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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삶과 천개의고원

30평 아파트, 그곳에선 무슨 일이?

by 북드라망 2020. 3. 11.

30평 아파트, 그곳에선 무슨 일이?



어렸을 적,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매번 전세와 월세를 옮겨 다녔다. 그래서 ‘내 집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가난과 불행의 언표였다. 항상 그랬듯이,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고,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또 다시 셋방살이를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집을 사겠다고 ‘선언!’했다.




강남 집값에 비하면 인천 집값은 굉장히 싸다. 그래도 30대 정규직이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연봉이다. 그래서 나는 은행에서 1억 3천만 원을 대출받기로 했다. 그것도 무려 30년 할부로!



'빚'에 포획되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이 인용한 챌린저 교수의 말에 따르면, 지구는 습곡작용(=주름)과 퇴적작용(=쌓임)을 반복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조직화를 하는데, 이것을 ‘지층화’라고 한다. 지층화는 지구의 신체 위에 빽빽해지는 현상으로서, 우리가 보는 산과 바다는 모두 ‘지층화’의 산물이다. 모든 존재는 지층화를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 ‘나’라는 존재는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규정되고, 가족 안에서는 부모의 자식으로,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규정된다. 은행에 대출을 받는 순간 나는 ‘채무자’로 규정된다.


지층들은 층(層)이자 띠[帶]이다. (…)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블랙홀)”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 지층들은 지구위에서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 지층들은 신의 심판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86쪽


“빚 안 지고 어떻게 집을 사!” 집은 당연히 대출을 받고 사는 것 아닌가? 솔직히 돈을 버는 이유는 내 집을 갖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월급을 모아 집을 사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대출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지층은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은행이라는 코드와 접속하고 아파트라는 영토를 마련하는 것은 지금 시대엔 당연한 것이다. 대출을 받고 집을 사는 것은 ‘신의 심판’이며, 모두가 그러하듯 나 또한 심판받은 대로 잘 따랐다.


대출을 받고 집을 사겠다고 하니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1억 3천이라는 빚이 생기는 것도 문제였지만, 아버지와 둘이 살기에는 아파트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해요!” “1억? 젊은데 그거 못 갚겠어요?” “앞으로 집값은 계속 올라요!”라며 가족들을 설득했고, 결국 승낙을 받았다.


그 후, 나는 매일 부동산을 왔다 갔다 하며 집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왕 사는 거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면 더 좋지 않을까? 누군가 살았던 집은 영~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완공도 되지 않은 새 아파트를 계약했다.


그 아파트는 예전에 살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넓은 방 하나와, 작은 방 두 개. 무엇보다 화장실이 두 개였다. 나는 시멘트가 굳기도 전인 건물 안에서 대출 계약서와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후 완공 날짜와 이사 기간까지 합쳐 약 세 달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텅 빈 집을 왔다 갔다 했다. 탁! 트인 전망. 트리플 역세권. 서울과 가까운 지역. 나중에 결혼해서 신혼집으로 살기에는 딱 좋은 공간이었다.



공간은 어떻게 분절(分節)되는가


화려하게 벽지를 발라 놓으니 그럴듯해 보였다. 예전에 살던 집은 물건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꽉 차 보였는데, 이제는 그럴 걱정이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이제 방의 용도에 맞게 물건들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왠지 전에 쓰던 물건들이 새로 이사한 집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경기도 광명역에 위치한 이케아(가구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새 가구와 주거 용품을 사들였다. 안방에는 분위기 있는 가구들로 채워 넣고, 주방은 예쁜 식기들로 장식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층이라는 지질학적 개념을 언어학자 옐름슬레우의 ‘내용’과 표현’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한다. 지층은 내용으로 한 번 분절되고, 표현으로 또 한 번 분절 되는데, 이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분절(分節)이란, 꺾고 접합하여 ‘마디화’한다는 뜻이다.


공간은 콘크리트와 철근이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공간은 구조와 평수, 주변 지역의 특색에 따라 ‘아파트’로 표현된다. 그런데 아파트는 또 다른 표현의 내용이 된다. 매매자의 의도에 따라 결혼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부동산 투기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어떤 물건을 배치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안방으로, 주방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이중분절은 내용이 따로 있고 표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상호 전제하며 끊임없이 분절한다. 하나의 내용은 또 다른 것의 표현이고 하나의 표현은 또 다른 것의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아파트를 결혼 조건이나 부동산 투기로 환원하는 것은 사회가 자본과 ‘코드화’하여 분절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나의 욕망을 고스란히 투여했다. 강남 집값을 보며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도 은근 내 집 값이 오르기를 바랐으며, 내가 사는 집이 TV에서 본 것처럼 화려한 공간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업무시간에 인터넷으로 하루 종일 가구 및 가전을 검색해서 신용카드로 구매했다. 특히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서재를 꾸미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 나는 점점 빚의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 욕망이 빚에 포획될수록 공간은 상품들로 포획되고 있었다.


첫 번째 분절은 내용과 관련되어 있고 두 번째 분절은 표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표현은 내용 못지않게 실체를 갖고 있으며 내용은 표현 못지않게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같은책, 「도덕의 지질학」, 93쪽


입주 후, 내 집이 생겼다는 마음에 집에서 최대한 많은 활동을 하고 싶었다. 주방에서 음식도 하고, 서재에서는 공부를 하며, 거실에서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재미있는 파티를 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서로 바쁘다 보니 둘이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화장실이 안방에도 있다 보니 한집에 있어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출장을 가시는 날이면, 넓은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이 영 어색했다. 게다가 식사를 주로 밖에서 해결하다 보니 주방은 쓰이지도 않았다.


은행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 거기다 온갖 화려한 인테리어와 비싼 상품으로 집을 꾸며놨는데, 잠을 자고 옷을 갈아입는 용도 이외에는 쓰이질 않고 있었다. 아주 가끔 아버지 친구들이 놀러 오시는 것이 전부였고, 그 이외에 아무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때부터 서재가 아닌 카페에서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간과의 접속은 생겨나지 않았고, 빚은 빚대로. 소비는 소비대로 늘어만 가고 있었다.



저장증후군! 새로운 지층이 생기다


『천개의 고원』에서는 이중분절(지층화)을 유익하면서도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집이라는 공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유익한 지층이다. 하지만 집이 결혼의 조건과 부동산 투기 등, 자본이 분절하는 방식에 포획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지층이다. 공간은 그저 텅 빈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살아있는 ‘신체’다. 신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수시로 일어나야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비싼 상품들로 지층화된 나의 집에서는 아무런 활동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대한 환상은 무너졌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공허해 졌다. 자본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라갔고, 이것은 결국 자본의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공간은 움직이지 않은 채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놀랍게도 ‘저장 증후군’이라는 아주 기괴한 지층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조금이라도 애착(?)이 가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내 서재에는(이제는 서재라고 하기에도 창피하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있다. 기타, 피아노. 중‧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과 체육복, 연애편지, 심지어 학창 시절 보던 교과서와 시험지까지!


내가 지금 기타와 피아노를 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연애편지? 예전 연애의 추억도, 미련도 없다. 더 엽기적인 것은 공부도 하지 않았던 내가 교과서와 시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가 낡아빠진 교복과 체육복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병’에 가까운 수준이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벽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붙박이 책장이다. 책장 안에는 한때 중독이었고, 지금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일본 추리 소설들로 꽉 차있다. 누군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을 때, 난 소스라치게 외면했다.


아파트야 자본의 트렌드에 맞게 채워 넣었다 치자. 그런데 그 위에 옛날 물건들을 저장하고 쌓아 두는 이 욕망의 정체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자본의 지층도 아니고, 추억을 회상할 정도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가치도 없고, 전시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층은 애당초 필연적으로 층에서 층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이미 여러 층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나아갔는데, 그와 동시에 주변은 중심에 반작용을 일으켜 이미 새로운 주변을 위해 새로운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흐름들은 끊임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또 되돌아오고 있었다.

- 같은책, 「기원전 1만년-도덕의 지질학」,  106쪽


지층은 어딘가를 붙들어 매는 동시에,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주변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탈-영토화’의 힘이 같이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엇이 지층을 견고하게 만드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층을 가로지르며 달아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30평대 아파트가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공간은 많은 힘들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떠한 활동들이 전개되느냐에 따라 공부방으로, 세미나실로, 어린이집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나의 공간이 다양하게 표현되도록 공간을 탈-지층화할 참이다. 그러자면 움직이지 않는 화석과 같은 지층들을 버리고! 공간을 비워야 한다. 나는 과연 저장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소리도 나지 않은 기타와 피아노를 버리고… 바스러질 것 같은 시험지를 버리고…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연애편지를 버리고.… 읽지도 않는 추리소설을 버릴 수 있을까.


글_고영주(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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