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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리치

[내 인생의 일리치] 최소의 에너지, 최대의 존재 역량

by 북드라망 2024. 8. 30.

최소의 에너지, 최대의 존재 역량

 

소현 

 

에너지와 공평성
몇 년 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처음 만났을 때 말랑말랑한 에세이 같은 제목 때문에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가벼운 맘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목차도 다시 보고 앞뒤를 뒤적이다 책표지를 다시 보았다. 제목 아래 <Energy and Equity(에너지와 공평성)>이라는 원제목이 달려있었다. 에너지와 공평성? 이 둘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나 보다 생각하고 책을 펼쳤지만 쉽게 읽히지 않아 흐지부지 넘어갔었다.

일리치 책으로 글을 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풀리지 않았던 에너지와 공평성. 이 관계를 이번에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에너지가 환경 문제에 국한되면서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주장은 사라지고 깨끗한 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남편이 차를 바꿀 시기에 전기차를 고민한 적이 있다. 비용면에서 정부지원금이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탄소배출이 없다는 사실보다 더 큰 장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기차를 구매하지 않았다. 당시 지금만큼 전기차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주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전기차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전기차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탄소를 배출하지는 않지만, 전기차는 배터리 충전을 위해 여전히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리튬 채굴로 지구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소재는 다른 소재들로 계속 바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터리의 제한된 수명으로 인해 앞으로 심각해질 폐배터리의 처리 문제, 배터리 화재도 풀어야 할 숙제다. 기술 개발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 중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또 다른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제를 생산하는 매커니즘에 갇혀 있다.

에너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 개발만을 모색한다면 전기차와 같은 오류를 계속 저지를 수밖에 없다.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은 오직 에너지를 줄이는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 환경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리치는 말한다. 에너지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질서들의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나의 편리는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사람들은 물리적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서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의 최대치에 대해 생태학적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가능한 한 최소의 동력을 사용하는 것이 현대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질서들의 토대가 된다는 데까지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에너지 사용에 상한선을 두는 것이야말로 높은 수준의 공평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이룩할 수 있는 길이다.
- 이반 일리치, 신수열 옮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사월의책, 15~16쪽)

 


배달기사, 택배기사와 관련한 사건사고들이 연일 보도되던 때가 있었다. 택배기사가 과로로 인해 죽음에 이른 보도나 배달기사가 실시간 변동하는 수수료로 인해 목숨 건 질주를 하게 된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그냥 넘겨지지 않았다. 사실 노동 이슈에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생활 공간과 그분들이 일하는 곳이 겹치다보니 엘레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곤 한다. 언제나 분주한 모습이었고, 꽤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는 것을 보기도 했다. 여기에는 내 생활의 변화도 한몫한다. 먹거리와 생필품을 직접 구매하기보다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어 배달과 택배를 이용하는 일이 일상이다. 나의 편리함과 연결되어 있는 노동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쿠팡을 탈퇴하고 새벽배송을 끊었다. 좀 더 느긋하게 기다리고 더 고마운 맘을 갖고 늦게 오는 택배가 있을 땐 요깃거리를 챙겨뒀다가 기사님께 드렸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물류전쟁’시대라고들 한다. 배송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이커머스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등장한 표현인 듯하다. 업체들은 더 많은 고객에게 더 빨리 상품을 전달하기 위해 기술 집약적으로 물류 센터를 자동화하고 있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결과 시간과 노동력이 절감되어 업무효율이 상승했다고 자랑스럽게 홍보한다. 기업은 거리낌 없이 더 빠른 택배를 고객에게 전달하여 이득을 올리려고 과몰입하고 있고, 우리는 그로 인해 더 빨라진 서비스를 받으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이윤을 내겠다는 기업을, 더 빠르게 받고 싶다는 개인을 문제삼지 않은 채 그저 더 빠른 속도를 향해 질주할 뿐이다.

그런데 고객에게 상품이 전달되려면 택배기사들의 노동이 필요하다. 자동화로 선별작업이 빨라진 만큼 택배기사의 노동강도는 커진다. 인간의 속도를 기계가 보완하거나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인간이 죽을 힘을 다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맹신하고 있다. 요컨대, 문제는 그 편리함 뒤에 숨겨진 폭력이다. 편리함을 위해 인간의 노동을 기계의 효율에 맞추는 것은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루하고 궁핍한 상황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나의 속도와 편리는 누군가의 궁핍 위에서 가속화되는 것이다.

 


공평성이라는 권리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꿈꾸는 행복은 저마다 다르지만, 일리치는 각자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거의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발휘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타고난 이동능력’이라 함은 곧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개인적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95쪽) 이동능력은 정주하는 능력과 짝을 이룬다. 정주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흔적 속에 깃들여 산다는 뜻이고, 그날그날 살아가며 자신의 일대기를 한 올 한 올 풍경 속에 적어 넣”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이반 일리치, 권루시안 옮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75쪽) 이처럼 자유롭게 정주하고 이동하면서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으며, 이 능력은 세상을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역량”이다.(볼프강 작스 외, 이희재 옮김, 『反자본발전사전』, 아카이브, 13쪽) 그런데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과 우리가 부르짖는 ‘빠름’은 과연 이러한 역량을 존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공평성이다. 일리치는 공평성이 전제될 때만 타고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평성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작년 말 화물연대 총파업이 있었다. 일부에서만 시범으로 시행하고 있는 안전운임제를 확대 지속해달라는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안전운임제란 “마치 최저임금처럼, 화물노동자의 권리와 도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적정 운송료를 법으로 정해둔 것”을 말한다.(화물연대본부 홈페이지) 운송료가 낮을수록 화물노동자가 위험 운행으로 내몰리게 되는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였지만, 끝내 폐지되었다. 화물 운송에 필수적인 비용인 유류비, 차량할부금을 지출하고 나면 생활비가 남아야 하지만, 적은 운송료탓에 최대한 오래 일하고, 빨리 달리고, 한 번에 많이 실어 그 부족을 채워야만 생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화물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방법으로 화물차를 집으로 삼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여 그 시간에 토막잠이라도 자야 위험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일상마저도 누릴 수 없는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불합리한 현실을 공정이란 관점에서 보자. 공정에는 두 차원이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공평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이다. 이 권리는 절대적 정의로서 기본 생활 여건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 존엄성의 표준을 마련한다. 또 다른 공정은 평등이다. 평등은 소득, 학력, 자산 등 차이에서 불거지는 불평등에 대한 상대적 정의다.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본질상 타인과 비교에 역점을 둔다. 화물노동자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는 평등이 아닌 공평성의 개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과 우리가 부르짖는 ‘빠름’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때만 가능해진다. 에너지의 과잉소비로 기업과 고객은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만족’은 결국 누군가의 불만족을 양산한다. 우리의 ‘편리함’과 ‘빠름’은 노동자들이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역량과 그들의 시간을 횡령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문제는 ‘깨끗한 에너지’가 아니라 ‘최소 에너지’다

“공평성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사회의 시민이라면”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축소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이 권리를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라고 일리치는 말한다.(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95쪽) 그런데 공평성이 사회질서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앞서 ‘최소동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로 우리는 무한한 팽창을 향해 달려왔다. 성장만이 최고선이었다. 지금도 온통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상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의 힘을 빌려 속도를 더 올려야 한다. 결국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 상태로는 절대적 권리로서의 공평성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생존의 바탕은 지구다. 지구는 자연 세계이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은 규모, 속도, 힘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체계는 자기균형 능력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조절하고 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E.F.슈마허, 이상호 옮김,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188쪽) 자전거나 대중교통 같은 자력이동의 보조수단이 수송 시스템을 유지할 때는 교통이 보완되고 향상되었다. 또한 이동이 힘든 사람들에게 이동의 편리함을 주었다. 그러나 자력이동의 보조수단을 넘어선 자동차가 교통을 독점하게 되면서 자력이동은 무력해지고 말았다. 거주지를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들어서고 전통가옥을 밀어내고 고층 건물이 세워지면서 자력이동의 흐름은 단절되고 고립된 공간이 생겨나고 이동으로 인한 시간 손실까지 증가시켰다. 수송의 속도는 자력이동을 무능력한 이동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식으로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삶의 회복력은 상실되고, 관계는 파괴된다.

 


“내 방식대로” 살기 위하여
지금까지 나는 에너지를 언제나 물질적인 것에 국한해서 생각해왔다. 그러나 에너지는 일상의 공간에서부터 우리의 인식까지를 지배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집, 더 나은 차, 더 나은 학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지만 알고 있지 못했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그 노력 가운데 하나가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점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평성’의 개념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려면 ‘최소동력’만이 그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강승여 옮김,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50-51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세금 납부 불이행죄로 유치장에 갇혔을 때 쓴 글이다. 그가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는, 군대를 지원하고 노예를 징벌하는 데 쓰이는 세금을 내는 것은 자신이 그 일을 직접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삶은 무수한 존재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려면 우선은 이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부는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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