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없는 몸체와 다이어트
유튜브 방송 콘텐츠 열에 일곱은 전부 ‘먹방’이다. 먹방 BJ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음식은 모조리 다 먹어 치우겠다는 기세로 먹는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혼자서 먹는 BJ의 위(胃)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고 그들의 몸이 뚱뚱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마른 사람도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끼에 많은 양을 먹기 위해 온종일 굶고 운동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먹방은 이제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거의 모든 매체를 장식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단순히 빠르고 많이 먹는 것을 넘어 다소 ‘엽기’적인 방법으로 먹는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도 아니다. 그럼에도 먹는 것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밥’, 그 참을 수 없는 욕망!
나는 식탐이 많다. 어렸을 때,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항상 “그놈 참 복스럽게도 먹는구나!”라며 칭찬(!)을 하셨다. 어떤 사람은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면 없던 식욕도 생긴다고 했다. 음식을 많이 먹고 또 맛있게 먹는 것은 나에게 특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많이 먹진 않는다. 피자, 치킨, 햄버거 등. 인스턴트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 내가 주로 많이 먹는 것은 다름 아닌 ‘밥’이다. 나는 도무지 밥의 양 조절이 되지 않는다. 반찬의 양이나 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김치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반찬은 그저 거들뿐…) 하루는 퇴근 후 식탁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배가 불렀는데도 그릇에 밥을 계속 옮겨 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밥을 먹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밥솥은 텅 비어 있었다. 외출하셨던 아버지는 밥솥을 설거지하는 나를 보고 “사람이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닌데!”라며 혀를 내두르셨다. 그 순간 뭐에 홀린 듯이 밥을 먹는 내 자신이 무섭게 느껴졌다.
CsO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며 욕망에 고유한 고른판이다(여기서 욕망은 어디까지나 생산 과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욕망에 구멍을 내는 결핍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쾌락 등 어떠한 외적인 계기와도 무관하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96쪽
욕망이란 언제나 결핍을 전제하고 쾌락을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배고픔이라는 결핍을 참지 못해 밥을 많이 먹고, 포만감이라는 쾌락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결핍을 쾌락으로 채우지 못했을 때, 그것이 바로 ‘억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대한 나의 해석을 완전히 뒤집는다.
저자들은 욕망이란 쾌락이나 결핍이 아닌 그 자체로 충족되는 승리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은 결코 결핍을 내포하지 않고, 쾌락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욕망은 ‘생산’을 추동하는 힘이다. 몸이 피로하면 쉬고, 배가 고프면 즐겁게 밥을 먹어야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한데도 밥을 잔뜩 먹었고 포만감과 동시에 자괴감만 들었다. 결국 결핍은 더욱 심화되었고 내 신체는 밥에 중독되었다.
CsO가 고른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고른판은 홈이 파인 것과는 달리 무엇과도 접속할 수 있는 판이다. 사람으로서 음식과 접속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당연하다. 그러나 오로지 결핍과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면 욕망은 ‘밥 중독’이라는 홈이 파인 곳으로만 흐르게 될 것이다.
복근이라는 유기체를 향하여!
정신없이 밥을 먹을 때, 내 눈이 향한 곳은 웃기게도 유튜브에 나오는 다이어트 영상이다. TV 속 아이돌의 잘 빠진 몸매를 보라. 길쭉한 키에, 날씬한 허리! 거기다 배에 ‘왕(王)’자가 뚜렷한 복근이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나는 키도 작고 허벅지와 허리는 너무나 두껍다. 거기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올해는 꼭 살을 빼고 말거야!” 매년 1월 1일, 다이어트를 다짐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지방 흡입 빼고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다. 헬스는 기본이고, PT, 복싱, 각종 스포츠 등. 동호회까지 가입하며 운동을 했다. 그뿐이랴. 살이 빠진다는 식이요법도 해봤다. 닭 가슴살은 필수이고 몸의 독소를 빼주는 디톡스도 해봤다. 간헐적 단식과 심지어 한방 다이어트까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아이돌의 몸매를 갖기 위해서였다.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몸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몸체의 적이다. CsO는 기관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합성되고 장소를 잡아야만 되는 “참된 기관들”과 연대해서 유기체, 즉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화와 대립하는 것이다.
- 같은 책,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05쪽
들뢰즈와 가타리는 시인이자 배우인 앙또넹 아르토의 ‘기관 없는 몸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온다. CsO(Corps San Organ)란 기관 없는 몸체다. CsO의 적은 기관이 아니다. 바로 유기체다! 유기체란 기관이 일정하게 조직화되고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라는 기관은 반드시 살이 없어야 하고 왕(王)자가 선명한 복근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몸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다! 볼록하게 나온 배, 군데군데 덕지덕지 살이 붙은 내 몸은 시대를 대표하는 몸과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든 단단하고 선명한 복근을 가지고 싶었다. 그것도 단기간에! 그래서 그토록 좋아하던 밥을 끊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밥은 끊었지만 밥만 먹지 않았을 뿐 전보다 라면과 고기를 더 많이 먹었다. 결국 두 달 만에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다시 밥 중독으로 되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동호인들과 운동이 끝난 후 먹는 야식과 술은 점점 내 몸을 망가뜨렸다. 다이어트 실패 후 나에게 돌아온 것은 비싸게 끊은 헬스 비용 청구서와 자괴감이었다.
CsO를 너무 격렬한 동작으로 해방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지층을 건너뛰면 판을 그려내기는커녕 당신 자신을 죽이게 되고, 검은 구멍에 빠지고, 심지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같은 책,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309쪽
『천개의 고원』에서 몸이란 유기체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은 내가 이상적인 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돌의 복근을 부정한다. CsO는 욕망이다. 오로지 생산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 수행하는 사람들이 단식을 하는 것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것도, 날씬한 몸을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강렬한 욕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CsO란 시대가 심판한 정상성에서 벗어나고 달아나려고 하는 몸체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나를 보며 불쾌해할 것이다. “입이라는 기관으로 고작 배를 불리는 일에만 집중하고, 배라는 몸의 기관을 복근이라는 유기체로 만들기 위해 혹사시키다니! 뚱뚱하다고 연애를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글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미련하기는….” 유기체에 대한 욕망, 그것은 쾌감은 쾌감대로 누리고 아이돌의 날씬한 몸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었다. 나의 삶은 유튜브에 나오는 먹방 BJ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유기체에서 기관 없는 몸체로!
CsO를 만들 수 있을까.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도(道)가의 방중술을 예로 든다. 남성과 여성이 성관계를 할 때 남성은 사정하기 직전에 사정을 멈추어야 한다. 욕망이란 단순히 생식의 연장선이 아니기 때문이다.(이게 가능하다고?) 이렇게 어려운 절제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CsO는 끊임없는 수련(修練)과 절제를 통해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극한의 다이어트가 아니다. 쾌락에 포획되지 않는 절제와 밥 한 숟가락을 더는 실천이 필요하다. 살이 찌고 안 찌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핍과 쾌락이라는 충동을 제어하고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신중해야 한다. 결코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머릿속에만 있는 관념도 아니며 허황한 다짐도 아니다. 오로지 실천이다. CsO는 신중하게 실천할 때만이 만들어진다.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하나(또는 여러 개) 가지고 있다. (…) 그것은 하나의 수련(修練)이며, 하나의 불가피한 실험이다. 그것은 당신이 그 실험을 도모하는 순간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당신이 도모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 그것은 결코 관념, 개념이 아니며 차라리 실천, 실천들의 집합이다.
- 같은 책,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87쪽
조카가 태어난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조카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루고 있다. 어디까지가 손목이고 발목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목도 없다. 허리도 없다. 조카는 자신의 몸을 유기체로 조직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조카의 입은 그저 먹기만 하는 기관이 아니다. 앞을 볼 수 있는 눈이기도 하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피부이기도 하다. 거기다 그 입에선 아무런 형식을 갖추지 않는 언어들이 흘러나온다.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기관이 될 수 있는 몸체다.
조카는 요즘 뒤집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어쩌다가 뒤집기라도 하면 땅에 닿은 배에 힘을 주고 앞으로 기기 위해 또다시 낑낑 댄다. 조카는 욕망 덩어리(흘러내릴 것 같은 조카의 살을 보고 있으면 몸이라기보단 덩어리 같다)이다. 결핍과 쾌락을 모르며, 목적이나 이상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뿐이다. 배가 고프면 울고, 배가 부르면 먹지 않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똥을 싸고, 잠을 자고, 소리를 지른다. 기관 없는 몸체는 중단 없는 욕망이다. 조카는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멈추지 않은 채 자신을 구성해 나간다. 그러면서 매우 신중하다. 누군가 자신을 안을 때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는 신중하게 쳐다보고 안심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웃어준다.^^
CsO는 강렬함들에 의해서만 점유되고 서식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강렬함들만이 지나가고 순환한다. (…) 그것은 강렬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강렬한 모체, 강렬함=0이다.
- 같은 책,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93쪽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왜 CsO를 강렬하다고 할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매혹될 때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부분’에 매혹되는 것이다. 다른 기관이 될 수 없는 유기체는 강렬함이 없다. 오로지 CsO에만 강렬함이 존재한다.
내 앞에는 지금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밥’이 차려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조카가 곤히 자고 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나의 시선도 밥과 음식보다 자고 있는 조카에게 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렬함이다. 이 자그마한 몸체에는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함이 흐르고 있다. 우리도 충분히 CsO를 만들 수 있다. 다소 많은 어려움이 수반될 수 있지만 말이다!
글_고영주(감이당)
'지난 연재 ▽ > 나의 삶과 천개의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삶과천개의고원] 지난 10년간 대체 무슨 일이? (0) | 2020.07.01 |
---|---|
[나의삶과천개의고원] 다양한 ‘얼굴’로 노래하라! (0) | 2020.06.03 |
[나의삶과천개의고원] ‘보험’,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0) | 2020.05.13 |
30평 아파트, 그곳에선 무슨 일이? (0) | 2020.03.11 |
[나의삶과천개의고원] 연애, 언어를 변주하라! (0) | 2020.02.12 |
아버지와 ‘다양체’ (0) | 2020.0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