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연민으로 바라보는 광기의 시대
국가가 원하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자연을 노래하면 예술이 되나
한 청년이 깊은 산 속 마을로 들어간다. 사방 천지에 꽃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온다. 세상사를 떠나 그림 그리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주인공은 화공이다. 서양화를 그린다. 산 속 온천장에 손님이라곤 화공 한 사람뿐이다. 인적 없는 자연을 바라보니 화공의 입에서 저절로 시가 흘러나온다.
“마음은 왜 이리 그윽한지/ 한없이 넓어 옳고 그름을 잊었네./
서른이 되어 나는 늙으려 하고,/ 봄날의 한가한 빛은 여전히 부드럽네./
소요하며 만물의 유전(流傳)에 따라, 느긋하게 향기로운 꽃향기를 마주하네.”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송태욱 역, 현암사, 2015년, 168쪽)
자연은 세속의 시시비비를 잊게 한다. 화공이 원하는 건 오직 느긋한 삶이지다. 세상은 한가롭게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한 편의 시로 읽으려면 땅을 얻어 개척할 마음도, 철도를 놓아 한몫 잡자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 외딴 산속이 아니었으면 땅은 벌써 투기의 대상이 되고, 개발의 목적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집요하고 독살스럽고 지겨운 놈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엉덩이에 탐정을 붙여 방귀 뀌는 횟수를 헤아린다. 남의 방귀를 분석해서 똥구멍이 세모라는 둥 네모라는 둥 쓸데없이 인신공격을 한다.” 도쿄에서는 발걸음을 늦추고 여유를 부리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쫒는다. 20세기는 피로사회다. 수면이 필요하다. 화공은 기진맥진해져서 모든 것을 망각하고 푹 잠든 것 같은 천지를 찾아왔다.
『풀베개』 의 화공은 세속적인 욕망과 이치를 벗어나 자연이라는 비인정(非人情)의 세계로 들어왔다. 숨 막힐 것 같은 이해관계를 떠나왔으니 관조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까. 무릉도원에서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예술작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바깥세상에는 러일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곳 심심산골의 나루터에도 전쟁담이 들려온다. 승전의 기세와는 달리 사회는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군비확충으로 불황에 휩싸이고 물가와 세금이 올라 일상은 궁핍하다. 이토록 엄혹한 시대에 한가롭기 그지없는 예술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는 전업 소설가로 변신하려고 하는 소세키에게 너무도 절박하게 다가온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었을까? 『풀베개』는 소세키의 예술론과 국가관을 살펴볼 수 있는 소설이다.
그녀의 얼굴에 2% 부족한 것
울창한 숲 속 연못 위에 새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꽃잎 가득 붉게 물든 연못에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 영원히 잠들어 있는 모습! 화공은 그리고 싶은 그림의 주제를 얻었다.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처럼 황홀하고 처연한 죽음의 이미지이다. 그림의 모델로 삼기에 적합한 매혹적인 여인도 만났다. 온천장 주인의 딸 나미다. 그녀는 몇 년 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성안에서 제일가는 부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러일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다니던 은행이 폭삭 망했다. 그녀는 먹고 살길이 막연해져서 이혼을 하고 친정에 돌아왔다. 나미에 대한 소문은 심상치 않다. 어느 날 인근 절에 있는 스님이 그녀에게 반해서 연서를 보냈는데 그녀가 절에 뛰어 들어와 “그렇게 귀엽다 생각하시면 부처님 앞에서 같이 자자”며 스님의 목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도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다니 분명히 정상이 아니라고, 그 집안에는 대대로 미친 여자가 나왔다고, 아니 여자가 가난한 남편을 버리고 돌아온 것부터 미친 짓이라고 마을사람들은 수근거린다.
나미는 세간의 이목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화공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장난을 거는 그녀는 미쳤다기보다는 어딘지 염세적이다. 삶의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이 보여주는 무심함이랄까, 툭툭 내뱉는 말에 스산한 절망이 묻어난다. 그녀는 자기가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부탁한다.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편안하게 죽어 있는 얼굴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던진다. 화공은 그녀를 그리고 싶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그림 한 장 그릴 수가 없다.
그리고자 하는 물체만 있으면 될까? 결국 그림도 마음이 담기는 것이다. 화공은 대상의 표정에 어떤 마음을 담을지 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2% 부족하다. 질투도 아니고, 증오는 너무 격렬하다. 분노는 조화를 깨고, 원한은 너무 속되다. 그 2% 부족한 감정의 정체를 몰라서 화공은 붓을 들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화공은 나미와 함께 기차역으로 배웅을 나간다. 그녀의 사촌동생이 러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만주벌판으로 떠나는 길이다. 기차가 달리는 현실과 마주 했을 때, 화공은 신선이 살고 있는 도원경(桃源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보이는 곳을 현실 세계라고 한다.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 백 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집어넣어진 인간은 모두 같은 속력으로 동일한 정거장에 멈추고 똑같이 증기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풀베개』, 182쪽)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오브제는 기차와 시계이다. 기차는 사람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모조리 상자 속에 집어넣고 끌고 간다. 인간은 기계의 시간에 따라 막무가내로 끌려간다. 기차가 향하는 곳은 진보와 개발의 소실점이다. 도착지점에는 피투성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린 청년까지 전쟁터로 몰아넣는 광기의 시대였다. 나미는 동생에게 “죽어서 돌아오라”고 모질게 말한다. 살아서 돌아오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나니까 차라리 국가를 위해 죽는 게 영광이라는 암시를 준다. 훗날 가미가제 특공대가 폭사하는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죽어서 돌아오라는 말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는 작별인사보다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생사를 넘나드는 기차에는 나미의 남편도 타고 있다. 남편도 헤어진 아내에게 돈을 빌려서 만주로 떠나는 길이다. 돈을 벌려고 가는 건지 죽으러 가는 건지 알 수 없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가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은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떠나는 동생과 남편을 망연히 바라보는 나미의 표정에는 연민이 묻어난다. 비로소 화공의 가슴 속에 화면이 완성된다.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화공이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연민의 정이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소소한 항변
“이런 꿈같은, 시 같은 봄 마을에, 우는 것은 새, 떨어지는 것은 꽃잎, 솟는 것은 온천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잘못이다. 현실 세계는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 헤이케의 후예만이 오랫동안 살아온 외진 마을까지 다가온다. 중국 북방의 광야를 물들일 피의 몇 만분의 일이 이 청년의 동맥에서 내뿜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풀베개』, 121쪽)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가는 청년을 바라보며 나미의 얼굴에 연민이 가득하다. 국가가 원하는 가치와 내가 원하는 삶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일개 개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국가라는 강력한 구심력으로 개인의 삶이 환원되는 것을 보며 화공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구속을 받기 마련이다. 소세키에게 국가와 전쟁이라는 문제는 작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외면할 수 없는 화두였다. 소세키는 살면서 세 번의 전쟁을 경험했다. 청년기에는 청일전쟁(1894-1895년)을 접했고, 러일전쟁(1904-1905년)무렵에 작가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벌어지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국가의 징병제에 응해야 했다. 대학생은 26세까지 징병을 유예할 수 있었다. 징병기한이 다가오자 소세키는 호적을 홋카이도로 옮긴다. 홋카이도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비천한 원주민이 살고 있는 섬이었기 때문에 군대가 면제되었다. 소세키는 징병을 피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군대를 기피한 인물로 찍혀서 사회에 발도 못 붙였을 것이다. 소세키의 친구 마사오카 시키는 병약한 몸으로 종군기자로 참전했다가 결핵이 악화되어 일찍 세상을 뜬다. 둘도 없이 절친한 문학친구가 한명은 애국주의, 한명은 반전주의로 노선을 달리하는 장면이 쓸쓸하게 교차된다.
소세키는 내내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국가주의를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가 개인주의를 표명하기가 쉬웠을까? 소세키는 아무리 국가가 중요해도 아침부터 밤까지 “국가, 국가”하며 매달리는 행동은 위선이지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전쟁은 “정말로 가치가 없는 허울뿐인 허무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점두록>, 『나의 개인주의』, 김정훈 역, 책세상, 174쪽)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천황이 친히 선박을 관람하는 의식에 초대받은 소세키는 참석을 거절한다.(도가와 신스케, <나쓰메 소세키 평전>, 95쪽)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국수주의로 변질되고 군국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자국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소세키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국가를 바라볼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이야기의 힘
전쟁에 열광하는 지배권력 사이에서 문학을 택한 소세키의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풀베개』에 나오는 자조적인 장면을 보면 때론 소설쓰기가 무의미하다는 무기력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화공이 소설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나미가 말을 건다. “그 나이가 되어도 홀딱 반했다는 둥 여드름이 났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까?” 그까짓 소설, 읽을 게 뭐가 있냐는 비아냥이다. 소설의 존재 같은 건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화공은 아무데나 펼쳐보면 되지 줄거리가 무슨 대수냐고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총칼 앞에서 그깟 문학이 뭐라고, 나미 말대로 읽으나 마나한 게 소설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 멜로, 역사, 추리, SF, 무협소설 등 잡히는 대로 소설책을 읽었다. 책 살 돈이 없어서 서점에 가서 공짜로 읽기도 했다. 대여섯 시간을 책방에 서서 책을 읽으면 허리가 부러질 듯 아파왔다. 내가 밤늦게 자지 않고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어머니는 가차 없이 전등을 꺼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밝히면 가난하게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말을 곧이 들을 나도 아니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소설의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속설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니 문학은 부조리한 현실을 낱낱이 까발려서 세상이 겉보기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의문을 품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다. 진실을 알고 나면 순순히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 루쉰 말대로 한 번 눈을 뜨면 다시 잠들 수가 없다. 철로 된 방에 갇힌 다른 사람들을 깨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면 다른 삶이 시작된다.
2천 년대 접어 들어서 문학보다는 자본집약적이고 스펙타클한 영화가 대세가 되고 게임, 컴퓨터 영상이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소설이 사회문제를 다루면 ‘진지충’이라고 외면 받는다. 요즘 소설은 가벼운 일회용 소비재로 격하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나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에게는 문학책이 엄청 무게감이 있었다. 문학은 한국 역사와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 쉽게 알려주었고 계층 갈등문제를 이해시켜 주었다. 사회 과학책은 머리를 두드리지만 문학책은 가슴을 울린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감정을 일렁이게 만든다.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나서 나만 이렇게 활짝 웃으며 살아도 될까 미안해져서 한동안 미간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 시절 리얼리즘 문학은 인식의 지반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보의 전달보다 정서적 교감이 힘이 세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를 떠나서는 어떤 예술도 공허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은 연민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연민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타인을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감정이다. 연민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내려다보는 동정의 시선이 아니다. 지식인이 우매한 자를 바라보는 우월한 태도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태도”(나쓰메 소세키,『문학론』, 황지헌 역, 소명출판, 2010년, 62쪽)에 가깝다.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어른은 엉엉 따라 울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가 우는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연민은 애써 눈물을 머금고 해결책을 찾는 어른의 눈길이다. 그것은 타인과 공감하되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거리를 두고 세태를 묘사한다고 해서 몰인정한 것은 아니다. 대상과 거리를 둘 때 삶의 이면까지도 통찰할 수가 있다.
소세키는 문학의 힘으로 권력에 저항했다. 소소한 항변이지만 고집스러운 자세였다. 그가 쓴 소시민의 이야기는 미약해 보이지만 정감이 간다. 쓰는 작가도, 읽는 독자도 연민의 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단 하나의 문장에도 여러 사람의 눈길과 생각과 펜을 잡은 손가락의 힘이 들어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에는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가 뭉쳐 있겠는가. 어떤 책은 수 백 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고 내려와 고전이 된다. 나는 불끈하는 그 힘에 손을 내밀어 손끝이라도 닿고 싶다. 그 열렬함을 감지하고 싶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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