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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진정한 자립 - '시설적 인간'에서 벗어나기!

by 북드라망 2016. 1. 8.


탈시설하라! 이 거대한 시설로부터


도망쳐!!



‘시설’에 대한 내 첫 기억은 16살 무렵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시설은 산 속에 위치한 노인 요양원이었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잠깐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여서 엄마를 데리러 요양원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보다 제법 크고, 다소 삭막해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에는 어느 누구도 있지 않았다. 건물 외관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건물 안의 모습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때 나를 바라보던 힘없고 무기력한 수십 개의 눈동자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들어서자 마자 나를 향해 집중되던 그 눈동자들에 대한 공포는 지금도 선연하다.


내가 ‘시설’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된 것은 활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음 만났던 나의 이용자 언니는 몇 년 전에 시설에서 나와서 다른 장애인 2분과 함께 살고 계셨다. 그리고 시설들을 찾아다니며 탈시설 생활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일종의 멘토 일을 하고 계셨다. 활보 일을 하면서 시설, 즉 장애인 복지원에서 나온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그들은 시설을 나와서 사는 것을 ‘자립 생활’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시설이라는 공간이 매우 궁금해졌다. 그리고 탈시설과 자립 생활의 의미 역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 주제에 관심이 많은 몇몇 연구실 친구들과 함께 장애학 세미나를 하며 ‘수용소’를 테마로 여러 가지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시설을 나온 사람들, 그리고 시설을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이 책을 보다보면 종종 끔찍한 시설들이 나온다. 짠 김치와 밥만 주는 빈약한 식단, 배변 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도 집에서는 계속 생활비를 부쳐야 하는 억울함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복지시설 비리를 만날 수 있다. 지금 많은 곳에서 복지시설 비리에 대한 폭로가 이루어지고 있고, 정책에 대한 개선도 계속해서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 흥미로웠던 지점은 바로 괜찮은 시설이라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양가 있는 식단,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 많은 직원들이 있는 서비스 좋은 시설로 바뀐다고 해서 시설의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의 부제는 ‘탈시설! 문제 시설이 아닌 시설 문제를 말하다’이다. 결국 이 책이 지향하는 방향은 문제 시설을 척결하고 복지 문제를 보강해서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설 자체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함께 사회의 내부에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누군가를 '격리'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세미나를 하면서 우리는 종종 난항을 겪었다. 시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시설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을까. 그리고 시설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탈시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등등. 여러 가지 질문들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시설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와 시설을 경험한 사람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립생활’이었다. 한달 전부터 새로운 활보 이용자 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분과 일하면서 곤란한 것은 그분의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이용자의 성격이 가끔 나를 곤란하게 한다. 이용자는 때때로 “엄마가 목욕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할까 말까?”, “바깥에 나갈까 말까?”를 나에게 묻는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밖에 없다. 활보는 이용자의 결정과 의지권을 대신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결정이 최대한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분의 인생 내력을 나는 잘 모른다. 그 분이 시설에서 사셨는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그 분의 개인적인 성격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자신의 결정권을 남에게 위탁하는 행위야말로 다분히 ‘시설적’이라고 느껴진다.


80년대 한국 최대의 부랑아 복지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 비리를 다루었던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형제복지원을 나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회 자체가 힘들었죠. 사회 자체가 힘들었죠. 귀속이 돼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갇혀 있다 보니까 그게 습관이 되고 다시 나온 사회가 힘들었죠.”라고. 정말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시설에서 나오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본 욕구는 바로 세상에 두 발 딛고 혼자 힘으로 서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삶이 힘겹고 고단할지라도 그런 삶을 경험할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말대로 시설에서 남이 내 결정을 대신해주고, 내 삶을 계획해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습관은 시설을 나와 일반 사회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장악할 힘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시설의 기본 문제는 이 점에 있다. 시설이 아무리 서비스가 좋아진다 하더라도, 시설은 기본적으로 그곳의 사람들을 타인에게 의지하려하고 의탁하는 성격으로 만든다. 시설에는 계획적으로 정돈된 시간표가 있고, 식단이 있고, 도와주는 직원들이 있다. 아무리 그 질이 훌륭하더라도 그 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내 의지와 취향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 시스템에 잘 따르는 어린 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세상과 부딪히고 싸워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 때문에 시설은 우리에게도 무서운 단어이다. 시설이 비단 고립된 특정 공간을 지칭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할 수 없도록 만드는 통제 장치를 가리킨다. 모든 삶이 이미 타인의 의견에 따라 기획되어 있는 곳이 바로 시설이다. 시설에서 사람들은 ‘시설적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이 없이는 탈시설을 한다고 해도 ‘시설적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 역시 우리를 자기 삶의 기획자가 되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은 학교에 의탁하고, 우리의 신체는 병원에 의탁하며, 우리의 문화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의탁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설 안에서 엄격한 시간표가 짜여져 있는 것처럼 시설 밖의 사회도 엄청나게 비가시적이고 정교하게 짜여진 루트와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있다. 결국 시설은 장소가 아니다. 시설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이상 탈시설해서 나온 사회조차 거대한 또 다른 시설일 뿐이다. 결국 시설을 경험한 사람도, 시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모두 ‘시설적 인간’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시설을 경험하고 있고,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 우리가 시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은 이 사회가 시설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 루트와 시간표에 저항하는 일이다. 우리가 탈시설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피에 달라붙어 있는 시설적 태도, 우리의 삶을 외부에 의탁해버리고 편안히 살아가려는 그 모든 태도를 떼어내고 또 떼어내는 길밖에는 없다.


진정한 '자립'은 내 것이 아닌 결정들을 떼어내고 또 떼어내는 수 밖에 없다!


글_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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