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쓸모, 나의 미니멀라이프
보은 (B움)
미니멀하지 않은 미니멀라이프
환경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미니멀라이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살림살이, 매력있었다. 옷은 손이 가는 두서너 벌로 번갈아가며 입고, 쓰는 물건도 항상 정해져 있을 뿐인데도, 늘 꽉 차있는 장롱과 수납장의 물건들에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정리하자~ 너저분한 살림살이들이 정리가 되면 생활도 생각도 단정해질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면서 미니멀라이프 관련 기사와 동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을 보며 반성도 하고 팁도 얻었다. 내가 본 대부분의 영상에는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 버릴 것과 나눌 것을 구분하라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었다. 결국은 내가 할 일. 동영상을 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영상 속 다른 집에 가 있던 시선을 내 집, 내 공간으로 돌리자 구석구석 쟁여놓은 것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미니멀라이프를 꿈꾸며 짬짬이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리즘이 문제인지,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하고 있는 내 손가락이 문제인지, 업무시간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 관련 기사들을 자꾸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공간 컨설팅이다, 랜선 집들이다, 살림 브이로그다, 넘치는 콘텐츠들 사이를 배회한다. 기사나 영상에서 나오는 친환경 물건, 가성비와 활용도 좋은 물건들의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려 여기저기를 접속하고 클릭한다. 영상 속 집에 있는 물건이 있으면 좀 더 정리가 잘 될 것 같고 깔끔할 것 같은 느낌에 갖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댄다. 가격은 얼마인지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혹시 잊어 버릴까봐 관련 사이트를 북마크도 해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분명 시작은 물건을 줄이기 위함이었는데 또 다른 물건을 사려 하고 있다니.
합리적 소비, 착한 소비란 단어에 혹 한 적이 있다. 합리적이고 착하다. 좋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말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합리적 소비란 과소비나 충동구매를 줄이고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의 만족을 내는, 가성비에 중점을 둔 소비란 뜻이고, 착한 소비도 가격보다 생산과정을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경제 선순환을 강조하는 소비란 면에서 좋은 거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소비하라는 것! 어쩌면 ‘합리적이고, 착하다’는 단어가 소비를 미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다, 착하다, 가성비다, 가심비다, 하는 것들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쓸 수도 없을뿐더러 만들어 쓸 수 없는 게 대부분이며,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 갈 방법도 없다. 그러나 미화된 소비에 휘둘리느라 내게 있는 것을 활용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버리고 소비하기를 반복한다는 게 문제다.
단출한 삶을 위해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새것이나 손에 잡히지 않는 영상 속 그 것이 아니다. 지금 갖고 있는 물건 중에 내게 맞춤인 것 하나를 추려내는 일.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고, 쓰임을 찾아 활용하며, 내게 맞는 규모와 적절함을 알아가는 일이 공간을 간소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채울수록 가난해지는 역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번에 빨래 건조기를 샀다고 좋아했다. 신랑 친구 모임을 갔더니 빨래건조기 얘기들을 하면서, 날씨 걱정 없고, 시간 걱정 없고, 이렇고 저렇고, 생활의 격이 달라졌다고 입 아프게들 얘기하더란다. 건조기 없이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친구지만 그 자리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과 부족함을 느끼고는 바로 결제해버렸다고 한다. 음식을 하는데도 수많은 가전제품이 필요하다. 조금씩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그 제품이 있어야만 뭘 해 먹을 수 있을 것처럼, 그게 없으면 맛있는 음식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말한다. 소비에 의존하면 할수록 일상은 점점 광고처럼 되어 가는 것 같다. 에어프라이어기를 들이면 에어프라이어기로 해 먹을 수 있는 밀키트를 산다. 식재료를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계로 익히기만 하면 되는 반 조리제품들만 사서 먹다 보면 손수 조물조물해서 음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센 강과 니제르 강둑에 사는 주민들은 소를 기르면서 젖을 짜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 하얀 물질이 이제는 식료품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수록 더 많은 아이들이 소의 젖을 먹는다. 부자나 가난한 이나 인간의 젖가슴은 말라버린다. 아이가 우유를 달라며 울음을 터뜨릴 때, 아이의 신체 기관이 식료품점에 진열된 우유병에 닿기 위해 길들여지고 제 기능을 포기한 인간의 젖가슴에서 등을 돌릴 때, 또 한 명의 중독된 소비자가 탄생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꽃 피우는 데 필요한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은 퇴화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25쪽)
작년 늦은 봄, 미국에서 분유대란이 있었다. 마트에선 한 사람당 구매할 수 있는 분유양이 정해져 있었다. TV에서는 분유를 구하지 못해 차를 끌로 멀리 마트원정을 다니는 부모들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의 젖가슴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이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였다.
우리는 언제 필요를 느끼게 될까. 무엇을 하다가 막히게 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다른 도구를 찾게 된다. 이리저리 궁리하고 물어보며 필요를 해결했을 때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능력과 지혜 또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힘들여 고민하지 않는다. 필요를 해결해줄 답안이 상품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어 그것을 소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필요를 상품으로 해결할수록 우리는 상품 없는 삶을 상상을 할 수 없는, 필요에 노예가 되고 만다.
전문가들은 상품을 좀 더 다양하고 촘촘하게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필요를 느끼는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고안한 상품의 광고 문구나 이미지를 보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광고들은 ‘넌 이게 필요해! 넌 이걸 가져야 해!’ 최면을 걸고, 우리는 ‘이게 내가 필요했던 바로 그거야,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며 마치 전문가들이 내 필요를 미리 알고 준비했다는 듯이 기특해 하며 의존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필요는 누군가에게 즉 끊이지 않는 생산과 소비의 연속체인 산업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이다. 편리하고, 효율적이고, 위생적이고, 삶을 질을 향상시킨다는, 자본이 집요하고 치밀하게 덧붙인 그럴싸함으로 주입된 필요를 떨쳐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의 생산품이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독점하면서 우리에게 있던 자유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 각자가 만들어 내던 삶의 다양한 방식들,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면서 느꼈던 성취감, 젖은 빨래를 뽀송하게 말려주는 볕에 대한 감사 등등... 이런 고유한 가치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상품에 의존하게 되면서 그 상품을 갖지 못하면 결핍을 느끼게 된다. 참 아이러니하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결핍부터 느끼게 되는 구조라니. 이런 상실을 일리치는 ‘가난의 현대화’라고 말했다. 모임에서 느꼈을 친구의 소외감도, 분유를 구하지 못해 애끓는 부모의 마음도 가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제품에 눈독을 들이는 나 역시 가난에 물들어 있다. 무엇을 소유하든 만족은 잠시뿐 또 다른 것을 계속 사게 되는 불만족 상태. 가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필요를 걷어내면 비로소 보이는 쓸모
예쁘고 깔끔한 새것에 홀렸던 내 시선을 다시 추스르며 무엇이 잘못 되었을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는 ‘미니멀라이프’라는 상품을 소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물건으로 미니멀을 해결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고, 깨끗한 것만 취하는 것을 미니멀라이프라고 할 수 없다. 먼저 내 눈과 정신을 현혹 시키는 이미지들과 거리를 두어야겠다.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필요를 걷어내야 자연스럽게 물건도 비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우는 일은 만만치 않다. 우리는 무언가 계속 채우라고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사고 싶고, 갖고 싶고, 그것들을 소유함으로써 나도 남들만큼 사나 보다, 위안을 삼기도 한다. 앞서 전문가들이 생산한 것은 상품만이 아니다. 잘 살고 못사는 것에 대한 기준을 같이 만들어 냈다. 얼마나 잘 사는지를 재단하는 삶의 척도가 소비와 소유가 되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소외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지인들의 말에 혹해 건조기를 산 친구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추천에 솔깃한 나 역시 애초에 그 상품이 꼭 필요하다기보다 이 소외와 불안 해소를 위해 구매욕구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물건을 사서 가득 쟁여 놓으면서도 한없이 부족하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많은 물건들이 쓸모를 잃고 공간만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들락날락하며 여기저기에 쓰이는 물건에는 생기가 있다. 또 그런 물건은 귀하다. 가만 보면 그 물건에 손이 가는 이유, 그것이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값비싼 브랜드여서도 유행하는 아이템이어서도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에 편하고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우리집엔 유명 브랜드에 값비싼 스팀다리미와 봄가을 집에서 편하게 입는 15년도 더 된 샘플로 만들어진 티셔츠가 있다.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스팀다리미를 버릴 것이다. 용도가 달라서 비교대상이라고 하기에 부적절할지는 모르지만 쓸모를 생각할 때 내가 고려하는 것은 값이나 브랜드가 아니라는 얘기다. 쓸모는 애정이고, 관계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정해주거나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나와 물건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물건은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사는 데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남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도 꼭 좋지만은 않다는 걸 살림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게 맞는 쓰임을 부여하여 물건에 생기를 불어넣자. 생기를 찾은 물건들과 내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 때 미니멀라이프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거 말고, 내 생활 방식에 유용하고 알맞은, 내게 좋은 물건을 추려내고, 생기를 불어넣고 아껴 쓰는 일, 쓰임에 알맞게 위치를 잡아주고 내게 쓰이지 않을 물건을 나보다 더 잘 써줄 수 있는 사람과 나누는 일, 이것이 나와 물건, 나와 공간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나의 쓸모라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소비자로서의 익숙한 패턴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발휘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윤리,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어떤 삶의 지혜들을 갖게 될 때라야 나 역시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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