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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 종교의 경계를 넘다

성경, 지고의 자유에 응답한 대장정

by 북드라망 2026. 7. 29.

성경, 지고의 자유에 응답한 대장정

 

이경아(감이당)

 

성경에 대한 이중적 감정
미사나 예배 중에 매번 듣는 하느님의 말씀, 성경. 거룩한 책이고 인류의 경전이기에 읽으려고 해보지만 방대한 양과 작은 글씨, 다소 지루하고 졸리는 내용 앞에서 자연스럽게 덮게 되는 텍스트. 그렇다고 읽지 않기에는 뭔가 신비하고도 중요한 말씀이 들어있을 것 같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전. 읽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우연히 들은 한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는 고전. 신자라고 해도 성경을 통독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자주 들어서 대충 안다고 여기는 까닭도 있지만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어야 할까? 무조건 믿기엔 당혹스런 내용들. 예를 들어 특히 구약에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것, 야곱이 어머니 라헬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쌍둥이 형 에사오라고 속이며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것, 다윗이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일부러 전쟁에 내보내 죽게 함으로서 그의 아내를 얻은 것 등등 야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영웅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성경이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면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흥미로운 문학작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성경을 읽기가 쉽지 않은 데는 해석의 문제도 있다. 잘못된 해석을 하면 지금도 계속되는 이단 논쟁에 휘말릴 것 같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면 혼날 것 같아서다. 물론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혼을 내지 않고 잘 알려 주겠지만 질문을 하기가 편치는 않다. 다른 경전들 -우파니샤드나 주역, 불경과 도덕경 등등-을 읽을 땐 이해하려 하지 믿으려 하거나, 자체 검열을 하지 않는데 유독 성경에 대해선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뭘까? 신을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며 벌을 주는 분으로 착각하듯이 성경도 혹시 잘못 해석하거나, 믿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다는 오해 때문일까? 실제로 구약 같은 경우엔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그렇게 쓰일 여지가 충분하고 그렇게 쓰이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없이 동성애 금지를 예로 들어 성소수자를 차별한다든지, 자연재해나 재앙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위협하는 등등. 이런 면에선 오히려 비신자들이 성경을 편하게 만날 수 있다. 물론 비신자들도 성경 읽기는 어렵다. 우리나라도 아닌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신자든 비신자든 성경은 결코 쉬운 텍스트가 아니다. 

 

나는 성당을 다니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신자가 성경을 안 읽는다니 웃픈 상황이긴 하다. 성경 공부도 해 보았지만, 흥미가 오래가지 못했다. 왜 읽어야 하는지,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지난 해 비로소 성경을 처음으로 통독하게 되었다. 감이당에서 하는 프로그램에서 몇몇 학인들과 함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매일 새벽 30분씩 낭송했다. 통독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으로 스케치를 했다고 해야 맞다. 함께 낭송한 덕분에 통독이 가능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책이라 여기는 그 책(성경)이 본래는 특정 무리, 그 메시지와 호흡을 맞춰온 무리가 ‘낭송’하며 또 ‘듣던’ 글”이기 때문이다. 낭송으로 성경을 만나니 깊은 의미는 여전히 모르더라도 내용들이 좀 더 생생하게 전해졌고 입에 착착 붙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만 들어도 글귀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다 같이 동시에 성스러운 느낌을 받기도 했다. 묵독으로는 알 수 없었던 낭송이 주는 힘이었고 성경이 낭송하며 듣던 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경을 스케치하고 나니 성경이 더 어려워졌다. 당황스럽고, 같은 챕터 안에서도 앞뒤 안 맞는 내용, 지금의 사회적 윤리와 문화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러면서 성경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성경 자체, 성경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성경은 언제부터 쓰였고, 누가 쓴 것인지? 그래서 성경을 어ᄄᅠᇂ게 만나야 하는지? 두 번째 통독을 하고 있는 지금 성경을 제대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하강,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구술하신 것을 저자들이 직접 받아썼다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교리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들이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왔고, 이 이야기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인간이 기록한 책이 성경이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께서 계시하셨음을 증명한다. 하느님은 인간 세상과 역사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일하시며...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우리와 만나신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신 신비를 말한다. 이런 계시의 독특성은 다른 경전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가 우주의 원리와 제의에 관한 것이고, 불교 경전이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이라면. 성경은 인간이 신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신이 하강한, 신이 인간의 시간 속에 개입한 사건에 대한 경전이라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천지자연의 이치나, 선악의 도덕,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 어떻게 구원을 실현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은 ‘옛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여정을 보여준다. 구약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역사적 사건들, 기도, 하느님 찬미가와 구원의 약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크게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 등 4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교에서는 모세오경을 ‘토라’라고 부르며 가장 중요한 문서로 여긴다. 신약은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 즉 ‘새로운 계약’으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맺은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과 그 제자들에 관한 행적과 말씀에 대한 기록이다. 신약에는 네 권의 복음서 즉 같은 관점을 공유한다는 의미인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과 사도행전, 스물한 개의 서간과 요한 묵시록 등 27권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성서가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라는 점이다. 계약하면 먼저 주종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는데. 고대 근동에서도 계약이란 주로 왕과 신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법적인 상호 합의였다. 이런 계약은 일방적이고 위반하면 그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계약 사상은 유한한 인간, 조건부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과 무한한 자유이신 하느님꼐서 상호 약정, 협정을 맺었으며 상호 협력을 약속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계약은 절대 복종이 아니라 인간이 신이 하는 일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세계관에선 신을 대리한다고 하는 왕을 제외하곤 인간이란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경은 신이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와서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인간을 대화 상대로 부른 계약을 기록하고 있다. “대화란 두 인격이 서로의 권리와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는 진정한 상호 관계를 전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하느님을 인간과 유사하게 그리는 이른바 ‘신인동형론적’ 묘사, 예를 들어 신이 화내고 질투하는 모습은 신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신이 인간의 삶에 그만큼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신과 인간의 상호 존중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노아,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이들을 하느님의 창조를 이어갈 상대로 부른 것이며, 이들이 응답한 것이다. 이로써 성경은 인간이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자유의지와 존엄성을 갖춘 존재로서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경에 대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
성경은 구약 46권, 신약 27권으로 총 73권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는 구약, 신약을 모두 경전으로 삼는다. 반면에 유대교는 구약 즉 타나크(Tanakh)만 경전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이 유효하다고 믿으며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만 봐도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인데도 기독교가 유대교의 구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다소 특이한 지점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구약을 예수님의 출현을 예비한 것으로 보고 있고, 신약을 구약의 완성으로 보기에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 중에서도 가톨릭은 73권을 개신교는 구약의 6권을 외경으로 분류해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서로 구약의 권수가 다른 이유는 개신교는 히브리어 성경 기준을 따르고, 가톨릭은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septuaginta)을 따르기 때문이다. 칠십인역 번역 당시 가톨릭은 히브리어 경전에 없는 6권을 번역해서 제 2경전으로 정경에 포함시켰다.


칠십인역이란 기존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칠십 명의 학자들이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유다인들이 히브리어를 쓰던 동안에는 구약 성경을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 이후 유다인들은 헬레니즘 영향권에 들게 되자 헬라어를 쓰게 되었고, 점점 히브리어에서 멀어졌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헬라어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칠십인역을 사용하다 로마 통치 아래에선 칠십인역 성경을 비공식적으로 라틴어로 번역해서 썼다. 그러다 380년경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는데 이것이 ‘불가타 성경’이자 기독교의 표준 성경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또 하나의 차이는 계시(啓示)에 대해서다.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데 가톨릭에서 계시는 기록으로 전달된 성경과 기록되지 않고 전달되는 성전(聖傳)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본다. 즉 성경 외에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를 통해 전해진 증언들을 계시라고 본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하느님 말씀과 동일시 한다. 이러한 인식은 차이를 낳는데. 교리적으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나 연옥, 고해성사 등에 관해서 개신교는 성경에 이런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기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해석에 있어서도 입장 차가 있다. 가톨릭은 교황과 주교단으로 구성된 교도권(Magisterium)의 해석을 따르기에 교리가 통일되어 있고 권위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는 일반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질문을 주저하게 만들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압박을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환경에선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어렵다. 반면 개신교는 각자 교단마다 해석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해석의 다양성으로 인해 자신의 교단이 믿는 성경만 옳다는 폐쇄성을 불러올 수 있고, 교회의 전통과 공동 해석의 지혜가 무시되기 쉽다. 또한 성경을 시대와 맥락이 아닌 지나치게 문자 위주로 볼 위험도 있다.
  


이스라엘의 기나긴 여정 1 – 도시 문명에서 광야로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의 형태였을까? 성경은 한 사람이 한 시대에 쓴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시대를 산 다양한 지역 출신 저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쓴 텍스트다. 그래서 하나의 챕터 안에도 내용이 겹치면서 조금씩 다른 여러 시대의 맥락이 같이 들어있다. 이런 전승들의 출처와 특이성을 알기 위해선 먼저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라도 알 필요가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아담은 평생 일을 해야 하고, 이브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은 농부고, 아벨은 목동이다. 가인은 야훼에게 곡식을 바쳤고, 아벨은 양의 첫 번째 새끼의 기름기를 바쳤다. “하느님은 시기심 많은 인간이 발명한 것 즉 땅에 무리를 가해 얻은 것보다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더 즐겨 받으셨다”. 가인은 야훼의 사랑을 받는 아벨을 질투해 죽이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장남은 가인이었는데 이름의 뜻은 얻음(a possesion)이었고 차남은 아벨로서 슬픔(sorrow)이라는 뜻이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부모가 앞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자식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 또는 부모가 처한 상황이나 심정을 이름으로 지었다. 이들의 이름이 말하듯 가인은 소유를 상징했다. 그의 소유욕은 동생의 죽음을(슬픔)을 불러왔다. 


야훼는 비록 가인을 쫓아냈지만 앞으로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은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목숨만은 살려준다. 카인은 쫓겨났지만 “자기 몸의 쾌락을 위한 것이면 ...무엇이나 얻으려고 발버둥을 쳤다..그는...도량형을 창시했다. 그들은 이런 것을 몰랐을 땐 순진하게 인정 많게 살았는데 가인이 세상을 온통 교활하게 만들었다. 그는 우선 땅에 경계를 정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성벽을 쌓아 요새화했다”, 가인은 쫓겨나서 자신의 쾌락과 소유욕을 채우고 도시를 만들고 성벽을 쌓아 외부와 소통이 아닌 단절을 택했다. 가인은 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제 세상은 서로를 속이고 담을 쌓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는 세 번째 자식인 ‘셋’을 낳는다. 셋의 자손이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노아다.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는다. 셈의 후손이 데라인데 그의 아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는다. 데라는 우르에 살고 있었다. 당시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로 정치와 종교가 발달한 곳이다.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살다 죽는다.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하란에서 떠나라고 명령한다. 하란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우르처럼 도시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다. 야훼는 물질문명이 주는 소유와 정착에서 떠날 것을 아브라함에게 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야훼를 신뢰하며 우르를 떠난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사라와 결혼하고 이들은 가나안에 잠시 정착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에 가게 되고, 이집트에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파라오에게 사라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 가나안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야훼와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동안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자식이 많아지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사라의 몸종인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얻는다. 이 이스마엘이 이슬람의 시조다. 후에 아브라함은 사라와의 사이에 이사악을 얻는다. 사라는 하갈이 자신을 무시해 왔기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낸다. 이사악은 리브가와의 사이에 에사우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는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다. 그중에 레위지파가 사제를 맡게 되는데 모세가 레위지파이고, 다윗은 유다지파다. 

 

야곱은 12명의 아들 중 요셉을 가장 예뻐했다, 다른 형제들은 이런 요셉을 질투했고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 넘겨버린다. 요셉은 이집트 경비대장의 집에 팔려 와서 종으로 일하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파라오의 꿈 해몽을 잘한 덕분에 풀려나와 파라오 옆에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한편 가나안에 심한 기근이 들어 야곱과 11명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이주한다. 이들은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를 하게 되고 요셉의 도움으로 이집트에서 번창하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파라오가 바뀌고 거대한 세력이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두려움을 느낀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삼는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대략 400년간 이집트인들의 노예로 살게 된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 생활에서 구하기 위해 파라오에게 아홉 가지 벌을 내렸다. 그래도 파라오가 완강하게 버티자 마침내 야훼는 이집트에 태어난 모든 장자를 죽이겠다고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했고,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장자의 죽음을 피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을 기념하는 것이 과월절(過越節, pass over)이다. 유월절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의 기나긴 여정 2 – 광야에서 성전으로
야훼는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무사히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다. 이들은 광야에서 40년간 지내게 되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이들을 비추었다.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이집트 종살이로 돌아가겠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야훼는 맛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준다. 그리고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야훼에게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근동 지방에서 믿었던 바알신이나 아세라, 아스다롯... 같은 신들은 주로 폭풍과 비를 주관하고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들이었고, 인신공양이나 집단 성교와 같은 제의가 있었던 반면 야훼는 율법을 주고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것이 되리라... 너희야 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이다." 야훼는 소유와 정주를 멀리하고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풍요가 아닌 거룩한 백성이 되길 바라고 있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가나안에 입성하게 된다. 가나안 입성 후 여호수아가 죽고 판관(判官) 또는 사사(士師)라고 하는 부족의 지도자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판관을 중심으로 12부족이 동맹체를 이루었고 이들의 중심에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야훼와의 언약의 궤가 있었다. 언약의 궤는 야훼의 혈족을 한 데 묶어주는 조약의 상징이었고 이들은 전쟁에 나갈 때도 궤를 들고 다녔다. 판관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야훼를 잊고 다시 우상을 숭배하며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고 고통에 빠진다. 위기가 닥치면 야훼가 새로운 판관을 세워 이들을 구해주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타락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리고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의 시대에 들어서자 이스라엘 사회는 인구도 증가하고 발전해서 이제 부족 중심이 아닌 군주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런 필요에 따라 사무엘은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세운다. 사울은 처음엔 야훼의 뜻에 따라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나중엔 야훼의 뜻에 어긋나게 되고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두 번째 왕이 된다.


다윗은 통일 왕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토대를 닦는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고 무역과 외교에 뛰어나고 지혜로웠다. 하지만 외교적인 이유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고 후궁을 들였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 모시던 신을 숭배하고 신전을 짓는 것을 허락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사후에 통일왕국이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고 12지파 중 10개의 지파가 합류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남유다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없는 북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망하게 된다.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윗 왕조를 이어나가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남았다. 남유다는 이후 히스기야와 요시아 등 개혁적인 왕들이 등장했고, 이후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다. 바빌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이들은 세 차례에 걸쳐 바빌론 유수를 당한다. 


바빌론이 폐르시아에 의해 망하게 되고,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고레스)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돌려보내어 고향에 가서 성전을 짓고 야훼를 숭배하도록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느혜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운다. 성전은 AD 70년경 유대와 로마 전쟁으로 인해 로마에 의해 다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성경, 다양한 전승의 울퉁불퉁함을 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도시문명에서 유랑으로, 광야에서 성전으로, 부족 공동체에서 군주 국가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걸었다. 이 여정을 기록한 성경의 이야기들도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다양한 시대와 지역, 부족과 국가마다 서로 다른 시선이 있었다. 이런 다양한 전승과 편집의 산물이 바로 성경이다. 비교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최초의 성경 텍스트들은 기원전 8세기경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에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종교적 이야기는 공동체 안에서 시나 노래, 이야기 형태로 구전되며 이들의 기억 속에 있었기에 기록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 무렵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안정적 정치체계를 유지하던 때로. 이들은 자신들의 행정, 법률, 세금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앗시리아의 침입 등에 대비해 왕들은 자신들의 통치에 유리한 전승을 기록해서 보관해야 했다. 이런 전승 중 대표적인 것이 J계와 E계로. 이들이 구전되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에 P계와 D계의 전승이 모아져 모세오경이 형성되었고, 각각의 전승은 저마다의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관점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J계 문헌이다. J계는 남유다 왕국의 문헌으로 저자가 신을 야훼(Jahewh)라고 부른 데서 왔다. 여기서는 모세 보다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축이다. 아브라함이 남 유다의 헤브론에 정착했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브라함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구분하며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가 재난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J계에서는 가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바벨탑 이야기 등 창세기의 태초의 역사가 중요하다. 이들은 야훼를 의인화해서 표현하는데 군주처럼 에덴 동산을 걷고, 노아의 방주 문을 닫고, 헤브론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곁에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이들에겐 아브라함이 위대한 민족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야훼와의 언약이 모세가 시나위 산에서 맺은 것 보다 더 중요했다. 

 

두 번째는 E계 문헌으로. 북이스라엘 문헌이다. 이들은 신을 엘로힘(Elohim)이라고 불렀고, 아브라함과 다윗보다는 야곱과 모세를 더 중요시 했다. 모세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보기에 이집트 탈출기가 중요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겪는 고뇌에 대해 공감했다. E계는 하느님을 좀더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예를 들면 모세가 불타는 덤불에서 하느님을 본 것이나.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천사를 중개자로 보내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J와 E계의 문헌은 십계명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야훼의 언약을 적어놓는 전통이 없었고 모세는 야훼의 명령을 말로 전했고 말로 응답했다. 이들에게 시나이 언약은 율법을 받은 것 보다는 모세와 장로들이 야훼를 보았다는 데 방점이 있다.

 

세 번째는 D계로 기원전 7세기 무렵 유다의 요시아 왕 무렵에 쓰여진 신명기계 문헌이다. 이들은 모세가 야훼에게 계약을 받아 돌에 새겼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J와 E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안 좋은 의도라기 보다는 당시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유다도 불안한 상황에서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명기 저자들은 입헌 군주제와 독립적인 사법제도를 운영하고, 지방의 산당에서 지내던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지내도록 하는 등 많은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이들은 신화적인 요소를 덜어내고 합리적인 신학을 전개했는데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늘에서 내려와 산에서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하느님을 제물로 조종할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P계는 사제계 문헌으로 바빌론 유수 시절에 최종적으로 편찬되었다. P는 성전도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고 바빌론 유수에 처했기에, 이제 모두가 사제가 되어 율법을 지키며 삶 전체를 제의화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에 따라 우르를 떠나야 했고 야훼가 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바빌론 유수를 유다를 떠나 야훼가 함께 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P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폭력적인 내용을 뺐다. 근동의 창조 신화가 신들 사이의 폭력과 전쟁을 주로 다룬다면. 창세기 1장은 하느님이 말씀만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이렇게 만든 창조물을 보시니 좋았다고 하며 무력이 아닌 말씀으로 평화로운 창조를 이어간다. 이들은 디아스포라가 민족의 숙명임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삶이 신성하다고 여겼다.


이처럼 J, E, D, P 전승은 단일한 하나의 계시가 아니라, 다양한 시대와 공동체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했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그런 다층적인 관점들을 지우지 않고 함께 품고 있다. 이러한 울퉁불퉁함이야말로 성경의 생명력이 아닐까?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성경은 그야말로 인간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이 세계가 각자의 다양성 속에서 모순과 역설, 불가해한 일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하나의 우주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듯. 성경 또한 일관성이나 명쾌한 설명보다는 역설적이며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로 엮여 있다. 

성서 역시 다차원적이고, 역설적이고, 서로 충동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배제하고, 그것을 몰이해 속에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당황시키는 현실을 껴안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통찰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곧 ‘성경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성경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를 먼저 성찰하지 않으면, 셩경을 오해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단편적이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듯이, 성경 역시 듣고 싶은 말만 고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주는 깊이와 진실과는 멀어지게 된다. 이런 질문 앞에서 머튼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만나길 기대하는가?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 명상에 대한 지혜? 공동체 내에서 어ᄄᅠᆫ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 선과 악에 대한 명쾌한 구분? 고통에 대한 대답? 천지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이나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일단 기대를 접어야 한다. 성경이 이것들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중점을 두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머튼은 사후세계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 성전인 『베다』를 권한다, 『베다』는 유대인들 보다 앞서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켰고, ”블멸, 영생에 대한 깊은 갈망을 신화적 신들을 찬미하고 기림으로써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베다의 정수를 모아 해설해 놓은 철학서인 『우파니샤드』를 제안한다. 『우파니샤드』는 ”자기 초월의 지혜, 연합, 정신 집중 등 존재의 형이상학적인 일치와 요가 의식을 다룸에 있어...가장 심오한 명상 문헌 모음집“이다. 존재의 근원을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도덕경』과 『장자』를 추천한다. 이들은 ”신비적 명상이나, 추상적인 사유보다는 일상에서 초월을 감지하는 방식으로 터득“하고자 했다. ”선과 악의 문제와 같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알려면 플라톤을, 공동체 안에서의 윤리에 대해서라면 성경보다 일관성이 있고, 명료한 체계를 갖고 있는 유교 경전을 제안한다. 또한, 훌륭한 문학작품을 찾는다면 4세기 수도자이자 히브리어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무니스가 알고 있었듯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성경보다 훨씬 낫다. 


물론 유교 윤리와 성서의 지혜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집회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윤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이런 윤리적 지혜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인간이 인격과 책임, 자유에 대해 의식하게 되던 시기“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발전했고. 이런 인간성은 인류 공통의 것이 때문이다. 또한 선불교와 성서는 상반되지만 유사한 지점도 있다. 선불교는 말이나 문자에는 진리가 담길 수 없다고 보기에 모든 종교 문헌을 거부한다는 면에선 성경과는 다르다. 하지만 선불교가 구체적인 사건들, 눈앞의 현실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처럼, 성경도 일상에서 사건이나 부르심을 통해 존재가 바뀌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머튼은 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도 성경에서 기대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성서는 과학적 용어와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 시적이고 신화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고, ”성서에 기록된 6일간의 창조 이야기를 진화 발전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과학을 성서와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의 한가지이고 예“일 뿐이라는 거다. 이런 시도는 무리한 해석을 불러오고 그것의 예가 창조과학일 것이다. 고통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명할 문제... 로 다루기보다 애초에 불가사의하며, 늘 그곳에 있는 실존적 사실로 여기는 편“이기에 고통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동안 성경 읽기가 어려웠던 것은 우리가 성경 속에서 불멸과, 선악의 도덕, 공동체 안에서의 윤리, 교훈... 등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이 전하려는 중심 주제를 안다면 이제 성경에 대한 접근이 막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성경, 지고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 사건 1

성서는... 우리 각자의 사적 영역으로, 또 복잡다단한 세상 속으로 지고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사건, 침입해 들어온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지고의 자유가 인간 존재의 근간이며 원천이고 인류 역사의 중심입니다... 이를 가리키는 단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야훼(YHWH)라는 글자는 말로 평용할 수 없는 거룩함, 그 자체인 그분의 참된 이름을 대체하는 단어였을 뿐입니다.... 주님, 하느님 등의 말도 모두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단어와 이름을 대체한 것에 불과합니다.  


머튼에 따르면 성경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사건이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평소 습관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존재가 깨지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 이로 인해 삶이 바뀌게 되는 것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고의 자유란, 무언가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내 맘대로 하는 그런 자유 중 가장 최고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이 자신의 내적 진실성을 온전히 발휘하게 만드는, 억압이나 강제 없이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지고의 자유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힘이며 거룩함 자체이기에 야훼라는 말로, 주님, 하느님 이라는 말로 다 가리킬 수 없다. 그러므로 지고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 사건이란, 예기치 않은 순간 강력한 외적 수동성으로 인해 촉발되었지만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가시밭길 일지라도 기꺼이 응답하는, 즉 존재가 탈바꿈하고 변이되는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말한다. 하느님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가 일치하는 시간이다. 성경은 대자유와 내적 자유가 만나는, 존재가 변형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에 걸친 지고의 자유와 만난 인간의 응답이며 대장정이다.   


예를 들면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명령을 내렸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당시는 부족 사회이기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떠나라는 부르심이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외적 촉발이면서 자신 안에 있는 진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고. 강력한 수동이었지만 새로운 존재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기존의 세계가 붕괴하고 자신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는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은 도시문명에서 광야로, 약속한 땅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떠나야 한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길을 떠났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 여정에서 그는 때로는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회의적이기도 했고 그러면서 매번 ”나는 여러분 가운데 몸 붙여 사는 사는 나그네“ 임을 깨닫고 유랑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달리 뚫고 들어온 사건에 머뭇거린다. 모세는 동족을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목자가 되었고. 어느날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에 가서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라는 부르심을 듣는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아브라함과 달리 뚫고 들어온 사건에 대해 주저하고 고뇌한다. 모세는 야훼에게 "주여,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야훼는 주저하는 모세에게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준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를 만들고 눈을 열어주거나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게 하느냐? 나 야훼가 아니더냐? 어서 가거라, 네가 입을 열 때 내가 도와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리라" 야훼는 모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도와주겠다는 약속 즉 계약을 한다. 


모세는 처음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고, 지금의 삶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야훼의 부르심 즉 지고의 자유에 대해 응답했고,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살이에서 탈출시킨다. 그리고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짓는다. 모세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 율법의 세계를 열어나간다. 출애굽기(탈출기)는 모세가 겪는 영웅적인 면모와 인간적인 나약함,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경, 지고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 사건 2
예언자 이사야는 모세와 아브라함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한 인간이 지고의 자유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기원전 740년경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남 유다도 강대국의 위협에 놓여있던 시기에 활동했다. 당시 남 유다 사회는 종교가 형식적인 제의로 전락했고,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으며, 고아나 과부와 같은 약자들이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유다의 귀족 출신인 이사야는 성전에서 무시무시한 현실을 본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그가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가 철저히 무너지는 체험을 한다. 그 순간 자신이 말로만 야훼를 외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억눌러왔던 진실한 내면과 현실적 타협 사이의 긴장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존재가 무너지는 순간 뜨거운 돌과 불집게로 그의 입술과 그동안의 행적은 정화되었고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기꺼이 자처한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지만 그가 가야 할 길은 고난과 고립의 길이었다. 그는 』동족들이 듣기 싫어하는 그들의 타락상과, 오만,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쳐야 했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는 외쳐야 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예언을 기꺼이 해야만 하는 예언자!. 그렇게 이사야는 형식의 종교가 아닌 마음의 종교, 사랑의 종교를 여는 길에 들어선다. 


신약에서도 이와 같은 “지고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 사건”의 강력한 예가 있다. 바로 사울의 ‘회심 체험’이다. 사울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파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다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춘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은 일어나 눈을 뜨려고 했으나 앞이 보이지 않고 깜깜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이 어둠은 단순히 실명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믿었던 세계와의 단절이었다. 기존에 그를 지탱해 주던 세계는 무너졌다. 마침내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시력을 회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를 가리고 있던 무지의 비늘, 율법에 대한 맹신, 엘리트로서의 편협한 특권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자신, 맹목으로 가리워진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같은 세상이지만 다르게 보였고. 같은 사울이지만 다른 사울이 되었다. 사울은 사랑이 없는 율법, 배타적 신앙에 갇힌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이나 말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지고의 자유가 인간의 몸으로 와서 그 자유를 온전히 발휘한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고통과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아갔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지고의 자유는 존재의 근원으로 죽더라도 다시 부활하고 영원하다. 그리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듯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있고 매 순간 우리 안에서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지고의 자유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타락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 사건들은 단 한번의 계시나 체험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흔들리며 변형되는 근원적 만남이며, 그것이 성경이 전하는 가장 심오한 자유의 여정이다. 우리는 이 여정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응답하라! 

 

성서는 독자들에게 인격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결단을 촉구하고, 자유 가운데 헌신하고, 궁극의 질문에 판단을 내리고, 그에 수반되는 내적 분투를 요구한다고 그들은(성서 저자들과 편집자들) 믿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이해하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머리로만 읽거나, 지식을 쌓기 위한 책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과 성경과 연관된 신화, 문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이것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머문다면 성경이 주는 핵심 메시지 “지고의 자유”의 뚫고 들어옴을 놓치게 된다. 지고의 자유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이사야, 바울 등 성경 속 특정 인물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도래한다. 어느날 갑자기 아프다거나,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거나, 아니면 다니던 직장이 또는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또는 살아가는 게 두렵고 무서워질 때. 사는 게 뭔지? 이것 말고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이 들 때. 이런 순간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궁극의 자유가 뚫고 들어온 순간이다. 이 순간 우린 선택의 기로에 선다. 기존의 방식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사건화할 것인지? 아니면 잠깐 스친 상념으로 여겨 무시할 것인지?


우린 대부분 낯선 순간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낯선 순간을 인정하면 자신이 무너질 거라 여긴다. 그래서 그냥 빨리 수습하고 대충 덮으려 하거나, ‘사는 게 그렇지 뭐’,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데 내가 뭐라고’, 또는 쇼핑을 하거나 관심을 다른데 쏟으며 상황을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한다. 응답하지 못한 자유의 부름은 계속 도래하고 그때마다 내적 긴장으로 몸에 쌓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홧병이나 우울증, 또는 피해의식이나 각가지 중독과 탐닉으로. 그러나 도래한 사건 앞에서 무너지고, 기존의 내가 가진 가치를 부수는 뚫고 들어온 자유에 응답할 수도 있다. 내적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가라는 도전에 반응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누군가의 강요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기에 두려움이 있더라도 밀고 나갈 강력한 힘이 있다. 이 길은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여정이다. 길을 내면서 가야기에 어떻게 될지 결과는 알 수 없다. 또한 그동안 누렸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스스로를 조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충만감이 생기고, 그 힘은 계속 질문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우린 성경 안에서 이 과정을 만날 수 있고,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나에게 도래한 지고의 자유 앞에서 나는 이사야처럼 존재가 무너지는 상태가 될 수 있는가? 아님 그것을 막고 회피하려고 하는가? 이사야처럼은 아니더라도 내가 가진 기존의 질서에 조금의 틈이라도 생겼다면 그 틈을 끝까지 밀고 가보자. 이사야가 그랬듯이 입술에 뜨거운 돌덩어리가 닿아 정화될 때까지 기꺼이 질문에 헌신해 보자. 그 과정은 내적 분투의 시간이며 이 시간을 통과할 때 우린 비로소 대자유에 이를 수 있다. 성경은 이 길에 응답한 인간의 대장정이자 지고의 자유에 우리가 지금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집트와 광야 사이, 그리고 그 너머

우리의 성향, 우리의 생각, 우리는 그런 것들을 따라 살지만, 선해 보이는 것을 따르더라도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부정직에 빠집니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것도 우리를 온전히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다른 목소리를, 한층 불가사의하면서도 보다 직접적인 명령을, 존재의 중심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머튼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 속 영웅이나 사도들이 지고의 자유에 참여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존재의 중심, 내면의 한 가운데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 엘리야가 들었던 가느다란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나에게도 이 작은 소리는 예고없이 찾아왔다. 18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일이 즐거웠고 나름 보람도 있었기에 농담이라도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 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하지만 문득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지? 돈 벌어서 애 셋 가르치고, 집 사고, 저금하고, 승진을 위해 경쟁하고... 언제까지 이 생활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돈?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미지? 자아 실현? 이것들을 위해 다니고 있나? 돈이 중요하다면 대체 얼마를 벌어야 하는 걸까? 화려해 보이는 사람들도 다 아픔이 있고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성공하지 못하고, 커리어 우먼이 아니면 안되나? .자아실현이라면 그것이 꼭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로 인정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자 회사를 미련없이 그만두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럴싸한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이런 질문을 더 깊게 끌고 가지 못했다. 탐욕과 감각적 쾌락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난 탈출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노예살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내 안의 파라오, 기존의 욕망과 습관은 완강했다. 백수가 되자 좀 멋진 백수가 되고 싶어 보이차를 배우러 다녔다. 보이차를 마시며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싶었다. 하지만 웬걸 난 보이차를 엄청 사들였다. 보이차를 살만큼 다 산 후에야 “이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과 함께 성당 봉사를 시작했다. 성당 봉사도 열심히 했다. 신앙이 뭔지도 모르고, 봉사 자체의 기쁨 보다는 나중에 하느님께 받을 상을 생각했다. 지성과 영성이 없는 열정은 얼마나 무모하던지. 봉사자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들을 어떻게 풀어야할 지 몰랐다. 겉으론 봉사지만 안으로는 신부님을 사이에 둔 권력다툼과 시기 질투, 직장에서 상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거랑 뭐가 다른가? 내가 바라던 하느님께 받는 상도 ‘복’을 가장한 물질적 축복이 아니었던가? 


세례를 받았지만 난 여전히 이집트에 있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소리에 미혹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홍해를 건너는 행위이자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세례 때 촛불을 받는 것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세례는 형식일 뿐이었다. 여전히 고정관념과 습관의 홍해를 건너지 못했다. 내 안의 완고한 파라오, 곧 물질적 욕망과 인정 욕구는 그대로였다. 이집트를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장소만 바뀐 채 여전히 노예살이 중이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가 있었다. “내가 가진 열정을 나를 위해 써보면 어떨까? 지금까지처럼 축적하고 소비하는 삶 말고 진정 나를 위한 길을 가보는 게 어떨까?”


이 소리는 내게 인문의역학 공부 공동체인 감이당에 접속하게 했다. 감이당 공부를 하면서 좋은 스승님과 도반들 덕분에 이집트를 떠났다. 물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돈은 쌓는 것이 아닌 순환하는 것 이라는 점은 확실히 터득했다. 난 지금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에 있다. 물론 잘 먹고 잘 자는 광야다. 이 광야에서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떠올린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고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강력한 욕심과 완고함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내려놓은 여정이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다고 이집트 종살이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 함께 하는 삶이 아닌 경쟁하는 나, 감이당 공부가 성과가 나는 공부가 아님에도 결과에 연연하는 나를 본다. 그러면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야훼에게 “어찌하여 이 종에게 이런 꼴을 보이십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의 눈 밖에 났으면, 이 백성을 모두 저에게 지워주시는 겁니까?, 이 백성이 모두 제 뱃속에서 생겼습니까? 하며 울부짖는 소리에 위로를 받는다. 나는 모세에 미치지도 못하지만 모세도 나약했고, 괴로워했다는 것을 보며 광야는 누구에게나 힘든 길임을 안다.


또한 모세가 가나안 땅을 미리 정탐하라고 보낸 사람들 중 갈렙은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점령합시다. 점령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가 살려다가는 도리어 잡혀 먹힐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하며 겁을 준다. 이들을 보며 "공부한다고 바뀌냐?" 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지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일을 여호수아가 이어간다. 이처럼 내가 못 하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작은 길을 따라갈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광야에 있더라도 안주하거나, 광야 자체의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다면, 광야에서 이집트 생활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부정직과 잘못에 빠지게 된다. 어디에 있든 언제나 존재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지고의 자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리고 이를 사건화 할 수 있을 때. 성경은 죽은 글이 아닌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이집트를 떠나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에 이르는 여정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여기, 나와 우리의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이집트를 떠나고 있으며 광야에 머무르기도 하고, 가나안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보기도 하는 출애굽의 여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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