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만의 상봉
1988년 12월 23/24일 밤 10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계신가요? 물론 저도 기억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제가 그날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날짜를 보고 추측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저는 드라마 그러니까 KBS에서 방영되는 성탄 특집극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조선백자 마리아상>.

사실 저는 이 특집극의 제목도 기억하지 못했고, 주연 배우도 ‘윤승원 님(최진실 님과의 CF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하면 우리 북드 독자님들은 아마 다들 아… 아시겠지요?)이었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그저 생각나는 건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다룬 사극이었다는 것, 주인공이 도자기를 빚는 사람이었고, 마리아상을 직접 만들어 구웠는데 당시의 어린 제가 봤을 때에도 빛깔이 참으로 뽀얗고 고왔다(그도 그럴 것이, 밀양도자기와 도예가 홍재표 선생님이 도자기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는데 마리아상은 홍 작가님 공방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문득문득, 정말 뜬금없이 한 번씩 이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지난달 말쯤, 어쩌다 유튜브로 영화 <만다라>를 보다가(이것도 드라마로 된 TV문학관 <만다라>를 먼저 보고 영화로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안성기 님의 항목을 훑어보게 되었는데, 이런 여담이 있는 겁니다. “1988년 <조선백자 마리아상>이라는 특집극 드라마에도 출연할 뻔했으나 불발되었다.” 읽는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아, 이 드라마였다! 저는 <만다라>도 잊고, 안성기 님도 잊고 바로 <조선백자 마리아상>을 찾았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한국방송♬” 유튜브 관계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ㅜㅜ). 세상에, 이 드라마를 38년 만에 다시 보게 되다니요!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의 직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여주 산속 사기장촌에서 뺑뺑이(물레)를 돌리며 사기를 빚어내는 김신봉(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윤승원 님이 아니라 유동근 님이었습니다. TMI이긴 하지만 재미있게도 두 분은 고교-대학 동창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봉을 윤승원 님으로 착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입니다. 아무튼 유동근 아니 신봉은 흉년이 거듭되자 몸 담고 있던 가마를 떠나,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가고자 친구 덕환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신봉은 함께 배에 탄 승객들이 주고받는 바깥세상 이야기로 ‘천주학’이란 말을 처음 듣습니다. 듣자 하니 이 천주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미 애비도 모른다”는 것이어서 신봉은 부모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그들을 ‘개돼지와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해 버립니다. 천주학이고 뭐고 신봉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죠. 당장 급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얼굴조차 모르고 좀 더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저찌 얻게 되는 아내에게 한없이 다정하긴 하지만 삐걱댈 수밖에 없는 것을 보면 재성은 원체 별 볼 일 없고,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였지만 빨리 돌아가신 걸 보면 인성과의 인연도 박한 신봉이에게 비겁만은 드글드글했던 것 같습니다. 신봉은 친구 덕환 함께 떠난 길에서 새로운 친구, 칠보 형님을 만나 운길 가마라는 사기장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기장촌은 비슷비슷한 도공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견주기도 하는 그야말로 비겁의 장이었지요. 훗날의 일이지만 이 사기장촌 사람들이 신봉이를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되면서, 이들은 ‘교우’라는 신봉이의 새로운 비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스포라면 스포일 수 있지만, 이 비겁들은 신봉이를 살리기도 하고 신봉이를 죽이기도 합니다. 극 후반부 신봉이의 절망은 천주에게가 아니라 비겁들에게 버림받음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신봉이에게 교우라는 새로운 비겁을 만들어 준 비겁은 은돌이었습니다. 은돌은 주문받은 그릇을 납품하기 위해 찾아간 마재의 정 부사댁 종이었는데요. 여기서 잠깐! 은돌이도 은돌이지만 ‘마재의 정 부사댁’이라니 좀 귀에 익지 않으신가요? 고미숙 선생님의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힌트로 드리면 바로 떠오르시겠지요. 바로 다산 정약용의 본가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다산은 한양에서 규장각 벼슬을 하고 있고 다산의 셋째 형인 약종이 본가를 지키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표면상 약종과 은돌은 주종 관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교우일 뿐입니다. 정씨 3형제를 타오르게 한 천주의 불이 은돌이에게 옮겨 붙었고, 은돌은 그 불을 신봉에게 전합니다.

정 부사댁에서 하루를 묵게 된 신봉은 은돌이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되고 은돌이의 신앙 고백을 마주하게 되는 동시에 맛보기 교리 수업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은돌이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신봉은 점점 변해 갑니다. 무당의 신딸인 여친에게 “이 세상에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이니 여친이 모시는 잡귀들을 모조리 쫓아 주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덕환에게도 스스럼없이 ”덕환아, 나는 천주를 믿고 싶다. 그리고 너도 믿었으면 좋겠어“라고 전교(?) 활동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고 김신봉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 거침없이 하느님의 품으로 향하는 신봉이 극의 전반부를 끌고 갑니다. 그런가 하면 신봉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인물도 있었지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품에서 아니 아니 더 솔직하게는 천주학쟁이 무리들과 척은 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을까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 <조선백자 마리아상>에선 그런 인물로 ㅇㅇㅇ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튜브에 서비스되고 있는 <조선백자 마리아상>을 보고 확인해 보셔도 좋지만, 오랜만에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펼쳐서 짐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전 다음 달에 다시 돌아올 테니, 시간은 충분하거든요(ㅎㅎ). 뭐, 사실 드라마든 책이든 다 좋습니다. 분명한 건 드라마를 보시면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아니 찾아보실 수 없고,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훑자면 드라마를 아니 보실 수 없습니다. 뭐가 됐든 저만 너무 기다리지 마시고(응?), 다음 달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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