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고전을 싣고
제갈량의 「출사표」 in <낭랑 18세>
지난 4월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영화과 학생이었는데요, 본인들이 제작하는 영화의 제목이 <호모 쿵푸스>이고, 주인공이 북드라망의 책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들고 다니게 된다며, 책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써도 괜찮을지 출판사인 저희와 저자이신 고미숙선생님(곰샘)께 허락을 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신 곰샘은 '호모 쿵푸스가 이런 식으로 연결되다니 아주 빵 터졌다'시며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었지요(물론 저희도요^^, 전 그 친구들의 허락을 받지 않았기에 여기에 영화의 내용을 써서는 안 되겠죠?;;). 학생들이 만드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저희 책이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는 사실을 만약 제가 『북드라망 百年史』를 집필하게 된다면 꼭 기록해두고 싶네요. ㅎㅎ 어쨌든 '데뷔'를 했으니 언젠가 저희 책도 TV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게 되길 기원하면서 (ppl로는 말고요, 어차피 저희 도... 돈도 없어요;;;) 오늘은 (저희 책 대신) 고전이 출연한 (그것도 아주 큰 비중으로) 드라마 <낭랑 18세>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극도 아니면서 고전이 사랑의 메신저가 된 전무후무한 드라마였습죠!
아유~, 풋풋하여라!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방영되었던 이 드라마를 사실 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인 윤정숙(한지혜) 같은 쌩날라리가 저렇게 멀쩡한 남자를 만나서 시집을 간다는 사실이 너무 괘씸했달까요(네… 저 그런 여자였습니다. 속 좁은 여자;;). 물론 지금은 그것도 다 시절인연이다, 합니다.
미용실을 방불케하는 고데기, 빗, 헤어용품이 가득한 5공주파의 제1공주 윤정숙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제갈량의 「출사표」를 필사한 한문노트. 사연인즉슨,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지만 우리는 운명인 것이 분명한' 도포 차림의 청년이 들고 있었던 것이 「출사표」였기에, 그를 그리는 마음으로 주인공 윤정숙이가 한 자, 한 자 베꼈던 것이지요(시청자들이 한자를 못 읽을까 걱정했는지 본문은 원문으로 베끼면서도 제목은 한글로 써준 센스!). 그리고 그 운명의 도포 청년은 멜로드라마의 법칙상 당연히 정숙과 엮이는 남주인공에 알고보니 정혼자(드라마 내용상으로는 정혼자가 나타났는데 알고보니 도포 청년;;). 그의 이름은 서울중앙지검 검사 권혁준. 부모님이 종손 노릇이 싫다고 종가를 뛰쳐나갔기에 대신해서 종손의 임무를 지게 된 안동 권문의 기대주…인 것만으로도 인생이 벅찬데, 난데없이 나타난 색싯감이 (졸업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나이트클럽에서 자기에게 딱 걸렸던 날라리 고딩!(띠용)
HD 화면 시절이 아니라 사진이 좀 그렇습니다(밑에두요;;;)만 ‘출사표’ 한글은 보이실겝니다. ㅎ 짝사랑을 필사로 승화시킨 역작(?!)
1회에서 3회에 이르는 그 짧은 시간에 첫만남에서 상견례에 결혼이 엎어졌다 말았다를 반복하다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 이후에는 종부의 고된 삶, 라이벌(혁준의 첫사랑 문가영)의 등장과 물리침, 기혼자로서의 퀘스트 수행(드라마에선 ‘첫날밤’이라고 하였습니다;;)과 해피엔딩이 분량을 딱딱 맞추고 있기에 지금 보면 기승전결이 뚜렷해도 너무 뚜렷한 교과서적인 드라마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소재의 참신성과 스피디한 전개, 만화 같은 연출 등이 화제가 되면서 뭇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 모았더랬지요. 신인이었기 때문일까요? 철없음이 연기로만 보이지 않았던 정숙 역을 맡은 한지혜의 연기도 신선했구요. 혁준 역의 이동건은 반듯함 그 자체였고(아무리 그래도 친구 약혼식장에서 <선구자>를 불렀던 것은 쫌;;;;), '직진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전이었으나 다이렉트로 둘의 결혼을 성사시켰던 이순재 할아버지와 따뜻하면서도 등짝을 갈길 일에는 거침없는, 그야말로 '엄마' 김해숙 아줌마의 연기는 다시 봐도 일품입니다. 이렇듯, 캐스팅이며 스토리에 흥행 성적까지 당시에도 충분히 여러 미덕을 갖춘 드라마였는데 지금 보니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고것은 바로 고전이 사랑과 삶의 기술이 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아시다시피 정숙과 혁준의 첫만남은 도포차림의 혁준과 변복을 하고 학교 담을 넘어 땡땡이를 까고 있던 정숙이 부딪치면서 이루어졌지요. 이때 혁준이 품고 있던 「출사표」가 정숙 쪽으로 날아갑니다(내용상 사랑의 ‘출사표’를 던진 건 정숙인데, 이 장면을 다시 보니 사랑의 출사표는 혁준이 먼저 던진 것이란 생각이 들대요^^). <낭랑 18세>에서 정숙은 몇 번이나 밉지 않은 '뻥'을 치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출사표」를 좋아하셔서 매일 외우셨다는 이야기는 참말이었나 봅니다. 전교 꼴찌에 준하는 성적을 가지고도 한자로 쓰여진 '출사표' 세 자를 거침없이 읽어내립니다. 뿐인가요. 그날로 노트에 「출사표」를 옮기고 또 옮깁니다. 요것이 참으로 중요한 대목이지 뭡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에로스를 수련으로 승화시키다니요! 설사 후일 혁준과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가도 「출사표」와 한문은 남았을 테니까요. 사랑은 갔어도 수학은 남았던 곰샘처럼요(요 사연은 저희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에서 찾아보셔요. 209쪽부터 보시면 됩니다^^). 만약 첫눈에 반했다며 부딪친 남자, 혁준의 뒤를 무작정 따라붙었다면 정숙은 그냥 '미친년'(생활 언어… 하하;;)이 되고 말았다, 에 전 제 편집자 인생을 걸 수 있습니다!
「출사표」는 정숙에게 사랑을 가져다 줬을 뿐 아니라, 정숙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합니다. 혁준과 결혼을 하겠다, 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결혼을 해서 종가의 종부 자리에 오른(?) 정숙은 시집간 첫날 어른들께 처음 지어올린 밥도 새까맣게 태워먹어 결국 '흑룽탕'을 대접한 흑역사를 가진 여자. 그러기에 이 여자에게 종부 노릇이란 산 넘어 산일 수밖에 없는 가운데 종가의 기제사에 맞춰 정숙을 보시겠다고 모인 종친들은 (눈치 없이) 정숙에게 부덕(婦德)이 무언지 등등을 묻습니다. 정숙의 할아버지는 혁준의 할아버지와 절친으로 이 자리에서의 망신은 정숙의 할아버지에게까지 뻗치게 될 것이라 더욱 난감한 상황에서 정숙을 구출해준 것은 역시 「출사표」! 어르신을 뵈니 할아버지 생각이 절로 난다며 할아버지가 외우시던 「출사표」를 읊어보겠다고 나선 정숙은 그 특유의 넉살로 「출사표」 전문을 낭송하며 시할아버지는 물론 그 자리에 모인 어른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합니다. "과연 안동권문의 종부로서 손색이 없다"는 최고의 칭찬까지 듣게 되지요. '서사와 경청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매혹적인 교량'(『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인 것인데 정숙의 낭송이 그것을 딱 충족시켰달까요. 해서, <낭랑 18세>가 전해준 최고의 메시지는 '고전은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라는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네요. 사랑은 썸이 아니라 고전을 타고 온다라는 것도요.
시작합니다잉~ "출~"
박수! 박수, 박수, 박수! 퐌타스틱!
훗, 우리 종부는 이 정도!!(^^v)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제갈량의 「출사표」는 어떤 글이었나 살펴볼까요?
<낭랑 18세>에서는 정숙이도 혁준이도 「출사표」를 달달 외우는 설정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드라마에선 맨 앞과 맨 끝(이라고는 하지만 제갈량의 관등성명 같은 부분이랄까요;;;)만 살짝 노출된다지요 ㅋㅋ
우리도 앞부분만 좀 볼까요?;;
先帝創業未半선제창업미반 而中道崩殂이중도붕조
今天下三分금천하삼분 益州罷弊익주파폐 此誠危急存亡之秋也차성위급존망지추야
然侍衛之臣연시위지신 不懈於內불해어내 忠志之士충지지사 忘身於外者망신어외자
蓋追先帝之殊遇개추선제지수우 欲報之於陛下也욕보지어폐하야
뜻은 이렇습니다. "선제께서는 창업을 이루던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위, 오, 촉의 셋으로 나뉘고, 촉의 도읍 익주는 쇠약해졌으니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한 때입니다.그런데도 폐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부지런하고 충신들은 조정 밖에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일함은, 선제의 기억을 잊지 않고 폐하께 보답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선제는 유비를 말합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촉을 위해 일했지만 유비는 '중도붕조'하였고, 관우와 장비 또한 눈을 감았지요. 한마디로 촉의 국운이 기울 대로 기운 마당이었으나 위나라 땅을 수복하라는 유비의 유지를 지켜주기 위해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향합니다. 그의 「출사표」는 위나라로 떠나기 전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표'(表; 자신의 생각을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사실 출사표는 출병할 때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보통명사였으나 제갈량의 문장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출사표'라 하면 자연 제갈량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요. 구구절절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는 마음이 깃들어져 있어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문은 요기서 한번 읽어 보시면 되겄습니다. 저는 충신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선제(?)께서 창업미반하신 채로 중도붕조하시어 존망지추에 이른 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시대에는 이런 출사표가 쓰여질 리 없다는 사실은 좀 안타까웠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그리 길지 않으니 꼭 읽어 보시구요, <낭랑 18>세는 16부작이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면 금방입니다. 도전해 보세요~^^
글. 편집자 k
'지난 연재 ▽ > 편집자 k의 드라마 극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자 k의 예능극장] 정상인 듯 정상 아닌 <비정상회담> (2) | 2014.09.15 |
---|---|
[편집자 k의 드라마극장] 드라마 속 그 책 다시보기 (2) | 2014.08.13 |
[편집자 k의 드라마극장]『대학연의』를 아시나요? (0) | 2014.07.16 |
[편집자 k의 드라마극장] "그런데 말입니다." 김상중과 <거짓말> (4) | 2014.06.18 |
[편집자 k의 영화극장] 소설 VS 영화, 이광수의 ’재생’ (0) | 2014.04.23 |
[편집자 k의 드라마극장] 세 번 결혼‘할’ 여자, 문제는 식상! (0) | 2014.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