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과정
장애인 활동보조(이하 활보)를 시작 한 지 어느 덧 4개월 차. 그새 계절 하나가 지나간 걸 보면 짧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허나 막상 지난날들을 글로 풀어내려고 하니 어찌 적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너무 거창한 걸 쓰려고 하는 내 욕심 때문인가? 그래서 난 욕망을 떨쳐내고 여태껏 활보를 하며 경험했던 과정, 바뀌어 갔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적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건 여름이 오기 전이었어요..
더위가 스멀스멀 다가오던 5월. 난 필동의 한 돈가스 집에서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연구실에는 활보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한여름의 주방은 지옥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일까? 괜스레 나도 그 부드러운 바람에 휩쓸리고 싶었다. 얼마 뒤 시절인연이 맞았던지 연구실 G형은 나에게 이용자 G형을 소개시켜줬다. 그렇게 난 돈가스 알바를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활보를 하게 되었다. 이 말인즉슨, 보통의 경우 먼저 활동보조 교육을 받고 장애인 자립센터에 등록한 다음, 활보 일을 구하지만 나의 경우 활보 일을 먼저 구한 뒤(심지어 이용자 G형은 날 한 번도 보지도 않고 OK했다.) 자립센터에 등록을 했고, 활보를 하는 도중 활동보조 교육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난 갑작스럽게 활보를 시작하게 되었다. 활보를 시작하게 된 첫 주. 난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정으로 한 가지 일을 시키면 그와 관련된 두, 세 가지의 일을 했고 나아가 얘기하지 않은 일들도 미리 해두었다.(이놈에 재성...) 하지만 이런 나를 보며 이용자 G형(이하 형)은 흡족해하기는커녕 자신이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라며 자신의 방식대로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했다. 그렇게 활보 초반, 형은 나의 정열을 어떻게든 잠재워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켜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2주 뒤, 드디어 난 주말마다 활보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 첫시간. 강의 교재에서는 활동 보조인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장애인이 자기선택권과 결정권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의 의견이나 결정을 존중해주고, 설령 그 선택과 결정이 적절해 보이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파악하고 조정해 나갈 수 있도록 참을성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활동보조인 양성 교육과정 」, 보건복지부, p71
즉,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란 글자 그대로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해주는 서비스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원봉사와 활동보조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자원봉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봉사자와 장애인이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반면, 활동보조는 일정급여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 주도권이 서비스 이용자에게 있다. 그렇게 난 교육을 통해(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그 동안 내가 일해 왔던 방식이 형에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줬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교육을 받고 온 뒤, 난 그 전처럼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렸다. 얘기할 때까지. 그리고 형이 무언가를 요청을 해도 원하는 바가 정확히 파악 안 되면 재차 물어봤다. 그렇다. 이제 주도권이 형에게로 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보니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실, 난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알아서 해왔기에 (알아서 하도록 커왔기에) 명령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항상 난 어떤 것을 할 때 내 뜻대로 해왔다. 하지만 활동보조 서비스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물론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형의 리듬이 내 몸에 익어갔고 지시 받기보다는 함께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따금 나로써 이해 안 가는 형의 행동들은 스트레스로 돌아오곤 했다. 예를 들어, 우리 형은 까탈스러움의 대명사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형은 청소할 때 자신만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다시 시키는 것은 물론, 공들여 요리한 음식 또한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까다로움은 쇼핑할 때 정점을 찍는다. 언젠가 마트에 샴푸를 사러 갔을 때, 형은 러브미 향과 퓨어 브리즈 향, 시크릿 판타지아 향이 무슨 뜻인지 나에게 물어보며 몇 번이고 샴푸들을 비교했다. 하지만 본디 냄새란 일시적인 것. 난 계속해서 형의 지시에 맞춰 샴푸의 뚜껑을 연 뒤 샴푸통을 눌렀다.(중력의 영향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으면 향이 잘 올라오지 않는다.) 열고 누르고(15회) 닫고, 열고 누르고(15회) 닫고...(활보교육 때 배운 심폐소생술을 샴푸에게 하다니.)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형의 활동보조니까.
그런데 요즘 신기하게도 난 이런 형의 까탈스러움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다. 앞서 말했듯 활보를 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자연스레 형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형의 신체성과 자라온 가정환경에 대해 말이다. 형은 양팔 사용이 힘들기에, 지금껏 밥을 먹는 것부터 씻는 것까지 항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활동보조 제도가 생긴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그 전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진 도움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은 자신이 먹고 싶은 반찬을 먹기보다는, 다른 누군가가 집어 주는 반찬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청소되어진 방 역시 어느 날은 장롱 밑에 먼지가, 어느 날은 이불 속 머리카락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입장에 처한다면 어쩔 수 없이 까다로워지지 않았을까? 냄새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형의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짐작할 수 있었다. 세탁기 옆에 놓여 있는 수많은 섬유 유연제를 보며 말이다. 나와 다르게(우리 엄마는 빨래할 때 섬유 유연제를 넣지 않는다.) 형은 항상 향기 나는 옷만을 입어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향기가 나지 않으면 빨지 않은 것이라 여겨왔을 터이고 이러한 인식은 샴푸를 살 때, 향에 집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냄새와 향기에 예민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형은 내가 형을 이해하기 전부터, 이미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형과 나는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여정을 떠나기 전. 우리는 대충이나마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우선, 나는 부산에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형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부산에 간 김에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와 하루 정도는 같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 했다. 친구? 부산에 연고가 없는 형이 친구를 만난다고 해서 순간 의아했지만 나는 곧바로 활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형 친구 분도 활보가 있어요?" 형과 같이 다니다 보면 의식하긴 싫지만 여러 제약들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형 친구 분까지 동행한다니. 여행 동선을 짜야 하는 나로서는(부산 지리를 모르는 형은 이 일을 전적으로 나에게 위임했다.) 당연한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형은 이유 없이 껄껄 웃기 시작했고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보며 "왜 내 친구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천장에 머리를 박은 듯 멍해졌고 곧바로 형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실제로 부산에 가서 만난 친구 분은 어여쁜 새댁 누나였다.) 이렇듯 지금까지 활보를 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때마다 형은 나에게 별 말 하지 않았고 뒤늦게 내가 실수를 알아차리고 사과하면 그럴 수도 있다며, 괜찮다고 했다. 물론 형의 이해는 장애인과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 짓는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들과 그동안 형을 거쳐 갔던 수많은 활동보조인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이렇듯 형과 나는 은연중 서로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그로인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점점 이해해가고 있다. 앞으로 이 이해가 긍정으로 바뀔지, 부정으로 바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난 활보를 통해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며, 많은 것을 배워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글_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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