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아리테 공주>와 자기배려
탑에 갇혀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공주.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는 기사와 해피엔딩… 그런데 전혀 다른 스타일의 탑 위의 공주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테. 보물을 찾아오는 용감한 기사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힘겹게 보물을 찾아왔지만 결혼하기로 결정나지 않아 애가 탔던 기사가 공주가 있는 탑으로 몰래 그녀를 만나러 간다. 공주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 기사, 그런데 창 쪽으로 다가온 공주는 그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꿋꿋이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한다. 장미를 선물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리테는 이 꽃은 동쪽화단에서 가꾸는 꽃이라며, 창문을 닫아버린다.
기사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결혼 후에 얻게 될 무언가였다
아리테가 관심있는 건 결혼도, 보물도 아니었다. 결혼을 미끼로 보물수집을 하는 건 왕과 대신들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만나고 있었다. 어떤 기사가 괴물을 물리쳤다고 의기양양하게 모험담을 늘어놓자 괴물이 아니라 채식만 하는 동물이라며 왜 죽여야만 했냐고 물어 그 기사를 당황시킨 적도 있다. 또, 자신이 갇혀있는 탑의 비밀 통로를 책으로 알아내어 밤마다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입수된 다섯 개의 보물 중 대신들이 가장 쓸모없다고 한 책이 ‘진짜 보물’임을 알아본 것도 그녀가 유일했다.
드디어 밖으로 나갈 기회가 온다.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던 마법사 일족인 ‘복스’가 나타나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이다. 아리테는 결혼식이 준비되는 동안 몰래 성을 빠져나가지만 경비병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오게 된다. 아리테가 “장안의 어린 도제조차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세상에 나온 그대로. 그래서 저 문을 나서서 공주님 같은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바깥 세상에서 기다리는 좌절조차 지금은 맛보고 싶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공주가 저주에 걸렸다며 수근댄다. 왕은 공주에게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하라며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한다.
아직 포기할 수 없다며 뒷걸음치는 아리테 앞에 마법사가 나타나서 자신만이 공주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말한다. 마법사가 마법을 뿅! 하고 사용하자 아리테는 ‘모두가 바라는 공주님’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모습이 바뀌면서 자신의 마음조차 봉인당한 아리테는 누군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하는 인형처럼 되고 만다. 아리테는 마법사와 결혼해 마법사의 성으로 떠나게 되는데…
복스로 인해 인형처럼 변해버린 아리테
도착한 마법사의 성은 폐허같은 곳이었다. 마법사는 그의 일족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정구슬에서 아리테 공주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없앤다는 것을 보고 결혼을 빙자하여 데려온 것이었다. 아리테는 도착하자마자 지하에 갇히게 된다.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전형적인 스토리라면, 멋진 남자캐릭터였겠지만 <아리테 공주>는 그런 선입견을 뽀개버린다. 아리테를 도와주는 사람은 마법사에게 밥을 해주는 암프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물이 없는 이 마을에 물을 공급해주는 대가로 밥을 해주는 계약을 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할머니가 7세일 때부터 마법사 복스가 나타났고 늙지도 않은 채 그때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고 얘기해준다. 하지만 암프르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우물을 파고 있다고 말한다. 암프르를 만난 이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아리테에게 걸린 마법이 스스로 깨지면서 그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리테를 구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리고 암프르를 돕고 싶은 마음이 마법을 깨뜨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복스에게서 벗어난 이후 자신이 입고있던 공주의 옷을 벗어버린 뒤 풀 숲에 드러누운 아리테의 표정에 비로소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 이제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잠재력을 맘껏 발휘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 잠재력의 핵심은 지성 혹은 지혜다. 자신의 몸과 일상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능력, 소통과 교감을 위한 능동적 실천, 오직 자신의 힘으로 삶의 비전을 탐구할 수 있는 용기와 통찰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솔직히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없다. 하여, 지성과 지혜는 언제나 인복을 불러온다. 인복이 곧 네트워크요 코뮤니티다. 이 과정에서 얼굴은 자연스레 바뀐다. 얼굴의 표정과 생기는 곧 ‘운명의 지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고미숙, 『연애의 시대』, 232쪽)
<아리테 공주>는 잔잔한 애니메이션이다. 역동적이고 즐거운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졸음을 유발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찾아 계속 길 위로 떠나는 아리테의 모습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게 된다. 아리테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리테는 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연애’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아리테 공주>는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라고. 그것이 또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아리테의 마지막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다시 시작될 것이니까.
에피쿠로스는 이미 “자기 영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정도로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기란 결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철학할 시간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라든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과 흡사하다. 늙은이는 늙어가면서 과거의 자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인해 더 젊어질 수 있도록, 또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비록 젊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음으로써 또한 노인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철학해야 한다.” 평생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은 세네카가 인용하고 있는 격언이자 생활을 일종의 항구적 훈련으로 변화시키도록 권유하는 격언이다.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결코 열의가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성의 역사』 3권, 66~67쪽)
아리테의 여행을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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