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언어를 변주하라!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진~한(!) 연애를 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였고, 또 한 번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였다. 두 번의 연애를 마친 나의 소감은 “연애는 공부보다 어렵다!”이다. 매번 서로에게 시간을 올인(!) 해야 하고, 때 되면 해주어야 할 선물과 이벤트가 필수 조건이 되어 버린 연애방식이 지루했다. 무엇보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 소모가 힘이 들었다. ‘아… 연애가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던가…’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어찌 막으랴! 나는 지금 세 번째 연애 중이다.
선물과 이벤트가 필수 조건이 되어 버린 연애방식이 지루했다. 무엇보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 소모가 힘이 들었다. ‘아... 연애가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던가...’
전달이 아니다! 명령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생수부(생활 속의 수학부)라는 동아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전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고, 나는 반에서 끝자락 정도인 낙제생이었다. 그런데 나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 그녀는 1년 동안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수능을 앞둔 어느 날 친구들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의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수능이 끝난 후 나는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그녀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약간의 열등감 때문에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했다. 학교생활부터 동아리 활동까지! 귀가 시간은 물론이고 특히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돌이켜보면 어릴 때가 더 ‘꼰대’였던 것 같다…)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는 명령어이다.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인 공통감을 정의할 게 아니라 명령어를 발신하고 수신하고 전송하는 저 가공할 만한 능력을 정의해야만 한다.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148)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를 정보교환이나 소통이 아닌 ‘명령어’로 본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많은 정보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끼지만 오히려 정보는 명령어를 준수하고 지키기 위한 최소치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의 명령어 안에는 많은 언표들이 남아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는 언어가 발화(發話)되는 순간,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로서,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로서 지켜야 하고 준수해야 할 많은 언표들이 명령어 밑에 깔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성과 단절하기’ ‘연락은 빠르고 자주 하기’ ‘기념일 빼먹지 않기’ 등등. 이러한 언표들이 지켜져야 평화로운 사랑이 유지된다.
명령어는 일종의 ‘권력’이다.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행동지침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지키지 않았을 때는 매우 화를 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사실 나는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먼저 좋아한 것은 그녀였고, 우리 둘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부과하는 명령어는 많아지고 심해졌다. 명령어가 지나치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3년 남짓 연애를 한 끝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는 언어가 발화(發話)되는 순간,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로서,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로서 지켜야 하고 준수해야 할 많은 언표들이 명령어 밑에 깔리게 되는 것이다
회사가 감옥으로!
3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다시 한 번 나에게 연애의 바람이 불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2년 째 되던 해 같이 일하던 파트너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전 여자친구에게 부과했던 명령들을 그대로 실행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에게 파트너 이상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어설픈 행동 때문이었을까. 얼떨결에 그녀와 연애를 시작했다.
언표행위의 사회적 성격을 내재적으로 정초하려면 언표행위가 어떻게 그 자체로 집단적 배치물과 관련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언어학의 기본전제들」, p156)
‘맛집 가기’ ‘주말에 쇼핑하기’ ‘기념일에 선물 챙기기’ ‘영화 보기’ 등. 평범한 연인들이라면 다들 하는 연애코스다. 사회도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다. 파트너에서 연인으로 관계의 배치가 바뀌는 순간 우리는 사회가 배치한 연애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녀는 사회가 정한 연애방식을 아주 과하게 실행하는 여자였다. 퇴근 후 나는 그녀와 늦은 시간까지 맛집을 찾아다니며 계속해서 먹어야 했고, 주말이면 온종일 백화점에서 쇼핑을 해야 했다. 기념일에 주는 특별한(?) 선물은 서로를 더욱 옭아매는 족쇄처럼 작용했다.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그녀의 관심이 온통 성형뿐이었다는 것이다. 예쁘게 먹고 예쁘게 쇼핑을 하기 위해 그녀는 매주 성형외과를 갔다.(왜 가까운 인천이 아닌 강남이나 압구정으로 가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시술이 끝날 때까지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 간혹 그녀의 성형을 막아설 때면, “다 오빠를 위해서야!”라고 화를 내며 길거리에서 폭언을 쏟아 부었다. 오로지 사회가 배치한 연애 방식과 얼굴을 하기 위해 그녀는 모든 욕망을 쏟아 부었다. 남자친구라는 것도 자신을 꾸미기 위한 악세사리였고, 성형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감시’였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시’했다. 다른 여직원과 업무상 하는 대화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시간과 동선을 파악했고, 심지어 공부하는 시간마저도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와 보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회사는 나에게 감옥처럼 답답한 공간이었다.
이 행위들은 특정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이 사회의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 같다. (…)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체들을 변용시키는 능동작용-수동작용(les actions et passion)과 몸체들의 비물체적 속성일 뿐이며 언표의 “표현된 것”인 행위(actes)를 구분해야만 한다. (「언어학의 기본전제들」, p157)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명령어가 발화되었을 때, 공간과 몸체가 변형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의 감시 속에 회사가 감옥으로 변하는 순간을 ‘순간적인 비-물체적 변형’이라고 한다. 나의 몸체가 죄수자로 표현되는 것도 비-물체적 변형이다. 언표나 언표행위는 그 자체로 비-신체적이고, 명령어로부터 표현된 것이지만 그대로 몸체의 속성인 것이다. 그녀 앞에서 늘 수동적이었던 나는 그녀가 퇴사하던 날 바로 이별을 통보했다.
한 번은 차이고, 한번은 차고, 다시 솔로가 되자 해방감을 느꼈음에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외롭고 허전했다.
다르게 연애하고 싶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나의 연애 세포는 점점 죽어갔다. 대체 언제까지 먹고, 쇼핑하며, 서로의 시간을 독점하는 연애방식에다가 우리의 욕망을 포개야만 하는가. 매번 이런 배치 안에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사람만 바뀔 뿐 똑같은 대화밖에 할 수 없다. “다수파는 권력 상태 또는 지배 상태를 전제로 한다.”(「언어학의 기본전제들」, p203) ‘다수어’란 생성이 없고 표준적인 언어로서 사회가 장악한 권력의 언어이다. 세 번째 연애는 사회가 배치한 연애 코스에서 벗어나 다수어에 포획되지 않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내성적인 그녀는 본사가 아닌 지사에서 근무를 한다. 우리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한동안 사내 메신저로만 대화를 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고,(이것이 언어의 힘!) 꾸준히 사심을 표현한 노력(!) 끝에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가 처음인 그녀와도 역시 보편적인 연애코스를 밟아갔다. 카페가고, 영화보고, 밥 먹고. (…) 특히 주말은 직장을 다니는 우리에겐 형식적으로라도 꼭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슬슬 연애가 지루하게 흘러갈 때 쯤, 나는 그녀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말을 했다. 그녀는 놀라기도 하면서 내가 하는 공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천개의 고원』을 시작으로 내가 읽었던 여러 책을 가지고 주말에 세미나를 했다. 카페, 지하철, 영화관 등. 책을 펴고 세미나를 할 때면 우리가 앉아 있는 공간은 ‘공부방’으로 순간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이루었다. 연인 관계에서 동학(同學)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배치가 생겼고, 새롭게 대화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카페, 지하철, 영화관 등. 책을 펴고 세미나를 할 때면 우리가 앉아 있는 공간은 ‘공부방’으로 순간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이루었다. 연인 관계에서 동학(同學)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배치가 생겼고, 새롭게 대화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다수파 양식(=長調)과 소수파 양식(=短調)은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연속적 변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p206)
다수어 속에서 생성되고 변주되는 언어를 ‘소수어’라고 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는 『다르게 살고 싶다』(박장금, 2017, 슬로비) 라는 책으로 ‘사주명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음양과 오행, 천간과 지지, 육친 등. 사주명리 안에는 삶을 다양하게 해석해 주는 코드들이 존재한다. (金)기가 없어 맺고 끊는 것이 부족한 나, 목(木)기가 없어 소심한 그녀. 명리의 코드를 가지고 서로 놀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보편적인 언어가 명리의 코드들과 섞여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연애도 삶이다. 언어가 바뀌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고, 동시에 사회가 정한 연애의 배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에 포획되는 연애를 하지 않게 되었다. 성형에 욕망을 투여하지 않을 뿐더러 형식적으로 만나 쇼핑을 하면서 쾌감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특히 그녀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주말에 하는 공부를 응원해 주고, 내가 쓴 글을 보고 코멘트를 해준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연애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다. 연애와 삶이 분리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고갈되는 지점이 아닐까.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명령어를 ‘사형선고’라고 한다. 다양한 코드로 언어를 변주하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항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명령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사형선고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떻게 명령어가 감싸고 있는 사형 선고를 피하고 도주의 역량으로 펼치고 나갈 것인가’를 제시한다. 그러니 다수어에 포획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다양한 배치를 만들고 다양하게 언어를 변주해야 한다.
우리는 명령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사형선고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떻게 명령어가 감싸고 있는 사형 선고를 피하고 도주의 역량으로 펼치고 나갈 것인가’를 제시한다
다르게 연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애라는 배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어떻게 연애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명령(!)한다. 언어를 변주시켜라! 그러면 사회가 명령하는 배치 속에 욕망을 투여하고 서로를 구속하는 연애방식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글_고영주 (감이당)
'지난 연재 ▽ > 나의 삶과 천개의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삶과천개의고원] 다양한 ‘얼굴’로 노래하라! (0) | 2020.06.03 |
---|---|
[나의삶과천개의고원] ‘보험’,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0) | 2020.05.13 |
기관 없는 몸체와 다이어트 (0) | 2020.04.08 |
30평 아파트, 그곳에선 무슨 일이? (0) | 2020.03.11 |
아버지와 ‘다양체’ (0) | 2020.01.08 |
[천의고원읽기] 파괴하고 다시 재건하고 (0) | 2019.1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