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sex의 폭력을 넘어 젠더gender의 공존으로
장청
“남자가 두렵다”
폭력은 몸보다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폭력이라는 점에선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폭력이나 다를 게 없다. 세 치 혀가 더 마음을 패이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폭력의 심각성은 폭력을 겪을 때의 모멸감, 수치심, 무력감, 분노, 적개심과 함께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라는 자책감과 후회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엉켜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두고두고 괴롭힌다는 데 있다.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이중의 가해가 되는 것이다. 과거 가정폭력을 겪어본 나는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그 폭력 장면이 떠오르면 심장이 칼에 베이듯 싸한 통증과 함께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가 있다. 그런 까닭에 여성폭력과 관련된 사건들을 보면 예사롭게 지나칠 수가 없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영상도 그러했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마포 데이트 폭력 사건의 피해자 고 황예진 양이다. 그녀는 연인과 다투다 남자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됐다. 황양은 얼마나 맞았는지 의식을 잃은 채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남자는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피투성이 여성을 마대자루 옮기듯 끌고 다녔다. 잔혹한 장면을 지우기도 전에 며칠 뒤 뉴스에는 헤어진 여자 친구를 스토킹한 끝에 살해한 남성들의 수갑 찬 모습이 나란히 등장했다. 이처럼 여성 폭력 사건은 잊을만 하면 뉴스 화면에 등장하곤 한다. 폭력 피해 여성들은 위기 상황에서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 보낸 문자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남자가 두렵다”
2019년 ‘여성의 전화’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남성 파트너의 폭력에 의해 살해된 여성의 숫자가 무려 887명이라고 한다. 4일에 1명꼴로 여성들이 남자의 손에 죽어간 셈이다. 미수에 그쳐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배가 넘는다. 피해는 당사자인 여성들만 입는 게 아니었다. 가족, 친구, 지인까지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폭력 신고 현장을 다니는 경찰에 따르면 다른 폭력 범죄는 줄어드는 반면,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은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 부쩍 늘어난 카메라를 이용한 성범죄, 통신 매체를 이용한 음란 행동, 이 외에도 표면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 등을 포함하면 성폭력은 일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에서부터 8,90 노령의 할머니까지 전 연령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니, 여성들 입장에서는 여자라면 누구나 성폭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내가 여성 폭력 사건을 보면서 분노하는 지점은 여성을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바라보지 않는 남성적 사회에 있다. 폭력은 일반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폭력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은 지배와 복종의 권력관계이다. 이때 권력은 물리적 힘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지위 등을 포함하는데 여성 폭력은 남성이 자신의 힘을 무기로 여성을 누르려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 물질적으로는 삶의 질이 높아졌는데 왜 여성 폭력은 계속 늘어만 가는 걸까? 여성들은 언제까지 이와 같은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가?
“경제사회”의 불평등한 성평등
"1960년대 여성학의 연구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강간범, 남편, 의사 등이 여성에게 가하는 물리적 폭력이었고, 둘째는 임노동 여성들이 겪는 노동조건이었다. 두 종류의 연구에서 드러난 양상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고 똑같이 암담했다. 어느 나라건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차별은 경제 성장 속도에 비례해서 확대되었다. 즉 소득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여성이 임금은 덜 받고 폭력은 더 많이 겪었다. (…)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디에서나,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부유한 사회에서, 가난한 사회에서나, 라틴 아메리카에서나 북미에서나, 카톨릭에서나 개신교에서 일본 신도(神道)에서나 놀랍도록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젠더』, 사월의 책, 38~39쪽)
소득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덜 받고 폭력은 더 겪는,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이 성차별의 탄생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일리치는 이와 같은 성차별의 근원을 경제 사회가 남녀를 성별 구별없이 표준화한 동일자로 만든 데서 찾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남녀를 단일성으로 통합한 ‘젠더 없는 경제’이다. 단일성은 “남성과 여성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같은 현실을 느끼며, 겉모습은 달라도 욕구가 같다”(이반 일리치, 『젠더』, 사월의 책, 23쪽)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남녀는 생물학적 성차뿐 아니라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분명 다른 존재이다.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 사용하는 언어와 도구, 행동거지, 일하는 모습, 머무는 장소, 말투 등 성별 간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경제 사회는 성별 간의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남녀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만들어버렸다. 산업화 이전 자급자족하던 젠더 사회가 성별간 차이를 전제한 동등한 관계로 구성된 반면 산업자본 사회는 모든 시스템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경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화된 시스템에 맞는 역할로 변신해야 한다. 이것은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구조이다. 그럼에도 경제 사회는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동일 노동을 요구한다.
거기에 더해 자급자족하며 활동하던 여성들에게 새로운 성역할의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밥, 빨래, 청소를 하는 가사노동과 아이를 키우는 돌봄 활동은 경제 사회에서 기이한 형태의 활동으로 규정된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성이 없기에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노동이 아닌 것도 아닌 활동. 이처럼 공식적인 경제 영역에 편입되지 않으면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무보수의 노동 형태를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경제 사회’가 임노동을 ‘가치 있는’ 노동, 여성들의 집안일을 ‘가치 없는’ 노동으로 나누고 계층화한 결과 성별간에 성적 계급화가 고착화된 것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그림자 영역의 지하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확대되는데, 이와 같은 그림자 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다. 직장생활에 가사노동, 돌봄노동까지 다중의 역할을 감내하면서도 성차별을 받는 경제 사회의 여성들은, 일리치의 비유대로 어쩌면 식민화한 노동의 최전선에 있는 노예 계급은 아닐까? 성차별은 노동과 성을 계급화함으로써 생겨난 경제 사회의 산물로, 어느 시대나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있었지만 경제 사회에서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남성 아래인 제2의 성으로 취급한 사회는 없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여성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한편 여성을 볼모로 경제 성장을 이룬 사회에서 성적 폭력이 용인되도록 만든 것이다. 즉 성폭력은 성의 위계를 통해 구축된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에 기반하여 고착화되었다. 이 폭력의 문제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남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관념이 필요하다.
차별적 성에서 공생적 젠더로
경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야기된 폭력성을 해결하려면 이반 일리치가 제기한 ‘젠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 경제체제는 성적 차이를 지우고 새롭게 위계화함으로써 불평등한 관계를 공고하게 구축한 사회다. 양성 간의 구조적인 불평등은 산업자본 사회가 남녀에게 새롭게 부여한 성역할에서 비롯한다. “성역할이라는 개념은 젠더없는 방식으로 사회제도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반 일리치, 『젠더』, 사월의 책, 78쪽)으로, 젠더사회에서는 남자니까 혹은 여자라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고정된 성역할이 없었다. 당신이 네모거나 동그라미이거나 상관없이 젠더 사회의 규범 내에서 타고난 꼴대로 역량껏 제 몫을 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였다. 그에 반해 경제사회의 남녀는 제 몸에 맞지 않는 역할을 해내느라 삶이 고달프기 짝이 없다. 특히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엄마, 아내, 며느리, 딸, 직장인으로서 가중된 역할을 수행하느라 허덕이며 살아간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조차 잊은 채 말이다. 무엇을 위해 여성들은 이 많은 역할을 감내하는 것일까?
그 기준은 오직 하나! 호모에코노미쿠스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경제 사회는 “모든 상호작용을 교환관계로 환원함으로써 상보성이라는 바탕을 부정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경제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이반 일리치, 『젠더』, 사월의 책, 73쪽) 하려는 사회이기에 우리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관계에 있어 경제적으로 교환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계속 저울질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타고난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원치 않는 노동을 마치 숙명인 양 여기며 살아간다. 사실 경제 사회의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진 부부는 상호보완하는 의존관계이기보다는 임노동자의 노임을 수령한 대가로 안락한 환경과 잠자리, 식사, 그 외 잡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환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일리치가 ‘성’이 아닌 ‘젠더’를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경제 사회의 인간들은 왜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가. 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의 다양한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경제발전을 이루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진보라고 믿어왔는데, 호모에코노미쿠스의 맞춤형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영혼을 갈아넣는 일생이 과연 진보적이고 문명화된 삶인가? 소득이 늘어나고 물질은 넘쳐나는데 왜 성차별은 심화되고 폭력은 점점 증가하는가. 이게 우리가 원하던 삶일까?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이런 삶은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리치는 단언한다. 성차가 뚜렷한 남녀가 동일한 중성자로 묶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따라서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패러다임도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다! 우리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실현되면 성차별이 사라지고 평등사회가 이룩될 거라고 믿어 왔지만, 경제 사회에서 나타난 성차별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폭력성을 없애려면 경제를 축소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 한 마디로 경제 성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겠다는 건 환상이라는 얘기다. 소박하고 누추해 보일지라도 성차별 없고,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된 관계를 이루며, 마을공동체가 나서서 여성을 남성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던 사회. 그런 사회는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나는 그동안 남녀가 다 똑같은 존재이고 똑같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왜 여성은 남성 사회에 예속되어 억눌린 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젠더』를 읽은 후에야 젠더 사회의 남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화된 남녀관계와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도 여성은 종속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제가 통치하는 곳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여성은 오로지 제2의 성일 수밖에 없다”(이반 일리치, 『젠더』, 사월의 책, 184쪽) 는 것!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경제적 성’과 대척점에 있는 이 젠더의 차이성이다.
이 같은 차이에 주목할 때 비로소 남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폭력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겠는가. 젠더가 결여된 자본주의의 지배체제에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남녀 스스로도 자신을 ‘젠더’로 인식할 수 없다. 이런 깨달음과 함께 양성 간의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려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성별이 위계화된 사회 속에서 폭력성은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다.
필자 소개 : 장청은 동료들과 이반 일리치를 읽고 쓰는 중이다. 세상을 통찰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조급하지 않게, 꾸준히 공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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