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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리치

[내 인생의 일리치] 공동체의 돌봄과 상생을 향한 한 걸음

by 북드라망 2024. 6. 14.

공동체의 돌봄과 상생을 향한 한 걸음

글 : 장청(비움)

 

‘니가 한 게 뭐 있어!’
“그동안 니가 한 게 뭐 있어!” 결혼 후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여성에게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이 던진 말이란다. 젊은 날 나도 똑같은 말을 몇 번인가 들었다. 니가 한 게 뭐가 있냐니!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 아닌 가족을 위해 애썼던 그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단숨에 무시했던 그 말을 쉽게 잊지 못했다. 어쩌다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들이 울컥 치밀었다. 사실 전업주부 가운데도 “나 아무것도 안 해요” “집에서 놀아요”라며 스스로 위축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밥하랴 청소하랴, 그 외 잡다한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이 노동 강도에 있어 직장 일보다 덜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소리를 들을 만큼 가사노동이 하찮고 시시한 일일까?

하긴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결혼 전엔 밥, 빨래와 같은 집안일에 대해 엄마의 노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밥이 차려져 있었고, 나는 차려진 밥을 먹기만 하면 됐다. 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입에 들어오는지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더더구나 새벽부터 움직이는 엄마의 수고 덕분에 밥을 먹는다는 고마움 같은 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과수원 농사일에 바빠 미처 설거지를 못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쌓아두거나 마루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으면, 그걸 치울 생각은 않고 왜 집안일은 제쳐두고 밭에만 붙어있느냐, 지저분하다며 툴툴거렸다. 손에 오물 묻혀가며 하는 허드렛일이 싫기도 했지만, 밥하고 청소하는 일은 당연히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다.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는 집 안팎일에 치여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고, 그 고단했던 엄마의 노동이 우리를 살리는 일이었다는 것을. 아이 돌보는 일보다 밭에 나가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할머니들의 말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집안일은 성과가 보이지도, 측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집안을 쓸고 닦느라 하루 종일 종종거려도 돌아서면 씽크대에 설거지감은 수북하기 일쑤고, 집안은 청소한 뒤 잠깐만 반짝거렸다. 그렇게 아이들 셋을 낳아 키우는 동안 밤에 잠 한 번 제대로 자거나 편히 쉬어본 기억이 없는데, 주부는 아파도 누워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릎으로 기다시피 해서라도 식구들 밥상을 차렸는데, 그런데도 한 게 없다니.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내가 경제적 능력이 있었더라면 이런 수모를 당했을까, 라는 생각에 당장 집을 떠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내 딸들이 사는 세상은 달라지겠지, 딸들 세대는 우리 세대처럼 무시당하지 않고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집안일은 가전제품이 어느 정도 해결해 줄 것이고,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겠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늘었으니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덜 고달프게 살게 될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가사노동에서 자유롭지 않고, 살림과 육아에 직장 일까지 병행하느라 힘겨워하는 모습을 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전에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남성들의 가사 참여도가 꼴찌에 속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가사노동을 하는 시간이 무려 3,4배에 이른다고 한다. 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사노동을 여성들의 전담 역할처럼 여기는 걸까? 언제쯤 여성들은 이 불평등한 독박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성은 그림자 노동의 도구

 

“능력도 하나의 희소 자원으로서 경제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사회에서 (…) 엄마의 그림자노동은 분명히 하나의 경제적 활동으로서, 여기에 의존해 현금 유입, 급여, 자본 형성을 위한 잉여 가치 축적이 이루 어진다. 그래서 경제 중심부에서나 주변에서나 그림자 노동을 국가적 지원 하에 ‘조작화’하는 것이 새로운 발전 전략이 된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비공식 부문의 식민화’이다.” (이반 일리치, 『젠더』, 사월의 책, 53~54쪽)

 

일리치는 자본주의 경제가 유지되고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간이 그림자 노동이라고 말한다. 일리치에 따르면 그림자 노동은 “상품 집약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무보수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을 하고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공짜 노동. “세상에 공짜 노동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채 그림자 노동을 열심히 수행하며 살아왔고,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만큼 그림자 노동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출근하는 일, 승진을 위한 공부, 학생들의 시험공부, 주부가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가는 일, 주유소나 키오스크의 셀프 계산 등등. 이 모든 활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에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출근하고, 시험공부하고, 장을 보는 일 등은 모두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일이 아닌가? 이게 왜 그림자 노동이지?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가치화한다. 다시 말해 사물, 물건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심지어 인간에게도 상품처럼 ‘가치’를 따지고 가격을 매겨 화폐로 교환하는 형태의 사회다. 따라서 모든 것에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이라는 등급이 매겨진다. 노동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산업화 이전의 젠더 사회에서 노동은 다른 동물들처럼 먹이를 얻기 위한 자급자족 활동이었지만, 먹거리를 구하려던 차원의 노동이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치’의 척도로 변했다. 노동을 상품처럼 사고팔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노동력의 근원지인 인간의 몸은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내 노동을 판 대가가 임금인 것이다.

인간을 ‘가치’의 대상으로 평가하게 되면서, 자본경제는 인간도 다른 물적자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산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자본의 이익에 최대한 공헌할 수 있는 ‘쓸모있는’ 도구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고, 생산성 높고 희소가치 있는 이른바 ‘인적자원’의 양성을 위한 서열화 교육이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니 뱃속에 있는 태아 때부터 시작된다. 연봉 높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명문대에 가야 하고, 좋은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러려면 한눈팔지 말고 죽어라 공부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자로 길들이기 위한 훈련 과정이 가정, 유아원, 유치원, 학교, 사교육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엄마의 역할은 집안에서 장차 노동 역군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온갖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이 선이라고 믿는 자본 사회는 생산 노동만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한다. 즉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임금노동만이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얘기다. 반대로 소비와 연관된 노동은 무시하거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치부한다. 상품 구매 활동은 소비자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하는 활동이기에 노동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거야말로 모순이다. 산업자본이 물물교환하고 자급자족하며 살던 젠더 사회를 소멸시키고 난 뒤, 사회는 상품 집약적인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했다. 이전의 젠더 사회는 텃밭에서 스스로 먹거리를 조달하고, 물레를 저어 옷감을 짜고, 마을 공동체의 힘을 빌려 주거지를 마련하고, 자가 이동하는 자립적 생활 형태였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 생활양식은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업이 독점한 생산품에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젠더 고유의 활동이 자본경제의 상품화 한 시스템에 예속된 노동 형태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자가 곧 소비자이며,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다. 따라서 가족을 돌보기 위한 주부들의 소비활동 역시 노동의 일부다.

일리치에 의하면 그림자 노동은 19세기 중반 산업자본과 국가가 공모하여 창조해낸 발명품이다. 산업자본은 남녀 간 성별 분업을 통해 노동을 분리시켰다. 남성에겐 임노동을, 여성에겐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없이 임노동자가 오직 생산 노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밥, 빨래, 청소, 아이 양육 외 잡다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렇게 노동을 계층화한 결과, 성별 간에 구조적인 성차별이 이루어졌다. 일리치는 이 불평등한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 사례가 여성들이 가정에서 도맡다시피 하는 가사노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부들의 돌봄 노동이 없이 임노동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그림자 노동은 임금노동을 유지하는 경제활동 영역에 포함되는 노동임에도 공식 경제에서 배제된다. “가사노동의 가치는 오늘날 유통되는 화폐 모두에 반영되어 있지만, 화폐로 측정”하지도, 공식 경제에 보고되지도, 경제학의 탐조등이 비추지도 않는 “현대의 지하 경제를 이룬다” (이반 일리치, 『젠더』,45쪽) 그렇다면 이 무보수 노동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걸까?

그림자 노동의 수혜자는 따로 있다. 직장에서 받은 임금은 가정에서 주부들이 상품을 사는 데 소비한다. 상품 소비를 통해 생긴 이윤은 다시 기업주의 통장으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기업주에게만 유리하도록 짜여진 경제 구조이다. 이렇듯 최대한의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경제가 여성들의 노동을 공짜로 착취함으로써 여성을 자본경제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무급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야말로 자본주의 경제 성장을 이끄는 주역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자본 그룹의 조직적인 기획을 몰랐던 우리는 나와 가족, 사회를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내 노동력을 약탈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림자 노동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자본경제에 무료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젠더』에서 ‘그림자 노동’에 관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외로 여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대 경제에 있어 “그림자 노동의 형태로 들어가는 노동 투여랑은 임금노동보다 훨씬 많다” (이반 일리치 『젠더』,55쪽) 자본주의 경제가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여성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일리치가 왜 그림자 노동을 비공식 부문의 ‘식민화’한 노동이라고 했는지, 이보다 안성맞춤인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지불한 임금은 상품 판매로 이윤을 남겨 다시 제 주머니로 거둬들이고, 주부들의 노동은 거저 부리는, 현대판 노예제. (노예제는 주인 잘 만나면 먹고사는 문제가 보장이라도 됐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자본주의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에 환상을 품은 나머지 노동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닐까.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고 잘 살 수 있어. 가난한 건 당신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야”라는 자본의 논리를 장착한 채 힘들 때마다 세상 탓을 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펜데믹 상황에서 재택업무를 하는 딸들이 손주들을 유치원과 학원에 보내지도 못하고 돌보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을 때, 나는 은근 자책감이 들었다. 딸들이 지쳐있는 걸 뻔히 알면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잘하는 일인가. 누구는 친정엄마가, 누구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워준대, 라는 말을 들으면 괜스레 미안했다. 그렇지만 젊어서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었는데, 나이 들어서까지 등골이 휘도록 손주 돌봄을 해야 한다니. 이뿐인가. 아픈 남편을 보살피는 이중, 삼중의 돌봄까지 노년 여성들의 몫이다. 아이 양육에 있어 양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 외부 돌봄 서비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돌봄 서비스의 도움을 받으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건 당연지사. 돌봄 비용을 제하고 나면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저울질하다 결국 가정으로 돌아오고 ‘경단녀’가 된다. 어느 시정 책임자는 이런 돌봄 비용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싱가폴의 이주자 여성 인력을 수입해오자고 한다.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돌봄 노동은 엄마, 아내, 며느리, 딸로 이어지는 대물림을 통해, 나아가 값싼 이주민 여성들의 글로벌 돌봄을 통해, 여성에게서 여성으로 전가된다. 돌봄을 받아야 할 여성들의 고혈까지 짜내어 가면서 말이다.

 



돌봄노동은 공동체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
코로나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고 돌보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코로나에 걸렸을 때 죽음이 멀찍이 있다가 서서히 다가오는 게 아니라 바로 코앞에 있음을 실감했는데, 한창때의 청소년들도 이런 상황이면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겠구나 싶을 만치 바이러스의 힘은 강력했다. 온몸에 스르르 힘이 풀리면서 땅속으로 꺼져 드는 듯 의식이 흐려지던 경험을 하고 나자, 누군가 곁에서 돌봐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자 고민 아닌 고민이 생겼다. 앞으로 노환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나는 누구에게, 어떤 돌봄을 받아야 하나? 딸아이들은 제 옆으로 오라고 하지만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요양시설 같은 의료체계에 의존하기도 싫지만 자신할 수 없는 일. 솔직히 지금으로선 막연하다. 분명한 건, 코로나 사태를 통해 보았듯이 모든 인간에게 돌봄은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라는 점이다. 가사도우미, 간병인, 유치원 교사, 청소원 등등 사람을 돌보는 일은 모두 돌봄 노동에 속한다. 가정이든, 사회든 이러한 돌봄노동이 없으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돌봄 노동은 하찮게 취급해도 되는 ‘가치 없는’ 노동이 아님은 분명하다.

젠더 사회에서 돌봄은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자급자족하던 사회에서 돌봄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으로, 서로가 서로를,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것이 도리인 공동체의 의무였다. 여기에 성별 간 차별은 없다. 그러나 젠더가 붕괴된 산업자본 사회에서 돌봄은 ‘가치 없는’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고 여성들의 타고난 역할처럼 강요되었다. 이런 성차별적 사회에서 남성들은 돌봄을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 보이지 않고, 보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까짓 일’로 여긴다. 하지만 돌봄의 대상에 성별 구별이 없듯, 돌봄 역할에도 성별 구별이 없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돌봄을 왜 여성에게만 요구하느냐, 라고 했을 때 남성들 역시 억울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동 시간이 두 번째로 길다고 한다. 업무 과다로 과로사가 만연한 나라에서 버티고 사는 게 용할 정도이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예전 남성들에 비해 가사노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지만, 참여하고 싶어도 우선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늦은 밤 퇴근해 겨우 몇 시간 눈 붙이고 아침밥도 거른 채 또 다시 출근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돌봄을 젠더 이슈로 몰아간다고 해결이 될까 싶다.

그림자 노동이 이제 여성의 영역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일리치는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림자 노동은 점점 심화되고 빠른 속도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실례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 모든 분야에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면서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일자리를 잃은 남성은 여성과 같은 임금이 낮은 노동으로 내몰린다. 이처럼 그림자 노동은 “젠더 구분 없는 노동으로 뚜렷하게 바뀌어 가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의 장에서 경제적 차별의 장으로 중심 무대를 바꾸고 있다” (이반 일리치, 『젠더』, 58쪽)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림자 노동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의 영역까지 무한히 확장되고, 남녀 모두 경제적 차별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돌봄노동은 그림자 노동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유독 주부들의 돌봄노동에 주목했던 건 무엇 때문인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은(그 외 돌봄 노동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의 삶에 의식주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덕목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 사회는 주부들의 돌봄에 대해 경제적 가치로 폄하하고 위계화 하지만 주부들의 돌봄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노동이라는 점에서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사회가 주부들의 돌봄에 대해 눈감고 경제적 노동 영역에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건, 여성을 언제까지고 남성들의 2중대 역할에 머무르도록 놓아두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주부들의 돌봄노동은 더 이상 개인에게 떠넘길 사적 영역도, 여성만의 특정한 역할도 아니다. 공동체의 상생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과 동시에 공식적인 경제 부문의 장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사회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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