트레스!
친구가 얼마 전 뜬금없이 명상센터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유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였다. 일에서 겪는 스트레스도 내려놓고 갱년기 스트레스도 좀 극복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여기, 스트레스공화국. 모두들 입만 열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냐~’ 라고 말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옆집 아이도 쪼그만 입으로 ‘스트레스 짱 나!’라고 말하고, 삶의 모든 경험에 통달했을 법한 팔순의 노모도 ‘스트레스 받아 힘들다’고 말씀하신다. 스트레스는 실적 압박에 짓눌린 회사원이나 경쟁에 내몰린 n포세대 청년만이 독점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몸이 무거우면 ‘스트레스 때문인가?’하고 의심할 정도로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의학지의 연구결과들은 이 두려움을 더 증폭시킨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건강 문제는 크게 신체적으로 심혈관과 뇌질환, 각종 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도 불안증, 우울증, 정신분열증 같은 심리적인 문제를 유발시킨다.’라고 의학계에서는 말한다. 이처럼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 되었고 나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들여다보기 위한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하지만 일리치에 따르면 엉뚱하게도 ‘스트레스’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금속을 연구한 록히드 항공사로부터 유래했다. 1941년 의학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지만, 전쟁을 경험한 의사들은 군수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증을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명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45년 이후부터 스트레스는 의학에서 다루는 ‘주요질환’이 되었다(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일리치와 나눈 대화』, 물레, 159쪽 참조).



예전에는 일상에서 겪어나가야 했던 일들이 이제는 관리해야 하는 ‘스트레스성 장애’로 취급된다. 내 몸과 마음이 왜 불편한지, 나의 생각과 행위를 돌이켜볼 겨를조차 없이 스트레스만을 문제 삼고 의료시스템에 몸을 맡긴다.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특정한 언어의 규정성에 따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불확실한 형태의 무분별한 언어사용이 우리의 일상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런 낱말들을 ‘아메바언어’라 정의한다. 경제분야나 과학분야 등 우리사회 전문영역에서 흘러나온 아메바언어가 우리를 통제하고 소외시키는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삶을 길들이는 아메바 언어

 

전문용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이런 폐기물은 공해와 비슷하다. 생산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만들어진 부산물이 우리가 보고 만지고 숨쉬고 먹는 거의 모든 것 속에 침투해 들어가 변형과 퇴화를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전문용어의 폐기물 역시 일상언어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전문용어의 폐기물은 대부분 일상 대화에서 그저 혼선만 만들어낼 뿐으로, 경제성장 때문에 세상을 뒤덮는 회색 시멘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폐기물 중 많은 수는 아메바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불길한 의미를 가득 담는 한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더운 공기를 타고 날아올라 퍼질 수 있다.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신중한 사람은 그런 낱말에 대해 종종 어쩔 수 없이 사용중지를 선언하게 된다. <이반일리치,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문학동네, 175쪽>

 


아메바 낱말은 유동적이고 형태 없는 아메바의 외형처럼 여러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이 낱말은 전문가 계급에 의해 정의된 것이지만, ‘특정 활동과 한데 묶여서 의미를 띄는’ 것도 ‘특정한 형식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바 낱말은 일상언어에서 사용될 때 종종 전문적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일리치가 아메바언어가 활개치는 이 현상을 비판했던 이유는 전문용어에서 유래한 ‘언어폐기물’의 남용이 생각을 왜곡시키고 관계 자체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전문가집단은 자신들만이 아는 지식의 언어로 앎과 무지의 경계를 나눈다. 특히 우리 사회 최고의 전문직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계, 의료계, 법조계 전문가들이 쓰는 기술용어, 의학용어, 법률용어 등은 사람들의 의존도가 높다. 알아볼 수 없는 전문용어로 의료처방전을 주고, 이해할 수 없는 법률용어로 행위를 판결한다. 이보다 큰 문제는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전문용어에서 넘어온 낱말들을 일상생활에 아무런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로 일리치는 아메바언어가 우리의 삶과 인식을 마비시키거나 본질을 놓치게 한다고 우려한 것일까?

언어란 각자의 고유한 문화적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냄새를 맡고, 만지고,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익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싸움과 자장가, 소문, 이야기, 꿈을 듣는 가운데” 저절로 체득되는 삶 자체다. 일리치는 “말과 글이 살과 피의 덩어리에서 솟구쳐 나오며...... 감정과 의미의 숲에서 솟구쳐 나온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289쪽)라고 표현한다. 이에 반해 그가 ‘관리되는 허깨비’같다고 표현한 아메바언어는 우리가 직접 맛보고 냄새 맡고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으면서 “가르침과 사회적 관심과 합리성이 담겨 있으니 잠자코 귀담아 들어라”라는 명령을 내포한다.(위의 책, 313쪽) 효율성, 수익성처럼 일상언어를 독점한 경제적 용어에 의해 나를 둘러싼 공간이 자산이 되고 인간 자체가 상품으로 규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자원’이라는 낱말은 지하자원, 천연자원, 인적자원, 문화자원, 자원 낭비, 자원 고갈 등 부지기수로 쓰이고 있다. 자연 속에서 발굴하고 채취하여 이윤을 창출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재하던 시대에는 ‘자원’이라는 말이 없었다. ‘자원’은 근대 산업사회를 받치기 위해 고안된 말이다. 부를 얻기 위해 지하자원을 발굴하고, 땅을 수익성 중심으로 구획하고, 팔고 사고, 부수고, 쪼개며 개발한다. 여러 광물과 자기 터전에서 자연스럽게 살아온 동식물들이 토지와 원자재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이용가능한 자원이 된 것이다. “국가의 미래 발전과 성공을 위해 문화자원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국의 세계경쟁력은 뛰어난 인적자원에 있지!”와 같은 진부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인적자원’ 개념은 사람 자체를 발전의 도구로 보는 것을 당연시한다.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품질을 개선하고 원자재를 관리하는 것처럼 인간의 능력을 계량하고 분류하여 자원으로서 개발, 유지하게 한다는 발상은 예전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을 적절하게 운용하고 배치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로 심리학, 사회학, 통계학 등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욕망의 경향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전문지식과 제도 등을 우리는 ‘교육자원’이라 부른다. ‘미래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이라는 구절은 사람을 ‘자원’으로서의 쓸모나 효용의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말이다. ‘인적자원’, ‘문화자원’ 등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따져 묻지 않고 써왔던 이 낱말들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발굴하고 관리 마케팅해야 할 자원으로 대상화하는 아메바언어다. 더 가치 있는 자원으로 자기역량을 계발해야 하는 필요의 사회에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을 빗대어 ‘잉여인간’이라고 비하한다. 쓰고남은 나머지인 ‘잉여’라는 낱말은 ‘자원’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아메바언어다. ‘자원’과 함께 흘러나온 미래, 계획, 성장이라는 말들도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뉘앙스를 풍기면서 경제적 시스템을 우선시하는 언어로서 우리의 의식을 구성해 나간다.

언어사용에 특정한 방향의 프레임이 씌워지면 그와 다른 것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된다. 학교에서 제도화된 교육을, 병원에서 시스템화된 의료를, 일상 속에서 수송화된 교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정한 언어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아무런 의문도 없이 전문화된 체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특정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조장하는 언어의 힘을 ‘파시스트적’이라고 하는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리치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발견한 것은 새말(Newspeak, 작중 주민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언어로 갈수록 낱말이 줄어드는 것이 특징이다.)이 능동적으로 신체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명령에만 따르도록 한다는 점이었다. 새말이나 아메바언어는 우리 자신을 편향된 사고체계에 공고히 머무르게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잃어버린 채, 타자와의 관계도 변화 가능성도 박탈당하게 된다. 이렇게 프레임에 덧씌워진 채 통제된 언어사용이 익숙해지면 관계는 무의미해지고, 눈앞에 일어난 사건에도 무감각해지거나 예측가능한 감각만을 느끼는 무력한 신체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메바언어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언어를!
과학적, 의학적, 경제적 전문용어에서 흘러나온 아메바언어가 의식을 점유하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편리, 효용, 속도’와 같은 특정한 감각이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편향되고 통제된 언어사용은 일상을 무미건조하고 상투적으로 만든다. 뒤섞이며 헤매는 속에서 생겨나는 다양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을 잃어버린 채 경험들을 획일화된 언어로 번역하게 된다.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거나, 해학적 농담이 섞인 대화도 나누기 어려워진 세상은 너무나 단조롭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 골목길에서 무지개처럼 삶이 펼쳐졌던 수다와 이야기는 이제 지나간 시절이 된 것일까? 골목길, 혹은 앞마당에서 왁자지껄하고 좌충우돌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이야기 사이에 삶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즐거움을 서로 향유하고 싶은 마음은 단지 낭만적인 몽상에 불과할까?

우리는 배우고 익히는, 사랑하고 싸우는 다양한 관계 속에 상호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말과 글은 바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마음과 생각 그 자체다.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은 일상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주고받는 언어를 통해 수용되고 변화한다. 사랑하고, 느끼고, 겪어나가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일리치가 “말과 글이 살과 피의 덩어리에서 솟구쳐 나온다”라 했던 것처럼. 단테의 아름다운 <신곡> 몇 구절만 기억할 수 있다면 “오늘 먹을 죽 한 그릇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던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22쪽)는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몇 구절 문장의 기억이 수용소에서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도 영혼을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의 힘이 된다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며 공유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상에 스며들어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아메바언어의 포획에 갇히지 않으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나는 발전과 성장의 언어프레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에 대한 경제적 언어가 얼마나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지를 잘 관찰하자. 효율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익숙한 시대에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며 세상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활동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곧 나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아메바언어, 나의 눈과 귀를 특정한 욕망으로 가닿게 하는 앙상한 언어를 걸러내고, 그 빈자리에 사유의 언어와 마음을 주고받는 구체적 언어를 밀도 있게 채워 넣는 일이기도 하다. 언어의 시작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말과 글은 삶에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살아가는 힘이 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 김미영은 도반들과 함께 일리치와 푸코를 공부하면서 사유하는 방법을 몸에 익히는 중이다. 부딪치지 않으면 배움도 없고, 끝까지 하지 않으면 변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득하게, 유쾌하게 공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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