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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입문-귀환”, 내면으로 향하는 경로 Why&How 인문학 강의 4세션 ‘종교와 신화’ 수강 후기

by 북드라망 2023. 5. 11.

“출발-입문-귀환”, 내면으로 향하는 경로
Why&How 인문학 강의 4세션 ‘종교와 신화’ 수강 후기


2023년 상반기, 북드라망과 북튜브 출판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Why&How 인문학 강의’가 김영 선생님의 ‘종교와 신화’ 강의로 모두 끝이 났습니다.^^ 서양철학(강사 : 정승연), 인류학(강사 : 오선민), 동양고전(강사 길진숙) 강의에 이어 김영 선생님께서 열띤 강의로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셨네요.

‘종교와 신화’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주신 김영 선생님은 최근 북튜브 출판사에서 나온 『바가와드 기타 강의』, 그리고 『여섯 가지 키워드로 읽는 인도 신화』라는 책을 통해 인도의 신화와 고전에 대한 지혜를 나누어 주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14년 동안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전공하고 비교신화학으로 학위를 받는 것과 동시에 수행을 통해 ‘참나’[Self]를 향하는 심층종교의 영역을 깊고도 치열하게 탐구하고 돌아오셨는데요. 이번 강의에서는 그런 경험에서 나온 귀한 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출발 이전에 갖추어야 하는 “제자의 자격”
 

“에고의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에고가 지어내는 그림자만을 보게 됩니다. 『바가와드 기타』를 비롯한 인도의 경전들이 예외 없이 에고를 비난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전마다 그 경전을 배울 수 있는 제자의 자격을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에고를 없애기 위해 우선은 에고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제자의 자격 요건이니까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아야,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가르침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_ 『바가와드 기타 강의』 254쪽


이번 강의는 ‘제자의 자격’을 갖추는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심층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반성적으로 구축되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에고(ego)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통합된 인격, 즉 참나[Self]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선은 부수고 찢어야 하는 에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직관의 지혜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종교적 지혜라고 하면, 계시나 일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인문학 공부와 수련 등을 통해 차곡차곡 자기에 대한 인식과 반성을 쌓아 나간 후에야 ‘심층종교’라는 직관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인 거죠.

김영 선생님은 이런 에고의 구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의미로 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요(이것을 ‘인생의 의미화’라고 부릅니다). 본인의 인생 궤적을 사례로 들어서 설명해 주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 때 겪었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왜 누군가는 범죄자가 되고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가’ ‘인간은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라는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몰두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시는데요. 교회를 나가기도 하고, 천문학이나 유전공학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하고, 사회운동이나 환경운동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인간이 운명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탐구의 와중에 ‘먹고살기 위해서’ 소방안전 엔지니어링 자격증을 따고 관련 일을 하면서, ‘결국 세상은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돈을 열심히 버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식으로 가치관, 혹은 에고가 구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의미화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면서, 누구나 ‘인생의 의미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제자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해 주셨는데요. 이런 제자의 자격을 갖춘 자는 이제 ‘출발’의 길로 떠밀리게 된다고 합니다.

 


발 - 입문 - 귀환

출발
신화학자이자 심층종교학자인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원질 신화’의 구조로 ‘출발 - 입문 - 귀환’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김영 선생님은 캠벨의 이 도식을 중심으로 강의를 이끌어 나가셨는데요. 앞서 말한 것처럼 에고를 구축하고 제자의 자격을 갖추게 되면, 에고를 부수는 직관과 ‘영웅’(‘힘세고 용감한 영웅’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나를 향해 나아가는 자)의 길로 떠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꼭 나이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중년이 되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건에 마주하게 되거나(가족의 죽음, 질병의 경험, 사회적 참사 등등), 이유 없는 잦은 실수로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 ‘전령관’이라고 부르는데, 이 전령관은 ‘제자의 자격’을 갖춘 이들을 출발하도록 추동합니다. 붓다의 사문유관(네 개의 성문 밖에서 늙음, 병, 죽음, 출가한 사문을 만난 경험)을 이런 ‘전령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데요. 붓다처럼 뛰어난 인물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전령관’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선생님 역시 화재로 인한 사회적 참사들을 접하게 되면서 건축 관련 엔지니어로 일하는 삶에 큰 불안을 느끼고 결국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고 하네요. 
 

사문유관 싯다르타 왕자는 사문유관의 경험을 통해 출가(출발)를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누구나 전령관을 만나게 되지만, 아직 제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거나 직관과 지혜의 영역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하면 ‘출발’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설사 출발하더라도 곧바로 ‘관문의 수호자’를 마주해야 한다고 합니다. 절의 입구에는 사천왕이 있고, 교회의 지붕에 가고일이 있는 것처럼('이 성스러운 공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공포를 견디고 삼가하는 마음을 가져라!'), 에고를 부수는 극심한 고통의 과정인 ‘입문’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지를 판단해 주는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는 것인데, 이 ‘관문의 수호자’는 엄격한 스승일 수도, 혹독한 통과의례를 주재하는 제사장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입문
이렇게 ‘관문의 수호자’까지 통과하고 나면, 이제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입문’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화에서 ‘찢기는(고통받는) 신’(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예수)이라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입문’ 과정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김영 선생님도 인도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을 듯한’ 고통을 몇 차례 겪었다고 합니다. 나를 규정하던 기존의 법과 질서, 그것을 통해 구축된 ‘나’를 갈가리 찢고 부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선지자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것, 오뒷세우스가 저승여행을 한 것(저승여행이라는 ‘입문’의 테마는 여러 신화나 종교 전통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 모두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입문 과정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입문과정을 거친 존재는 이제 ‘신성혼’(온전한 자기[Self]로의 통합)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래(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요나


김영 선생님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가면인 ‘페르소나’ 아래에 ‘그림자’(자기 내면의 추악한 면)와 ‘심혼’(아니마와 아니무스, 표면적인 자기와는 반대되는 성향의 ‘열등한’ 나)이 존재하는데, 입문과정을 거친 사람은 그림자와 마주하고, 심혼을 통합하면서(신성혼)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융의 ‘개성화’). 이렇게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면, 심혼을 통합했기 때문에 강함과 부드러움, 선과 악(선하지만 악의 측면을 모르지 않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등등이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인격을 남신과 여신이 하나가 된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온전한 존재가 되면, 이제 ‘나’를 넘어 ‘우리’로 ‘우주 전체’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몸’의 경계도 넘어설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실제로 ‘나’라는 경계를 어디까지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피부를 경계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내 폐 안에 들어있는 공기는 ‘나’일까요? 그럼 내 핏속을 흐르는 산소 분자는 ‘나’인가요?). 이렇게 우주 전체와 통합되는 경험을 ‘범아일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사트 치트 아난다’(이 순간에 의식으로서 존재하는 희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귀환
‘입문’의 과정을 거치고 지복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완성’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귀환’의 과정은 왜 있는 걸까요? 붓다 역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이 오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지혜를 ‘굳이 귀찮게’ 귀환해서 전해야 하는 것일까를 고민하셨다고 하죠. 오뒷세우스도 신들의 음료를 먹으면서 영원히 늙지 않는 존재로 영원히 늙지 않는 여신과 머물자는 유혹을 받았고요. 실제로 지복의 깨달음을 얻었다면, 거기에서 곧바로 귀환해서 그 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명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상으로 돌아와 가르침을 펴죠. 이때 깨달은 자들이 가져오는 것을 ‘전리품’이라고 부릅니다.

강의에서는 오뒷세우스를 중심으로 이 전리품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기존의 일리아스 시대가 전쟁하고 약탈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던 시대였다면, 이제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들을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게 된” 오뒷세우스는 상업과 무역이 중심이 되는 지중해 질서의 가치관을 상징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에 대한 다른 ‘이미지’가 바로 ‘저승 여행’에서 ‘귀환’한 오뒷세우스가 가져온 전리품이라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런 전리품은 흔히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기존의 법과 질서에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릿발 같은 증오’에 마주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렵게 고통을 겪으면서 지복의 세계를 발견한 이들이 굳이 이런 ‘증오’를 견디면서 세상에 지혜를 펼치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하지만 소명을 받아들인 이들(대표적으로 붓다)은 돌아와서 ‘가르침’을 전합니다.


세 가지 요가와 수행을 위한 비교적 안전한 방법

실제로 강의에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출발 - 입문 - 귀환’이라는 큰 줄기를 중심으로 정리하면서 다른 이야기들을 전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의 말미에 선생님이 풀어놓으신 ‘전리품’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힌두교 경전 『바가와드 기타』에 나오는 ‘세 가지 요가’인데요. 바로 ‘지혜의[즈냐나] 요가’, ‘행위의[카르마] 요가’, ‘신애의[박티] 요가’가 그것입니다.

‘지혜의 요가’는 명상과 관찰을 통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이 요가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 중에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으로(간단하다고 쉬운 것은 아니겠지요;) ‘수식관’(數息觀)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수식관은 자신의 숨을 관찰하는 것인데, 들숨날숨을 쉬는 동안 공기의 흐름이 가장 자극을 하는 곳에 집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허리를 펴고(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지만, 의자에 앉더라도 허리를 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네요) 공기가 코끝을 건드리는지, 오른쪽 혹은 왼쪽 비강을 건드리는지, 인중을 건드리는지를 관찰하고,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숨이 들고 나는 것을 따라서 의식이 흘러다니면 안 되고, 자극되는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부처가 제자들에게 전하기도 한 수천 년 된 수행법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이런 방법은 감정적인 측면이 강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집중하다보면 감정이 파도를 치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에는 행선(行禪), 걸으면서 나의 행동을 관찰하는 수련법도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바가와드 기타』에는 이런 명상을 통한 깨달음의 길 외에도 ‘행위의 요가’라는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몰입해서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결과에는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행위의 요가’의 핵심입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지이죠.

마지막으로 ‘헌신의 요가’라고도 불리는 ‘신애의 요가’가 있습니다. 명상을 통한 지혜의 추구나 의무에 대한 몰입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통해서도 지복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 * *


이렇게 네 개의 세션(서양철학, 인류학, 동양고전, 종교와 신화)을 모두 마치고 돌아보니, 네 강의 모두 ‘에고’를 부수고, ‘우리’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에 얽매인 나를 벗어나서 우주적 차원으로 지혜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본령임을 확인할 수 있는 뜻깊은 강의였다고 자평하고 싶네요^^ 네 세션, 총 여덟 강의 동안 지혜와 경험을 나누어주신 강사 선생님들, 그리고 열렬하게 들어주신 동학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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