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솔직함으로 대항하는 정공법
위선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햇병아리 교사가 마주친 현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 세상에,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파 청년이라니 소세키의 소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소세키의 소설에는 더러 발랄하고 가벼운 인물이 나오긴 해도 조연급에 불과하지 대다수의 주연급은 고민은 많고 불안은 깊어서 내면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뭐니 뭐니 해도 소세키의 전문분야는 자의식에 시달리는 신경과민형 인간이다. 그동안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탐구에 질린 사람이라면 『도련님』을 읽으면서 모처럼 가벼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어느 시인은 유쾌, 상쾌, 통쾌라는 개념을 이렇게 정리했다. “유쾌한 사람은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할 줄 알며, 상쾌한 사람은 고민의 핵심을 알며, 통쾌한 사람은 고민을 역전시킬 줄 안다.”(김소연, 『마음사전』, 마음산책, 2017, 70쪽) 시인의 말대로 도련님은 고민을 역전시키는 통쾌한 면모를 보여준다. 생각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없는 단순 명쾌한 청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도련님은 말썽꾸러기라 어릴 때부터 집안의 골치 덩어리였다. 장난치다가 다치고 혼나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화가 나서 용돈을 안 주고 의절하겠다는 말을 다 꺼냈을까. 동네에서는 악동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얌전한 형만 예뻐했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10년 넘게 함께 살아온 하녀 기요만이 도련님을 애지중지 감싸준다.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 칭찬이 마르지 않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데 하물며 사람이랴. 기요 덕분에 도련님은 자기가 뭐가 되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형은 집을 팔아서 도련님에게 6백 엔을 주고 규슈 지방으로 떠났다. 도련님은 형이 유산을 공정하게 나누었는지 계산을 따지지 않는다. 형에게서 받은 돈으로 물리학교에 진학해서 졸업하고 나니 무일푼이 되었다. 이 소설은 스물네 살의 사회초년생이 된 도련님이 멀리 떨어진 시코쿠에 있는 중학교에 가서 수학교사로 출근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지도를 보면 바닷가에 바늘 끝만큼 작게 표시된 곳’, 벌거벗은 몸에 훈도시만 겨우 걸친 뱃사공이 노를 저어가야 닿는 깡촌이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아주 외딴 섬마을을 상상했는데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은 소세키가 젊었을 때 마쓰야마 중학교의 교사를 했던 체험이 소재가 되었다. 마쓰야마 현이 있는 시코쿠는 제주도 면적의 10배나 되는 큰 섬이다. 지금도 소설에 나온 도고온천이 영업 중이고 일명 봇짱(도련님) 기관차라고 불리는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다. 아무튼 도쿄토박이로서는 너무나도 작은 어촌마을로 가게 된 도련님은 어떤 세상과 만나게 될까? 때 묻지 않은 인정 넘치는 시골사람? 순수하고 아리따운 섬마을 아가씨와의 풋사랑? 이런 낭만적인 기대를 했다면 오산이다. 도련님이 만난 촌사람들은 순박하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무덥고 좁은 방으로 안내하면서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골탕 먹이고, 도련님이 거액의 팁을 주니까 180도 달라져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하숙집으로 옮겼더니 주인은 골동품을 강매하려고 치근덕거린다. 번잡한 도시만 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어딜 가나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친절을 가장하면서 남을 속여먹는 사기꾼들로 가득하다.
지식의 전당인 학교는 좀 다를까? 엘리트 집단의 허위의식은 한 술 더 뜬다. 교감(빨간 셔츠)은 시골학교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학을 졸업한 문학사이다. 하는 말이나 취향을 보면 나무랄 데 없이 고상하다. 도련님이 보기엔 뭔가 속내를 숨기고 있는 나긋나긋한 말투인데다 느글거릴 정도로 문화와 교양을 표방하고 있다. 빨간 셔츠는 남의 약혼녀를 빼앗고, 뒤로는 게이샤와 오입질을 하는 비열한 작자이다. 교감 옆에는 미술선생(알랑쇠)이 딱 붙어있다. 그가 교감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보고 도련님은 알랑쇠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빨간 셔츠와 알랑쇠는 햇병아리 교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교묘하게 조종한다. 그들은 자신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홋타 선생 (산미치광이)을 견제하기 위해 중상모략을 일삼는다. 세련된 화술로 포장되어 있어서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도련님은 어떻게 거짓투성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흙탕물에 빠져 같이 뒹굴거나 맞서 싸우거나, 사회인의 처세술을 익히는 것은 순전히 자기 몫이다.
지나치게 정직하면 곤란하다?
도련님이 마주친 사회는 아찔할 정도로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선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관계를 포장하는 기술이다. 가짜임이 밝혀지는 순간 끝없이 또 다른 위선으로 덧씌워서 흉측한 본성을 감춘다. 도련님이 가진 능력은 하나뿐이다. 솔직함 그 자체다. 도련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표현하고 그대로 행동한다. 그의 성품은 교장에게 임명장을 받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교장은 교사가 갖춰야 할 자질을 훈계한다. 학생에게 모범을 보이라느니, 존경을 받아야 된다느니, 덕으로 학생들을 교화하라느니 요구사항이 장황하다. 이 말을 듣는 도련님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월급 40엔을 받으려고 이런 촌구석까지 올 리가 있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교장선생님 말씀대로는 도저히 못할 것 같으니 임명장을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쿨 하게 말한다.
이런 솔직한 사람이 다 있나.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데, 거짓말이라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조하는 게 일반적인 처세술이 아닌가. 교장은 화들짝 놀라며 일장연설을 거두어들인다. 도련님은 말로만 훌륭한 교사인 척 하는 위선은 질색이다. 그는 남에게 아양을 떨거나 입발림 소리로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의 솔직담백한 처세술은 동료와 윗사람에게 먹힐까? 그럴 리가. 왕따가 되거나 경계대상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적어도 학생들에게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처럼 환영받지 않을까? 그것도 영화에나 나옴직한 순진한 기대다.
학생들은 신참 교사를 골리려고 숙직실 이부자리에 메뚜기를 잔뜩 숨겨놓는다. 위층에서 쿵쾅대면서 숙직을 서는 도련님을 괴롭힌다. 도련님이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학생들이 장난을 쳐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않아서이다. 장난을 쳤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이다.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을 치지 말아야 한다. 비겁하게 장난을 안 쳤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못 봐준다. 도련님은 끝까지 학생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 참아야 한다는 계산은 애당초 없다. 도련님은 능란한 아부 기술도 없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화술조차 없다. 그의 단순하고 진솔한 태도는 세상물정 모른다고 비웃음만 산다.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사건이 커졌다. 교감은 치사한 계략을 세워서 점잖은 영어선생(끝물호박)을 전근시켜 버리고 그의 약혼녀인 마돈나를 차지한다. 도련님과 홋타선생을 학생들의 싸움판에 끼어들도록 몰래 유도하고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신문사에 제보한다. 도련님과 홋타선생은 함정에 빠졌다. 교감은 홋타선생을 교직에서 자르고 도련님은 월급인상으로 매수하려 든다. 도련님은 회유를 당당하게 거절한다. 두 사람은 여관 앞에서 밤새 잠복했다가 게이샤와 정을 통하고 나오는 교감과 알랑쇠를 흠씬 패준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는 힘이 정의다. 도련님은 주먹으로 불의를 응징하고 사표를 내던진다. 도쿄로 돌아온 도련님은 철도기술자가 되어서 살아간다. 월급이 교사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위선을 떨며 사는 것 보다는 속 편하다.
도련님이 구사하는 정공법은 통쾌하다. 그는 천부적으로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앞뒤를 가릴 필요도 없다. 앞뒤가 똑 같기 때문이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행동한다. 겉과 속이 투명하게 일치한다. 부패하고 복잡하게 얽힌 세상살이의 매듭이 풀리지 않으면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다. 깔끔하다. 도련님처럼 당당하게 처신하려면 손에 쥔 카드를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떳떳하다. 그럼 됐지 않은가. 떳떳한 행동이 보장해주는 평온만큼 확실한 삶의 자산은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화폐로 맺어진 인간관계의 한계
나는 32년간 직장생활을 했는데 20년은 피고용인으로, 12년은 고용인으로 일했다. 직장인이 되었을 때 나의 눈에는 위선적으로 보이는 윗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실제로 부정부패에 연루된 상사도 있었다. 퇴근하면 직장 동료들과 술집에 모여 간부들을 씹어대느라 안주가 필요 없었다. 월급에 매여 사느라 도련님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입바른 소리를 해서 승진이나 직무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지레 움츠려 들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아부의 기술은 없었으니 고작 얼굴에 ‘나 직장 다니기 싫다’는 불퉁스러운 표정을 나타내는 것이 층층시하의 직급사회와 타협하는 방식이었다.
그 후 나는 20명의 강사를 고용하는 학원사업자가 되었다. 이제 눈치 볼 윗사람이 없어졌으니 만고강산 늴리리 행복해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사장님은 새가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직원들의 낯빛만 어두워도 무슨 불만이 있는지 사직서를 내는 게 아닌지 눈치를 보느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년실업이 많다지만 유능한 강사 채용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나는 여기가 얼마나 좋은 직장인지 얼마나 미래가 밝은지 과시하느라 위선을 떨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나는 인생 3막을 살기로 결심하고 사업체를 정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고, 누구도 고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디고. 노사관계의 양 측면을 다 경험하면서 화폐로 엮인 인간관계의 한계를 질리도록 본 사람의 대답이다.
이 소설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고발로 끝나지 않는다. 위선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유는 인간관계가 삭막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수치로 계량화하는 사회이다. 화폐를 척도로 해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서열화 된다. 소세키는 화폐관계로 변질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대안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신세를 지면 그만큼 되갚아야 한다. 아니 조금 더 붙여서 갚아야 한다. 선물한 사람도 속으로는 상대방에게서 더 큰 선물을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한다. 채무자는 원금에 이자를 붙여서 변상한다. 총칼을 앞세우는 대신 계산기를 들이대는 부등가 교환방식이다.
여기서 잠깐, 도련님과 홋타선생 사이에 있었던 빙수사건을 되짚어보자. 홋타선생은 도련님에게 하숙집을 소개시켜준 날 빙수를 사준다. 도련님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며칠 후 도련님은 교감과 알랑쇠가 하는 뒷 담화를 듣고 홋타선생이 학생을 사주해서 메뚜기소동을 일으켰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자 도련님은 홋타선생에게 빙수값 1전 5리를 갚는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홋타선생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돈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돈 위에 먼지가 쌓여가고, 출근할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도련님의 마음은 불편하다. 한참 시일이 지나서 오해가 풀리자 도련님은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홋타선생과는 신세를 져도 되는 사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진한 우정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셈법, 정말 신선하지 않은가?
연인보다 애틋한, 혈연보다 진한 증여관계
도련님과 기요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연대감이 흐른다. 기요는 도련님의 집에서 살림을 해준 할멈이다. 기요는 엄마를 일찍 여읜 도련님을 감싸주며 자기 돈으로 과자를 사주고, 신발, 양말, 공책도 사준다. “용돈이 없어 궁하지요”하면서 3엔이나 빌려준 적도 있다. 도련님은 5년이 넘도록 기요에게 돈을 갚지 않고 있다. 교사가 되어서 돈을 버는 데도 기요는 우편환으로 용돈을 부쳐준다. 가난한 하녀에게서 상대적으로 돈 많은 도련님에게로 돈이 흘러간다. 어떻게 이런 거꾸로 된 흐름이 가능할까? 납득이 되지 않으면 푼돈에 불과한 빙수값 1전 5리도 기어코 돌려주면서 도련님은 왜 기요에게는 3엔이라는 큰돈을 갚지 않았을까. 그의 주장은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남이라면 깔끔하게 더치페이를 하면 그만이다. 기요와 자신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관계이므로 마음으로 고마워하면 된다. 감사한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답이라는 논리가 궤변 같지만 퍽 설득력 있게 들린다.
기요와 도련님은 순수한 증여관계를 보여준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돈과 물품은 교환이 아니라 증여의 뜻을 담은 순환이다. 기요는 조건 없는 나눔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근대의 화폐관계를 무색하게 만든다. 도련님과 기요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하인이라는 고용관계가 아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호의와 믿음의 관계를 나눈다. 도련님이 섬마을에 근무할 때 기요는 120센티미터나 되는 길고 긴 편지를 보낸다. 도련님은 긴 편지를 바람에 날리며 읽고 또 읽는다. 기요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신분도 낮지만, 도련님에게는 굉장히 고귀한 사람이다. 존중하고 배울만한 스승이며 공감을 이루는 친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동반자이다. 도련님은 도쿄로 돌아가서 다시 기요와 함께 살아간다. 기요는 법원 서기로 있는 조카와 사는 것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도련님과 사는 게 더 좋다. 도련님은 기요가 죽은 후 자신의 가족묘가 있는 절에 묻어준다.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 가족이 된 셈이다.
고대 공동체 사회는 조금전과 물품을 나누는 ‘증여’의 흐름으로 굴러갔다. 지금은 증여라고 하면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방편으로 생각하고 상속이나 증여 중 어느 쪽이 세금을 적게 내는 지만 따지지만 원래는 무조건적인 나눔이었다. 증여는 부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순환시키며 균형을 잡는다. 돈이 남아 돌아서 베푸는 동정이 아니다. 증여는 소유와 축적의 벡터를 벗어나 물질을 순환시키는 운동이다. 기요와 도련님처럼 증여의 관계는 연인보다 애틋하고 혈연보다 진하다. 증여의 관계는 위선에 찌든 화폐관계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실마리를 보여준다. 화폐로 엮인 차가운 관계가 아니라 따스한 연대의식으로 뭉쳐진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망하게 한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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