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면 된다’라는 영화가 있다.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판자촌으로 쫓겨 가는 병환네 가족은 우연한 사고로 ‘보험’의 혜택을 받게 된다. 그 후, 그의 가족 네 명은 많은 보험에 가입하고, 자신들의 신체를 일부러 훼손하여 수십억의 보험금을 챙기는 ‘가족 보험 사기단’이 된다. 결국 그들은 보험금 때문에 서로의 목숨까지 노리게 되는데… 범행을 계획한 병환의 아들은 여행 도중 일부러 강에 차를 던진다. 그 결과 자신만 살고 가족은 모두 익사하게 된다. 가족들의 생명 보험금을 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지만, 보험금을 노리는 친척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보험금에 눈이 멀어 가족까지 죽이다니… 코믹영화지만 실상은 너무나 끔찍하다.
보험이란 불의의 사고나 질병에 대비하여 금전적 부담을 덜기 위한 제도이다. 한 마디로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보험금’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런 반-생명적인 전도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살고 싶으면 ‘보험’을 들어라!
당시 내 나이 스물한 살, 한 달 용돈이 30만 원이었던 시절, 첫 월급 124만 원은 나에게 너무나 큰돈이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은행으로 갔다. 창구에 앉아 적금을 들고 난 후, 직원은 나를 으슥한 방으로 데려가 내 경제 사정을 꼼꼼히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사회 초년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은행 상품 및 보험 상품을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기표작용적 기호)의 공식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하고, 또한 다른 기호만을 지시하며,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 따라서 제한 없는 의미생성이 기호를 대체하게 된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19쪽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내 앞에 펼쳐진 수많은 보험 상품들(보험 상품을 많이 가입할수록 은행직원에게 이득이 된다). 대체 무슨 보험이 이리도 많은지! 직원의 말 몇 마디에 나는 실비보험과 연금보험까지 들고야 말았다.
기호계란, 기표-기의의 집합이다. ‘생명’이란 생로병사에 해당하는 기호들을 대표하는 기표이다. 그런데 지금은 ‘보험’이라는 기표가 중심이 된다. 태아보험, 노후, 암, 실비, 종신 등 ‘보험’이라는 기표는 또 다른 보험의 기표를 파생시키고 지시하며 무한히 나아간다. 계약서 안에는 알 수 없는 기표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보험금’이라는 특정한 기호가 ‘생명’의 의미를 대신하면서 가장 중요한 기표로 자리 잡는다.
지금 시대에 보험은 필수적인 기호이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고와 병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으로부터 내 삶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의 시작은 어디일까. 바로 은행원의 ‘얼굴’이다. 기표는 그 의미가 쓰여야 하는 흰-벽이 있어야 하는데, 은행원의 얼굴에는 ‘반드시 들어야해!’ ‘내 말 안 들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라는 의미들이 쓰여 있었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얼굴이다.” (「몇 가지 기호체제에 대하여」, p224) 은행원의 표정을 보고 나는 갑자기 닥쳐올 사고와 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결국 암보험과 종신보험까지 들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험금만 탈 수 있다면 내 몸 따윈 상관없어!
회사 동료 셋과 차를 타고 퇴근을 하던 중, 뒷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우리가 타고 있던 차를 박았다.(아주 살짝!) 사고를 낸 차주는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고, 몇 분 후 직원이 도착했다. 사고 정황과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한 다음에야 나와 동료들은 귀가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사고 접수가 확인되자 우리 셋은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솔직히 다치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시간을 내서 병원에 다닌 이유는 치료를 받고 합의를 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동료는 입원까지 하겠다며 신이 났다. 상대 보험회사 직원은 적은 보험금으로 빠른 합의를 보려고 애써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보험금을 더 받기 위해 시간을 벌고,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았다. 애초에 사고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고, 우리는 몸을 그저 보험금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체계 안에는 근본적인 기만이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도약하고, 항상 장면을 바꿔버리고, 다른 곳에서 그 장면을 상연하기. (…) 주체는 의미생성의 중심에 있는 전제군주의 편집증적 조작에 응답한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21~222쪽
기호가 작동하는 체제 중 ‘기표작용 체제’라는 것이 있다. 기표작용 체제란, 기표가 필연성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보험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높은 보험금을 타기 위한 절차와 해석에만 우리는 응답한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고가 크든 작든 보험금이 ‘얼마냐’로 재단됨으로써 사고의 의미는 돈으로 환산된다. 우리에게 지급된 보험금은 약 80만 원. 돈이 들어온 순간 우리에게 일어난 사고는 잊혀졌다. 우리는 보험금으로 파티를 열었고, 술과 고기를 밤새워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놀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표작용체제를 기만적인 체제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보험금으로 인해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가 삶을 방치하기 때문이다. 밤새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신 다음 날, 나의 몸은 피로에 찌들어 망가져 있었다. 망가진 몸을 추스르느라 주말 내내 시체처럼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우리가 받은 보험금만큼 보상을 해야 한다. 보험 회사가 바보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거기다 더러운 방식으로 보험금을 뜯겼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알았을 때 그도 나중에 같은 방식으로 보험금을 타려고 할 것이다. 보험이 삶을 책임져 준다지만 파탄이 난 인간성은 도대체 누가 책임져 준단 말인가. 어디 사고뿐이겠는가. 병에 걸렸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보험은 다 너희를 위한 것이야.”라고 말하지만, 보험금의 액수가 중요할 뿐 갑자기 닥친 사고에 대한 해석도, 병에 대한 고찰도 없다. 어디까지나 높은 보험금만 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항상 기표니까. (…) 이런 체제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끝이 나지 않는다. 이는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무한한 빚의 비극적 체제이며, 모든 사람은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19쪽
보험의 기표체제 안에서는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렸을 때, 오로지 보험금의 액수로만 계산된다. 삶과 생명의 윤리 따위는 없고, 어떻게든 더 많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상품을 이용하거나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보험이란 더 많이 다쳐야 하고 더 비참하게 죽어야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 내 삶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가입을 했는데,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몸이 망가지길 바라는 이 끔찍한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비극적인 역설에 속아 넘어가다니! 도대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맞나?
아프냐, 나도 아프다
명리학상 나는 토(土-胃)가 과다이고, 금(金-肺)이 없다. 그래서 환절기가 오면 항상 비염에 시달리고, 조금만 많이 먹어도 위가 탈이 난다. 거기다 내 머리 오른쪽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담벼락에 부딪쳐 생긴 큰 상처가 있다. 내가 매년 겪는 질환과 과거에 일어난 사고는 이 정도다. 그런데 나보다 더 내 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는 환절기가 오면 배를 끓여 즙을 내서 매일 나를 먹이셨다. 거기다 내가 음식을 많이 먹어 배탈이 나기라도 하면 밤새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며 바늘로 손을 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픈 것이 나았다. 추돌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고가 났을 때 할머니는 현장에 있었는데, 그날 이 후 나에게 큰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할머니는 매일 기도했다.
후-기표작용적 체제의 정념적 선은 주체화의 점에 기원을 두고 있다. 무엇이든 주체화의 점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출발해서 주체적 기호계의 특유한 특질들을 발견할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중적 외면, 배반, 유예된 실존 따위 말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49쪽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기표작용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後)-기표작용체제’를 이야기한다. 이 체제는 기만과 비극 아닌 배신과 내면화의 체제이다. 분명 아프거나 사고가 난 것은 나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마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인 듯 사고와 질병을 내면화하고 치료했다. 후-기표작용체제는 기표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기표를 배신하며 자신만의 도주선을 그려나가는 체제이다. 여기에는 보험이라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생명이 보험금으로 환산되는 절차와 해석 따위는 없다. 할머니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고와 병에만 집중한다. 오로지 내 손자가 빨리 나았으면 하는 마음이 작동할 뿐이다. 생명이라는 ‘점’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일대일 대응으로 작동하는 것을 저자들은 ‘주체화의 점’이라고 한다.
할머니-의사, 할머니-배즙, 할머니-기도 등. 주체화의 점은 언제나 일대일 커플로 작동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진짜 의사가 아니며, 배즙은 약도 아니다. 그런데도 의사보다 내 몸을 더 잘 치료했다. 몸을 만지고 손을 따는 것도 보편적인 치료체계가 아니다. 하물며 기도가 과학적인 치료체계이겠는가. 명확한 해석체계가 아니라고?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아프지 않고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만둬!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장소,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이미 만들어진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 하라고!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266쪽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보험은 실비, 연금, 종신이다. 보험비만 한 달에 30만 원이다. 다칠만한 직업도 아니고, 다쳤다 하더라도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내 책임이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다. 노후에는 큰돈이 필요 없으며(저축만으로 가능하다), 죽은 후에 나온 보험금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죽어서 나온 돈인데, 내가 갖지 못하다니!(이렇게 나를 기만할 수가!) 결과적으로 보험은 내 생명과 안전에는 별 소용없는 기호이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이 만들라고 하는 도주선이란 무엇일까. 실험을 통해 나만의 해석체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명리학이든, 경험이든, 철학이든 내 삶을 중심으로 나만의 해석체계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도주선이 아닐까. 자본의 기호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기호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 삶을 지키는 일이요,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글_고영주(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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