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하고 다시 재건하고
평균수명이 약 90세라고 가정했을 때, 나는 이제 겨우 삼 분의 일을 살았다. 초, 중,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지만 공부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던 터라 대학은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인력개발원이라는 학원에서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배웠다.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군복무까지 해결(!)하고 20대 초반을 마무리했다. 20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며 현 직장에 정착한 지 어느덧 7년을 넘어가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소위 말해 ‘꿈의 직장’이다. 8시 30분 정각에 출근하여 5시 30분이면 칼같이 퇴근한다. 친구들이 공무원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상사와의 불화도 없고, 연봉도 꽤 만족스럽다. 업무도 적응했기 때문에 편하다 못해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나름 성실하게 다니고 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이다.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놀고, 자고. 가끔은 내가 기계처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항상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사는 나. 내 삶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더하지 말고 빼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재미있게도 모든 것에 ‘기계’를 붙인다. 휴대폰, 버스, 로봇 등등 하나의 구조 안에서 똑같은 방식으로만 작동하고 생산하는 기계뿐만 아니라 자연도, 책도 인간의 삶도 저자들에게는 모두 ‘기계’이다. ‘나’를 하나의 기계라고 한다면 넓은 아파트에 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열심히 일하다가 명예롭게 은퇴하면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대로 그럭저럭 잘 작동한 셈 아닌가.
그런데 저자들의 기계는 이렇게 복제품만 생산하는 보편적인 것과는 다르다. 기계는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절단-채취하는 방식에는 반드시 다른 이질적인 것과 연결 접속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회사-기계와 연결 접속한 나-기계는 정규직-기계로 작동하고, 가족-기계, 친구-기계와 연결되었을 때 모두 다르게 작동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기계적 작동 속에서 다양한 삶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리좀은<하나>로도 <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하나>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하나>도 아니다. 리좀은 <하나>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하나>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진다(n-1).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47
리좀이란 뿌리줄기이다. 마구 엉켜있는 뿌리줄기를 상상해보자.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어디로 뻗어 가는지 그 목적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리좀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동물, 식물, 기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과 연결접속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연결접속을 하다가 어느 순간 삶의 배치가 바뀌거나 사유가 깨질 때가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이란 일종의 변곡점이다. 그래프에 그려진 포물선을 상상해 보자. 마이너스의 기울기에서 플러스의 기울기로 바뀌는 순간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간다. 바로 이때 기존의 삶에서 전혀 다른 삶으로 전환되며, 이 터닝 포인트가 사건이 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사건을 겪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말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에게 n차원에서 더하기가 아닌 빼기를 권유해 준다. 나를 지배하는 관념, 습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뺐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들과 연결 접속하게 되고 나를 변화시킬만한 사건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하지 말고 빼라! n-1!’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질문이 없어요!
감이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2년 겨울이었다. 이때부터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감이당에서 공부를 했다.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감이당 주방에서 밥을 하고 청소를 하다가 얼떨결에 세미나에 참여하고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 2년 동안은 ‘대중지성’과 접속하여 좀 더 밀도 있는 공부를 했다.
매 학기가 끝날 때면 한 편의 에세이를 써야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질문’이다. 그런데 질문이 잘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내 삶을 들여다보면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벌고, 쓰고, 놀고, 먹고, 자고. 그냥 저냥 편안한 일상이다. 일도 편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등. 어느 것 하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없다. 여기서 대체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답하란 말인가.
어찌어찌 질문을 만들고 글을 쓰면 항상 이분법적으로 사유한다는 말을 들었다. 회사는 나쁜 것, 공부는 좋은 것으로 분리하며 글을 쓴다고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불쾌했다. 그럼 나도 묻고 싶다. 이분법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과 저것을 나누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 남자와 여자, 정규직과 백수,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수많은 이분법이 존재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며 사유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 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리좀」, 2003, 새물결, p19
무엇과도 연결접속할 수 있는 리좀의 세계가 있다면 하나의 중심으로만 향하는 수목의 세계도 있다. 수목은 나무이다. 수목은 하나의 중심으로만 계속해서 뻗어간다. 리좀이 출발과 목적을 모른다면, 수목은 출발과 목적이 분명하다. 하나만을 사유하는 것이 수목의 세계이다. 수목은 모든 차이들을 위계화 한다. 우리가 만약 위계적 구조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면 나무는 특권을 갖게 되고, 결국 자신의 상급자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분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좋다!’ ‘나쁘다!’ 라는 경계가 분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쪽으로 작용하면 그쪽으로만 시선이 쏠리게 되고, 나쁘게 작용하면 바로 배제해버린다. 차별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수목이다.
‘공부는 리좀적? 회사는 수목적?, 공부는 언제나 다이나믹하고 회사는 늘 시시해.’라는 나의 생각은 온전히 공부와 일상이 분리된 채로 글에 나타났다. 그러나 수목 안에도 리좀이 있다. 중심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차이들이 존재한단 말이다. 단지 내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
글쓰기는 중간에서 이뤄져야 한다
“현실로 내려와서 써!” 대중지성에서 공부를 하면서 튜터샘들께 들었던 코멘트이다. 현실로 내려와서 쓰라는 말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얘긴데, 사실 나와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안에 깊게 잠들어 있는 자의식을 깨워야 하며, 편안한 일상이 조금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아야 한다는 것! 공부하는 모습이 나조차도 어색한 이 상황!
사실 글을 ‘멋지게 쓰고 싶다’는 것도 있었지만 편안하게 글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부마저도 편하게 하고 싶은 나의 어리석음! 그러다 보니 책을 촘촘히 읽지도 않았고, 좋아하는 인용문이 가득한 글이 되어 버렸다. 항상 아쉬움만 남았던 글쓰기… 이렇게 계속 같은 방식으로 쓴다면 자본주의라는 배치에서 복제품으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글을 쓰기 전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취직’과 ‘돈의 축적’이었다. 넓은 아파트, 결혼, 육아, 노후보장 등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대로 살며, 삶을 더욱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수록 다른 삶은 보이지 않았다. 정규직은 좋은 것, 백수는 나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너도 백수가 되어 보지 않을래?”라고 말한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정규직은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이당’에서 공부하는 백수들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의아스러웠다. 왜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을까. 대기업, 공무원, 전문직 등으로 남들은 취직을 하려고 기를 쓰는데 저렇게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도 되는 건가.
그런데 강감찬TV(감이당, 남산강학원 유튜브)에 올라오는 낭송, 랩, 연극을 보면서 알았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백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백수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본 것이겠지만 그들이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수정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은 물론이고, 밥하고, 청소하고. 백수들이 없으면 많은 사람들이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감이당에 가면 정규직인 나보다 백수들이 더 바빠 보인다. ‘도대체 백수 맞아?!’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리좀」, 2003, 새물결, p46
들뢰즈는 가타리는 ‘와(and)’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왜 그렇게 불리는 것일까. 출발과 목적이 아닌 과정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고, ~그리고’라는 ‘중간’만 남는다. 중간에는 ‘이것은 맞아!’ ‘저것은 틀려!’라는 이원론이 없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중간’에서 이뤄져야 한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공부. 글쓰기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위계적인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생각들을 글쓰기로 하나하나 깨고 싶다.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나와 치루는 전투이다. 내가 고집하고 있는 관념들과의 싸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가치들을 부수고 새롭게 세우는 것 말이다. 그렇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나를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글_고영주(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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