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다양체’
한 국회의원의 발언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이부망천’, ‘이혼하면 부천에 살고 망하면 인천에 산다.’를 줄인 말이다. 나는 인천에서 살고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셔서 아버지와 동생과 셋이 살았고,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월세 단칸방을 전전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 때 생각을 떠올리며 ‘이부망천’ 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씁쓸했다.
동생이 몇 해 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우리는 한 집에 살면서도 바빠서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저녁을 먹는 것이 고작이다. 두 시간 남짓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 시간은 늘 흥미진진하다. 그만큼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매우 좋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걱정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억압과 환상
아버지는 원래 전기 전문 관련 사업을 하셨다. 그런데 사업이 실패하면서 현장잡부로 일을 하셨다. 찢어진 작업복을 입고, 덜컹거리는 중고트럭을 타고 지방 곳곳의 현장을 다니며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창피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일을 열심히 하신다. 그런데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급식비를 마련해 주셨지만, 동생은 무료급식 대상자로 배식을 받을 만큼 사정이 어려웠다. 월세 집을 옮길 때마다 매번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돈을 빌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가족보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씀씀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집안 형편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어머니의 주사였다. 어머니는 술을 마시면 아버지와 늘 싸우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피해 집을 나가는 일이 잦았고, 나와 동생이 싸움의 잔해들을 치워야만 했다. 술을 마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분노로 가득 찼고, 무책임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학교공부는 아예 하지도 않았고 매일 친구들과 거리에서 방황을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반항이었다. 조용한 성격의 동생은 집에서 혼자 게임중독에 빠져 지냈다.
나는 하루빨리 부모님이 이혼하길 원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추석 명절날 어머니를 뺀 나머지 가족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고, 나는 강력하게 부모님의 이혼을 주장했다. 그 후 나의 주장대로 부모님은 결국 이혼을 하셨다.
누구보다도 부모님의 이혼을 원했던 것은 나였다. 그런데도 해체된 가족의 모습은 나에게 창피하고 숨겨야 할 콤플렉스였다. 습관처럼 친구들의 가족과 비교를 했고, 겉으로는 화목한 척, 아닌 척 남을 의식하면서 나의 가정사를 숨겼다. 다른 가족에 대한 열등감은 스위트 홈의 환상으로 전이되었다.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진 아버지와 가정적이고 자상한 어머니.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자녀들. 이렇게 4인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이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상성에서 배제되었다는 억압은 스위트홈의 환상으로 바뀌었고, 이것들은 10대 내내 나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다 엄마아빠 때문이라고?!
부모님이 이혼하신 뒤로 나에게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복도에 사람이 지나가거나 계단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날 때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잠이 오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증상에 시달렸던 것일까.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가장 위대한 기술, 즉 분자적 다양체의 기술을 발견하자마자 부단히 그램 분자적 통일체로 돌아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익숙한 주제들인 유일무이한 <아버지>, <자지>, <거세>, 등으로 되돌아간다(프로이트는 막 리좀을 발견하려는 찰나에 항상 뿌리고 돌아갈 뿐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61)
나의 증상을 프로이트에게 상담한다면 그는 “다 엄마 아빠 때문이야!”라고 말해 줄 것이다. 밤에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싸운 장소가 계단이었고, 술에 취한 어머니가 복도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무의식이 억압된 이유는 어린 시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의 해석에 적극 공감이 갔다. 그의 말대로 부모님이 정말 그렇게 싸웠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자로서 무의식이 ‘다양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다양체란, 다양한 출구가 존재하는 일종의 공간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다양체를 ‘엄마와 아빠’라는 하나의 ‘통일체’로 환원시키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말고는 모든 출구를 봉쇄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이런 해석을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무의식은 ‘엄마와 아빠’라는 통일체로 환원될 수 없고, 어린 시절의 억압과 미래의 환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무의식은 사막이다. 사막 안에는 한 마리의 늑대가 아닌 여러 마리의 늑대가 무리를 지어 서식한다. 사막에 정상적인 가족이란 없으며 부모 따위도 없다. 오직 ‘여럿’이면서 ‘하나’인 부족과 유목민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이면서 부모가 아닌 방식, 자식이면서 자식이 아닌 방식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혼 후 일과 살림을 함께 책임지는 아버지를 보며 이제는 동생과 내가 스스로 빨래, 청소, 설거지 등등. 살림살이를 직접 꾸려나갔다. 뿐만 아니라 동생과 나는 아버지로부터 경제적 자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대학이 아닌 취업 기술을 배워 취직의 길을 선택했다.(원래 둘 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하기가 쉬웠다.^^)
늑대-되기에서 중요한 건 집단의 설정이다. 특히 무리 또는 여러-늑대(=늑대-다양체)와 관련한 주체 자신의 위치설정, 무리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는 방식, 무리에 대해 취하는 거리, 다양체(=늑대 무리)에 결부되거나 결부되지 않는 방식이 중요하다.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p64)
동생과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면서 아버지도 우리들로부터 자립을 하게 되었다. 이제 더는 아버지만이 살림과 부양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예전에는 어색했던 동생과도 가까워 졌다. 집안 일 외에도 일, 사회문제 등등. 나눌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집단의 설정을 강조하는데, 동생과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이제는 함께 집을 꾸려나가는 동거인으로 변하였다. 우리 셋은 룸메이트로, 친구로, 애인으로 점점 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라는 기호는 점점 사라져 갔다. 의무와 보호로부터 벗어나 부모와 자식이라는 언표에서 해체되니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체했을 때 보이는 것
스무 살 때 아버지와 전라도 광주에 있는 수도원으로 일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수도원은 내비게이션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쪽에 차를 대고 트럭 안에서 작업복을 갈아입고, 장비들을 하나하나 꺼내고 옮겼다. 예전에 내가 부끄럽고 외면했었던 아버지의 기계들이다.
늘 상대적이고 공존하며 서로 침투하고 자리를 바꾸는 다양체들의 유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특정한 순간에 <나는 너를(또는 다른 무엇을) 사랑한다>라는 언표를 생산하는 배치물을 형성하기 위해 개입하는 기계들, 톱니바퀴들, 모터들, 요소들의 유형을 구분해야 한다.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p77)
아버지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끼우고 조이고 연결하면서 우리는 쉬지 않고 대화를 했다. 여러 지방을 다니며 겪었던 사건과 동생과 나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시절의 대화였다. 그 시절 이 기계들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했다. 이것들은 아버지의 신체이자 일을 하는 동안 나의 신체이기도 했다. 이것들이 없으면 아버지와 나는 일을 할 수 없으며, 아무 대화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계가 직접적으로 나와 아무 관계가 없지만 나와 절대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사랑하게 된다.
아버지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 중에는 친구도 있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힘을 갖고 계신다. 어떠한 위계도 경계도 없이 사람을 대해주신다. 그래서 아버지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친구들과도 친하다. 인천에서 아버지가 친구들과 일을 할 때면 우리 집은 베이스캠프가 된다.(함께 일을 하지 않는 친구들까지 찾아온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친구 분들은 요리며, 청소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함께 자리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그 순간에는 마치 감이당의 식사장면을 보는 듯하다.
아버지와 나는 늘 이야깃거리가 많다. 내가 공부로 맺은 인연들의 이야기부터 아버지의 연애사까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버지와 나는 매번 다르게 거리를 취하고, 다른 속도를 내며 서로를 가로질러 간다. 나는 더 이상 가족주의적이고 경제적인 사랑으로 아버지를 환원시키지 않는다. 환상과 소유는 아버지와 내가 가지고 있을 다양한 출구들을 봉쇄시킬 뿐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해체되고 다양하게 관계 맺길 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부모와 자식에게만 해당이 되겠는가. 우리 모두가 다양체를 가지고 있다. 해체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서로의 다양체를 포착할 수 있다. 서로에게 더 많은 출구를 열어주고 더 많은 고유한 본성을 찾아내 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p76)
글_고영주(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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