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얼굴’로 노래하라!
100명쯤 되어 보이는 걸그룹 연습생들이 “Pick Me, Pick Me”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연습생 전부가 카메라 ‘정면’만을 응시하며,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이 춤을 추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00명 모두가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귀에는 하나의 목소리로만 들린다. 대체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되질 않는다.
아이돌은 가수일까? 댄서일까? 요즘은 가창력보다 나이와 얼굴, 몸매, 특히 춤이 우선시 된다.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나이가 많거나 뚱뚱하고 춤을 추지 못하면 데뷔할 수 없다. 데뷔를 하려면 어떻게든 아이돌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맞는 몸과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대중들로부터 많은 표를 받을 수 있다. 노래가사는 어떠할까. 아이돌의 노래가사는 내용의 형식만 다를 뿐 전부 ‘성(性)적 욕망’만을 담고 있다. 사실 내가 아이돌의 얼굴과 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 전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만들어’진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매일 보는 광경이 있다. 바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화장하는 모습이다. 분주해 보이지만 나름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 같다. 무릎에 올려 진 파우치에서 파우더를 꺼내 얼굴을 하얗게 칠한다. 그 다음 마스카라로 눈썹을 최대한 높이 올린다. 마지막은 분홍빛으로 볼터치를 하고, 입술을 붉게 칠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화장을 다 마친 학생들의 얼굴은 마치 ‘어릿광대’같다.(까만 목과 하얀 얼굴의 경계가 분명하다) 광대 같은 얼굴에 교복이라니…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조금 충격이다.
의미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 안 된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 얼굴, 즉 흰 벽-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는 흥미롭다. (…)얼굴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의 외부를 둘러싼 표피가 아니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321쪽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흰-벽’에 ‘검은 구멍’(눈, 코, 입, 귀)으로 이루어진 ‘얼굴성’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얼굴은 생각하고 느끼는 피부가 아니라 사회적 배치물의 의미들이 기입되는 ‘흰-벽’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배치물이 나를 내면화 시키는 주체화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얼굴은 그저 타고나거나 공감을 하도록 표정 짓는 기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미들을 기입하고 주체화가 일어나는 구멍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렇다면 요즘 ‘예쁜 얼굴’의 기준이 되는 의미는 어떻게 기입되며 어디에서 주체화가 일어날까. 어린 나이를 상징하는 교복, 비현실적인 마른 몸매, 본래 얼굴과 전혀 다른 메이크업 등. 아침마다 보는 여학생들은 최대한 아이돌의 얼굴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애를 쓴다. 화장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마저도 아이돌의 얼굴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얼굴은 TV, 드라마, 광고 등, 사회가 내보내는 의미들로부터 얼굴을 획득하고, 자신의 얼굴을 내면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퇴근할 때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일에 찌들어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귀가하는 여학생들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생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은 어떻게든 오랜 시간 화장을 지속하기 위해 온종일 학교에서 화장한 듯하다. 하지만… 화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뻐지기 위해 다소 끔찍한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온 몸이 다 얼굴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실업계 여고와 계약을 맺고, 공석이 생길 때마다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을 채용하고 있다. 채용된 학생들은 졸업을 할 때까지 교복을 입고 출근해야 한다. 학교보다 회사가 더 자유로우니 화장은 더욱 진해진다. 거기다 자극적인 향수까지! 업무를 지시하는 입장에서 사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다.
19살 여직원의 한 달 월급은 200만 원 정도다. 거기다 보너스와 수당까지 합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스무 살이 되고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을 때, 돈은 여직원의 얼굴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돈이 어느 정도 모였다 싶으면 자신들의 얼굴에 투자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형’이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언제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언제 시동이 걸리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얼굴을 통과하는 모성의 권력, 애무 중에도 연인의 얼굴을 통화하는 열정의 권력, 군중 행동 안에서조차 깃발, 아이콘, 사진 등 우두머리의 얼굴을 통과하는 정치의 권력, (…) 영화의 권력, 텔레비전의 권력…….
- 같은 책, 「얼굴성」, 336쪽
지하철역 벽에는 수많은 성형 광고판이 걸려있다. 이것들은 그냥 걸려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얼굴을 만들어내는 ‘권력’이 흘러나온다. 광고판 안에는 큰 눈과, 정교하게 깎인 턱, 잘 다듬어진 코를 가진 한 여성이 지긋이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현실에서 존재하는 여성인가?) 여직원들은 이 여성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갠다. 동시에 지역도 하나의 얼굴성을 갖게 되는데, 여직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성형외과가 특성화되어 있는 강남이나 압구정으로 간다.
어느 날, 한 여직원이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았는지 붕대를 감고 선글라스를 낀 채 출근을 했다. 며칠 후, 선글라스를 벗고 붕대를 푼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를 연상케 했다. 사라지지 않는 보조개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지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라는 추상기계는 사회가 흘려보낸 권력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루는 그녀가 다리를 절면서 들어오길래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종아리를 깎았어요.” ‘뭘 깎았다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고민은 예전부터 종아리가 굵고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부분에 주사를 투여해 근육을 죽인 다음 메스로 깎아내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종아리가 무슨 연필도 아니고…) 뿐만 아니라 그녀는 허벅지의 지방을 흡입해서 이마와 광대에 주입했다. 허벅지도 가늘어지고 이마와 광대의 볼륨까지 살려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나. 이제는 얼굴도 모자라 온 몸을 성형한다. “손, 가슴, 배, 자지와 질, 엉덩이, 다리와 발은 얼굴화될 것이다.” (같은 책, 326쪽)
그렇다면 이 얼굴성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성적욕망’이다. “나도 사랑받길 원했어.” “짧은 치마 스키니 이젠 입을 수 있어.” 성형과 혹독한 다이어트를 견뎌낸 여가수의 노래처럼 여직원은 누구보다 예뻐져야 하고, 예쁘게 봐주었으면 하는 욕망에 갇혀버린다. 그녀는 얼굴과 다리의 붓기가 어느 정도 빠지자 짧은 치마를 입고 회사 이곳저곳을 다니며 “저 예뻐지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다. 나 또한 그녀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예쁘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 끝에 나는 “응! 예쁘네.”라고 대답했다. 이상하다고 하면 또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라? 종아리도 성기가 됐네?”
얼굴은 ‘다양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의 증식과 포획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본은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성형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얼굴과 온 몸을 성형을 해도 자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의 얼굴이 다양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이 만들어내는 기호는 오직 성적 자극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 아래’ ‘내 다리를 봐’ 등.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에서 몸은 어디까지나 성적 도구일 뿐이다. 노래를 부를 때 눈빛은 최대한 그윽해야 하고, 어떻게든 섹시하고 귀엽게 몸을 꼬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들을 보는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고, 많은 표를 얻어 데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은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지금은 벗어나기는커녕 계속해서 거기에 더 갇히려고만 하는 것일까. 얼굴과 성욕을 포개는 배치에서 벗어난다면 좀 더 다양한 얼굴로 노래하고 춤출 수 있지 않을까.
나는 88년도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태어났다. 평소 시대별 ‘대학 가요제’ 영상을 즐겨보는데, 88년도 강변가요제에서 수상한 이상은의 ‘담다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촌스러운 청바지에, 탬버린(^^). 거기다 돌발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를 저 춤사위는 대체 뭐지?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노래가사인데도 슬픔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리듬이 흥겹다. 지금처럼 춤이 귀엽고 섹시하게 표현되지 않을 뿐더러, ‘담다디’라는 가사 하나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표현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다양체’적인 노래란 말인가.
이 뿐만이 아니다. 80년대 가요계는 지금처럼 그룹이 아닌 밴드가 많았다. ‘시나위’ ‘부활’ ‘건아들’ ‘송골매’ 등. 밴드는 악기를 직접 연주하며(악기도 하나의 얼굴성을 갖는다) 노래한다. 노래를 하는 모습도 지금과는 다르다. 아이돌 그룹은 카메라 정면만을 응시하며 또렷!하게 노래를 하는 반면 이들은 뭔가에 홀린 듯, 약간은 미친 듯 여기저기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른다. 자신들이 겪은 삶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가장 놀라운 것은 이들의 얼굴에는 인위적인 장치들이 없다는 것이다. 배철수나 전인권이 부르는 영상을 보라. 긴 장발에 수염, 메이크업 따윈 없다. “이분들은 씻지도 않고 노래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노래, 가사, 얼굴. 어느 것 하나 기표작용적인 얼굴성이 없다. 아니, 오히려 독재적인 기표로부터 달아나려는 광기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얼굴을 해체하기,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기의 위험이 있다. 분열증 환자가 얼굴, 자기 자신의 얼굴과 타인들의 얼굴의 의미를, 풍경의 의미, 언어와 그것의 지배적인 기표작용들의 의미를 동시에 상실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일까?
- 같은 책, 「얼굴성」, 357쪽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해체하는 것을 제안한다. 얼굴은 여러 의미들이 기입될 수 있는 흰-벽이며, 여러 구멍들이 뚫려 있고 그 안에서 주체화가 일어난다. 다양한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구성하는 얼굴이 ‘돈’, ‘성형’, ‘성욕’ 이 세 가지로만 환원되어서야 되겠는가. “원시적인 머리, 크리스트-얼굴, 그리고 자동유도장치들, 이렇게 이 세 가지 상태에서 끝나야 하는가, 더는 없고?”(같은책, 363쪽) 얼굴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다양체는 해체될수록 더 많이 포착할 수 있다. 화장을 지워라. 성형을 멈춰라. 신체를 성욕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내가 가진 고유한 얼굴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글_고영주(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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