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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리치

[내인생의일리치] ‘상습화된 승객’을 거부하라!

by 북드라망 2024. 3. 15.

‘상습화된 승객’을 거부하라!

 

이소현

 


한 걸음도 걷고 싶지 않다 
이반 일리치는 교통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자력이동이다. 자신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용하여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모터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수송이다. 자력이동과 수송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동할 때 자율적 에너지를 사용하느냐 타율적 에너지를 사용하느냐다. 통상적으로 교통이란 자동차와 같은 수송수단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일리치가 자력이동을 굳이 교통으로 언급한 이유가 뭘까? 수송산업의 발전으로 타율적 에너지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자율적 에너지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였던 것 같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쓰러져있는 연두색 킥보드가 종종 발견되었다. 알아보니 킥보드 공유 서비스 이용자들이 두고 간 것이라고 했다. 킥보드는 전동배터리와 모터를 기반으로 시속 25㎞까지 나가는 이동수단으로, 가까운 거리를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보다 더 편리하다는 장점이 부각되어 이용자를 모았다. 이용자는 가입한 앱을 통해 출발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킥보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 자리에 킥보드를 두고 떠나면 된다. 이용하는 데 번거로움도 없고 걷는 거리를 최소화하여 편리하고 쉽게 목적지까지 가는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걷는 그 짧은 거리마저도 타율적 에너지에게 내어 주어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이러한 수송수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심벌”로 인식한다. (야마모토 테츠지, 『이반 일리치, 문명을 넘어선 사상』, 호메로스, 158쪽) 그러나 일리치는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배제되어버린, 인간의 타고난 자율적 에너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매혹적이라 생각하는 수송수단이 개인의 자유를 무한정 실현시켜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힘을 박탈하고 타율적 에너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리치에 따르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상습화된 승객’이다.



수송산업은 공간을 어떻게 변화 시켰나

 

상습화된 승객은 교통의 대부분을 수송에 맡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 잠재력에 대한 선천적인 지각 능력이 산업으로 인해 기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승객으로서의 역할을 벗어나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수동적으로 실려 가는 데 중독이 되어 인간의 두 발에 깃들어 있는 물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 그는 쫓기듯 내달리는 동안 지나가는, 창밖의 닿을 수 없는 풍경을 자기 영토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능력을 잃은 나머지, 그 영역에 자기 흔적을 표시하거나 자주적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나아가 타인을 자기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공간을 나눌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사월의책, 45쪽)

 


인간은 주어진 자연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살아가기 위한 모든 활동은 이동과 함께 이루어진다. 이동하고 활동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런 가운데 관계를 형성하고 공간을 조성하게 된다. 같은 종끼리 거주하는 공간이 비슷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동하면서 관계하는 것들에 따라 독특한 기술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그래서 “가축을 치는 풀라니족, 절벽에서 살아가는 도곤족, 물고기를 잡는 송가이족, 농사를 짓는 보보족”처럼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관계를 형성하여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닌 개성 강한 공동체들이 탄생하게 된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77쪽) 이러한 공동체는 인간이 각자 위치한 자리에서 사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흔적을 남기고 권리를 주장하며 영역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삶의 기예들이 문화로 진화해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후 인간과 자연의 상호적인 관계는 단절되었다. 자연은 스스로를 지키고 변형하고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 준 선물이었지만, 산업은 자연에 자원이라는 이름표를 새롭게 부여하고 산업 성장을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이용해왔다. 생산물들을 원활하게 순환시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수송체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도로, 철도, 항만, 항공, 전기, 통신 등은 없어서는 안 될 산업사회의 기반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우리가 오랜 세월 삶의 기술과 문화로 창조한 공간을 탈바꿈시켰다. 먹거리를 키우던 논밭,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던 정자나무 아래,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던 공터,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 등등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장소들이 산업 기반시설로 인해 해체되었다. 도로는 한 순간에 마을을 갈라놓았고 논밭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도 자신의 터전을 잃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고자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를 최대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정은 이후 건설업과 자동차산업이 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산업은 물류이동이 편리한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농촌이나 작은 도시를 떠나 이동이 편리한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수송의 발전으로 인해 시공간적 거리가 줄어들면서 지역 간의 거리가 좁혀졌으나 오히려 공간의 활용은 편협해졌다. 교통로가 신설되고 확충되면 자원과 사람이 더 넓게 순환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수송의 발전이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접근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면서 오히려 모든 자원과 사람이 과밀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을이나 작은 도시도 그들만의 시간, 먹거리, 문화와 같은 고유의 삶의 리듬을 상실한 채 있다. 하지만 교통의 발달과 함께 지역은 대도시에 붙어 있는 ‘주변’으로 전락하면서 그 고유함을 상실한 채 대도시의 삶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둘러보면 전철역을 중심으로 아파트와 상가들이 줄지어 있다. 더 가면 또 아파트와 주택들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슈퍼와 편의점, 작은 가게들이 있다. 어디나 이런 공간들의 끝없는 반복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철역과의 거리에 따라 집값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의 양식이 얼마나 앙상한지가 드러난다. 상품과 노동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 공간, 노동자가 일할 공간, 노동자가 밤새 쉴 공간,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소비할 공간이 나눠지고 그곳은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이 모든 것에는 인간들 간의, 혹은 인간과 공간 간의 상호적인 관계가 없다. 도시는 산업적 효율성에 입각해 기획되었고, 각각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공간은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지배 하는가
“어느 나라에서든 수송산업은 그 산업이 새로 만들어낸 지리와 일정표에 들어맞는 새로운 인간형을 주조한다.”(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만든다』, 사월의책, 42쪽) 수송산업이 지배하게 된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지닌 창조력을 발휘하길 원치 않는다.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 사는 우리는 수송수단이 없는 삶의 방식을 상상하기 어렵다. 타율적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빨라져가는 속도에 따라가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주문한 상품이 다음날 온다는 로켓배송, 전날 저녁에 장을 보면 아침 7시까지 문 앞에 도착한다는 새벽배송은 시간에 쫓겨 미처 챙기지 못한 생활용품이나 장보기를 해결해주는 일상에 단비 같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상품을 받는 시간이 하루 이상 걸리는 것은 견딜 수 없게 되고, 마트에 들러 직접 물건을 고르며 장을 보는 일도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해야 한다는 당위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빠르고 편리한 새로운 시스템에 바로 반응하고 금세 빨려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 신체를 조금이라도 덜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좀 더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만족시키는 세련된 방법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제 타고난 신체의 자율적 에너지를 사용해서 해결하는 일들은 오히려 저급한 방식으로 인식된다. 자가용을 이용하면 더 편하고 더 빠르게 갈 수 있고, 인터넷에서 클릭만 몇 번 하면 다음 날 내 손안에 다 들어오는데 굳이 두 발로 힘들게 더 느린 방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타율적 에너지를 부릴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율적 에너지의 사용이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했을까? 로켓배송, 새벽배송을 이용하고, 자가용을 구매하는 것은 빠른 속도를 선호하는 개인의 취향 때문이 아니다. 빠른 속도와 빠른 정보로 자신을 증명하는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타율적 에너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강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속도를 강요하는 사회를 따라가려면 새롭게 생산되는 서비스와 상품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 빠른 속도에 방해되는 것은 제거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신체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게 되었다. 내 두 다리로 세상을 만나서 생활공간과 생활시간은 구성했던 능력은 사라지고, 타율적 에너지에 의존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의 자유는 각자의 시공간을 만든다
얼마 전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가 있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한 요구는 21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목소리였지만, 늘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장애인은 오랜 세월 수인(囚人)처럼 살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수인처럼 사는 것을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비장애인처럼 제한 없이 이동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리치를 읽으면서 과연 전장연이 제기하는 문제가 ‘장애인’들만의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인간은 거의 동등한 이동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사월의책, 95쪽) 이 능력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타고난 권리다. 하지만, 상습화된 승객에게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나 타고난 권리는 이미 잊힌 듯하다. 타율적 에너지로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필요한 것이라면 내일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지만, 타율적 에너지에 대한 의존이 높아질수록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장애인 이동이 가로막힌 원인은 수송의 속도가 그들의 신체 속도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도 다르지 않다. 바쁘고 힘든 출근길을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신체의 자율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효율적 수송을 중심으로 구축된 공간은 인간의 이동능력과 거주능력을 통해 고유한 삶의 양식을 발휘하기 어려운 장소가 되었다.

자유로운 이동은 “수송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인간의 이동능력을 해치는 것과 그 능력을 향상시키는” 지점을 발견해야 가능하다. (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느린걸음, 96쪽) 먼저 교통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수송과 이동능력의 조화로운 지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길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나? 널찍한 차도 옆의 좁다란 인도는 우리의 이동 능력이 소외되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인도를 걷는 내내 차가 토해내는 소음과 매연에 시달린다. 또 인도를 벗어나면 차들이 불쑥불쑥 내 주위에 나타나 이리저리 피해야 한다. 걷는다는 것은 피곤하고 위험한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걷고 싶다. 지니고 있지만 발현하지 못하는 고유한 능력을 펼쳐보고 싶다. 그래서 결심해본다. 반경 2~3km의 거리는 차를 이용하지 않고 두 다리로 걸어보자. 반경 2~3km로 정한 이유는 1시간으로 왕복이 가능한 거리이고,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도로 확인해보니 멀다고 생각하고 자동차로 이동했던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정확히 인지하게 되다니 나에겐 신체가 느끼는 거리 감각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표준화된 생활공간과 생활시간에서 벗어나 나의 신체 감각을 깨우고 리듬 만들어가는 시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열심히 걸어보고자 한다.

 
필자 소개 : 이소현은 B움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부와 글쓰기는 한 몸이라는 채운샘의 말을 믿고, 깨닫게 된 소소한 무엇이라도 글로 옮기고자 스스로와 씨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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