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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 종교의 경계를 넘다

구원, 나를 발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정

by 북드라망 2026. 5. 13.

구원, 나를 발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정

이경아(감이당)


믿기만 하면 모든 죄나 잘못이 용서된다면?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간다면? 심지어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황당하고 말도 안 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된다는 구원 교리가 있다. 구원이 과연 이렇게 쉽게 되는 걸까? 믿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라면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다 구원을 받는 걸까?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삶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얻은 구원이란 게 뭘까? 천국 또는 유토피아? 구원이 천국행 티켓이라면 천국은 무엇일까? 단순히 지옥과 반대? 만약 천국이 지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곳이라면 천국이야말로 지루하고 따분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고 믿음을 통한 구원이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뿐일까? 또한 구원을 받지 않고 그냥 이대로 잘 살면 안 되나 하는 의구심도 든다. 교회나 성당에서 자주 듣는 ‘구원’, 대체 구원이란 무엇이고, 이러한 구원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과 그것의 참 의미는 뭘까? 토머스 머튼은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 걸까?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굳이 구원되어야 하나?
나는 구원에 대해 자주 들어왔고,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도 했지만 막상 구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릴 적 내게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었다. 그때 생각한 천국은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고 날마다 재미있는 일이 가득한 곳으로, 마치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나 골인 지점으로 다가왔다. 좀 더 커서는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현실에서 모든 풍요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 다닐 때는 승진하게 해달라고, 결혼 후에는 부동산 값이 오르게 해달라고 빌었다. 주변에선 하느님이 못 찾아오신다며 부동산 주소까지 대가며 구체적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난 부동산 번지 수까지 대가며 진지하게 기도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메디가 따로 없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그 당시 내가 받을 구원의 범주엔 승진도, 집값 상승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비행기에서 유명 인사를 손님으로 만났는데 당신 며느리는 애가 셋인데 매일 새벽기도에 나간다고. 그래서 집안이 무탈하고 다 잘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땐 나도 새벽 기도를 나가야 하나? 라고 잠시나마 고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열심히 기도했건만 승진에 밀리고, 부동산도 오르지 않고, 그 손님의 손주가 마약 혐의로 티비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이것이 기도를 들어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승진에 떨어졌기에 내 삶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고, 직장을 왜 다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나마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로도 승진에 대한 욕심을 쉽게 포기하진 못했다. 또한 부동산이 올랐다면 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또 다른 부동산을 기웃거렸을 것이다. 손주의 마약 혐의로 인해 그 손님의 집안도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예수님은 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의 모범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해 더 고민하거나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구원은 종교에서 하는 좋은 이야기, 성직자들에게 해당하는 주제라 여기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굳이 내가 구원되어야 하나? 그냥 큰 죄 안 짓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성실히 살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태도도 이상했다. 꼭 성직자만 구원받으라고 예수님이 오신 건가? 구원의 길이 어려울 것 같으니 즈레 포기하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게 아닌가? 큰 범죄를 안 짓는다고 자위했지만 작은 죄들, 내 관점과 맞지 않으면 교묘히 상대를 무시하거나 배제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남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었는데도 스스로는 성실하게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서 교묘한 이기심이 아닌 딱히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형식적으로 반성하고 성당 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이기적이 되었다. 내 이기심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이다. 이런 삶은 성실했지만 뭔가 공허했다. 일을 해도, 돈을 벌어도 아이들이 자라도 뭔가 한 구석이 허전했다. 무언가로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과 갈증이 항상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새로운 것으로 허전함을 달래려고 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데 무엇을 하더라도 다 의미가 없었다. 잠깐 성취의 기쁨이 있고, 실패를 통한 교훈이 있었지만 대체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요한복음, 12장 46절~47절)라고 하신 말씀이 다가왔다. 예수님은 성직자나 특정인만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우리 모두를 어둠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우리가 구원되어야 한다면. 우리 삶의 의미는 이 구원에 있는 게 아닐까? 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민족에서 개인으로, 역사에서 영원으로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서 구원은 히브리어 야샤(יָשַׁע)를 어근으로 하는 여러 파생어들을 번역한 말로, 야훼 하느님이 베푸신 구체적인 '보호', '해방', '구출', '승리'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화나 상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안에서 체험한 경험과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 탈출이나, 바빌론 유수로 부터의 귀환, 전쟁의 승리나, 병의 치유와 같은 구체적 사건을 야훼의 구원 활동으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어디까지나 구원의 주체는 야훼이고 모세나 판관들(기드온, 삼손, 사무엘), 왕들(사울, 다윗...)은 야훼의 구원 활동을 위한 도구다. 그렇다고 구약에서 구원이 역사적 사건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한 번의 구원이 아닌 시공을 초월해서 미래에도 하느님의 구원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며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다. 


구약에서 구원의 또 다른 특징은 배타성이다. 야훼만이 구원자이기에 다른 신이나 제사장, 왕 등과 같은 인간 중개자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것은 다신교 사회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유일신 신앙의 특징이다. 여기서 드는 중요한 질문 하나! 야훼만이 구원자이고 다른 중개자가 없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는 것과는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점이다. 신약에서 하느님은 신성과 인성을 다 갖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을 이루신다. 모세나 다윗이 구원의 도구였다면 신약에선 예수님은 하느님 자신이자 구원의 실현자다. 그래서 신약을 믿지 않는 유대교에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교에선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한다. 

 

또한 구약에서 구원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대상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점차 개인의 삶과 고통 속에서도 구원이 체험되는 것으로 확장된다. 시편, 예레미야, 욥기 등에서는 고통받는 개인이 하느님께 구원을 간구하고, 구원의 응답을 체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야훼여! 당신은 곧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내 주십니다"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시편, 18장, 28절) 라며 개인의 고통과 구원을 연결한다. 그리고 바빌론 유수를 겪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잃고 국가가 무너진 상황에서 구원이란 성전이나 국가와 같은 공간이나 외적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이제 야훼는 전 인류를 구원할 분이라는 보편적 구원관이 나타난다. 


동시에 바빌론 유수로 인해 구원이 당장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날에 야훼가 모든 구원을 이룰 거라는 종말론적 구원관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종말의 구원을 완성할 메시아를 기다린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넷째 노래에서 표현되는데. 이 종은 자신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억눌린 이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한다. ”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피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이사야 53장 12절)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연결된다.


정리하자면 구약에서 구원은 처음에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체험되는 것으로,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이나, 전쟁의 승리 등을 의미했다. 이후에는 민족만이 아니라 개인의 고통과 구원을 연결시켰다. 이후 바빌론 유수를 계기로 지금 당장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야훼에 의해 구원이 완성될 거라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구원받을 것이며, 그것을 이루어 줄 구원자 즉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과 인간의 응답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뜻하는 단어는 대표적으로 헬라어인 '소테리아' (σωτηρια)‘다. 소테리아는 육체적 복락과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생활을 의미한다. 육체적 복락이라고 해서 순수한 지상적 상태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구약에서 구원이 종종 역사적 상태를 나타냈다면 신약에선 병의 치료나 환난으로부터의 도움, 위험으로부터의 구출... 등이 육체적 상태만이 아닌 심오한 영적인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약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병이 낫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영혼의 구원, 죄에서 해방,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구원의 표징(sign)이다. 왜냐하면 “영과 육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성서의 인간학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인터넷 한국 가톨릭 대사전, 구원편 참조) 인간은 몸과 영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몸과 영의 분리, 즉 몸은 영의 감옥이라는 관점은 성서적 전통이 아니라 플라톤과 영지주의의 전통이다. 물론 이들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도 몸 보다 영을 중시하거나 고행을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서적 전통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를 보면. 12달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가산까지 탕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여성이 피를 흘리는 것은 부정한 것이기에 이 여자는 성전에 가지도 못하고, 사람들과 접촉하지도 못한 채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거다. 손이 닿자마자 그녀는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낫는다.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고, 그 여자를 찾으셨다. 두려워하던 그녀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라고 하신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녀는 피를 흘림으로 인해 하느님과 관계가 점점 단절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녀에게 흘러갔고 이를 통해 그녀는 하혈을 멈추고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혈을 멈춘 것만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괸계를 회복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서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동시에 유대인들은 병을 종종 죄의 결과로 여겼기에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란 사회적 죄라기 보다는 하느님과 멀어진 죄다.


신약에서 구원의 또 다른 특징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예수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선한 존재였는데 자유를 악용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길 원하셨기에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었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내 하느님과 단절된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다. 친히 사람이 되어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전 생애와 함께 하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구원이 저 머나먼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약에서 구원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은총은 인간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주는 사랑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주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응답, '믿음'과 '회개'와 '세례'가 필요하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동의나 입으로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을 따르는 믿음이다. 가산도 탕진하고 사회적 관계도 끝난 하혈하는 여인이 절박함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잡았듯이 오직 예수님의 길만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래서 그 길을 따르겠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 속에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야고보서 2장, 14절)라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음 맞지만 믿음은 구체적인 선행과 덕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 


회개란 단지 죄를 뉘우치는 게 아니다. 회개란(metanoia) 그리스어로 ’변화‘나, ’~을 넘어서‘를 나타내는 μετά (meta)와 ’마음‘이나 ’정신‘을 나타내는 νοῦς (nous)가 합쳐진 단어로 마음 또는 방향을 전환하라는 의미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마태오 복음 3장, 17절) 말씀도 단순히 죄를 반성하라는 게 아닌 하늘나라가 도래했으니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이다. 세례란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Ⅰ베드로 3장, 21절)

 

세례란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어두운 마음을 빛에 비추어 깨끗하게 살겠다는 서약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보내신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세례 때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 한번의 사건이나 도달점이 아닌 개인과 공동체가 구원에 응답하는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해방되어 가는 여정이다. 구원은 믿음과 회계를 바탕으로 한 세례의 은총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구원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회개, 세례를 통한 응답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이후로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다양한 철학과 문화, 계층과 섞이면서 구원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질문들이 많아지고 신학적 논쟁들이 발생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아니면 구원에 선행이 필수인가? 하느님이 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했는가? 세례를 꼭 받아야 하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이것은 교회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질문이었다. 교회는 이런 질문에 응답함으로서 신앙공동체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했고. 구원에 대해 철학적, 신학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v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가? 꼭 은총을 통해야만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초대 교회 이후 구원론 논쟁의 중심 주제였다.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활동하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복음은 인류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악으로부터 점차 스스로 정화되어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심지어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도 언젠가는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 폴 존슨, 포이애마, 218p)라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이야기했다. 오리게네스 당시 로마는 군인황제시대로 이민족의 침입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군사 지도자들이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황제에 올랐기에 황제의 권위는 떨어졌고, 높은 세금과 군사비용 증가로 경제적 문제와, 기독교 박해가 있었다. 내부적인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 시기는 팍스로마나의 시기로 로마가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시대였다. 오리게네스가 로마의 힘이 강력할 때 보편적 구원론을 이야기했다면 이후. 이민족이 침입하고 로마가 멸망으로 향하는 시기에는 구원에 대한 논쟁이 다르게 진행된다.


특히 4~5세기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립에서 본격화되었다. 펠라기우스는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수도자이자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 펠라기우스는 로마가 멸망에 이른 상황에 대해 실망하는 대신 새로운 구조에 대한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는 "새로운 구조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가능성, 선을 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놀라운 미덕들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책 231p) 그는 원죄란 아담이 혼자 지은 죄이기에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으며. 인간은 원죄로 인해 타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래 선하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 그러하기에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은총이란 초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외적인 도움인 이성, 율법,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자유의지를 통해 이성을 잘 발휘하고, 율법을 지키고, 예수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산다면 멸망의 위기에도 도덕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도시가 불타고 교회당 건물이 무너지고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의가 더 이상 거행되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인간은 영원한 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상에서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같은 책, 236p)며 펠라기우스와는 다른 관점으로, 비관적으로 로마의 멸망을 바라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본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일치된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원죄로 인해 타락했으며 그 원죄는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으며 "악이란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므로 선에 대한 선택을 포기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악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와 보속으로서만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죄로부터 자유을 얻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 (인터넷 한국 가톨릭 대사전, 구원론 참조)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 관점에서 은총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무력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을 이야기하는데 ”하느님의 섭리에 의하면 하늘 아버지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숫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기독교의 역사』, (폴 존슨, 포이애마. 233p). 하느님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리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고 선택된 자는 은총을 받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성장한 인간으로,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더라도 자유의지를 통해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아들로 묘사한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무력한 어린아이로 보았다. 인류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인류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자신의 공로에 의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의 죄, 즉 사탄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겸손해야 한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뿐이다. (『기독교의 역사』, 폴존슨, 포이애마, 238p) 결국 이 논쟁에서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받아들였고,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고.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축소 시켰고. 구원을 단지 도덕적인 노력으로 환원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은 이후 수세기 동안 서방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훗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 역시 이 관점을 이어받아 은총 중심의 구원론과 예정설을 강조했다.

 


중세의 구원론- 안셀모의 보상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과 자유의지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서로마는 게르만족에 의해 나뉘어졌고, 교황은 서방 교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속 권력이 약해지면서 교황은 점점 더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주장하며 사회적,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리자로 세속 권력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특히 11세기에 들어서며 서임권 논쟁 즉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세속 군주 간의 권력 투쟁이 발생한다. ”교황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와 ”황제가 교회에 대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논쟁은 누가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던지게 만들었고. 이런 배경 속에서 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 왜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고 십자가에 희생되어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응답한 사람이 11세기 켄터베리의 대주교이자, 신학자, 철학자인 안셀모(안셀무스)다. 안셀모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육화) 이유에 대해 "그는 세상 질서가 파괴되었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과 화해를 하려면 누군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이를 할 수 없고 죄인이 아닌 분이 보속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서 보속하기 위해 육화가 필요하였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신학 입문』, 곽승룡, 대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334p) 안셀모가 죄에 대한 보상으로 육화를 바라보는 이른바 ’충족설(充足說)‘의 바탕에는 서로마가 게르만에 멸망하면서 형성된 봉건제와 로마법적 사고가 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주군의 명예가 중요한 가치였고, 그것이 훼손될 경우 사과로 끝나지 않고 재산을 바치거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러한 문화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로마법으로 인해, 범죄에는 손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섞이면서 안셀모는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켰으니 마땅히 그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보는 충족설(充足說)을 주장했다. 한편 서임권 논쟁은 107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교황이 서임권을 가지게 되면서 교황의 승리로 끝난다. 


이러한 안셀모의 구원론을 이어받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필연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하느님은 반드시 인간이 되셔야 했던 것은 아니며, 구원의 방식도 다양할 수 있었지만, 말씀(로고스)이 사람이 되어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방식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구원의 길이었다고 본다. 이는 안셀모가 보았던 단순히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드러남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하나 되는 관계의 회복을 구원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 입문』, 곽승룡, 334~337p 요약 정리
  
토머스는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과는 조금 다른 예정론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의 대상이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은총을 통해 통회와 보속으로 구원된다고 보았다면. 토머스는 구원에 은총이 필수적인 것은 맞지만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실 수 있으며 인간이 그것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도 하느님이 주신다고 보았다. 그러니 예정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함께 작용하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을 강조했다면 토마스는 은총과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토마스에게 구원은 죄의 용서나 형벌의 면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의 자리인 하느님과 일치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인간이 은총 안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응답의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가톨릭의 구원 교리는 토머스의 구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중세 후기, 타락한 구원의 길과 종교 개혁의 서막  
중세 후기는(11세기~14세기) 안셀모와 토머스 아퀴나스 같은 이들에 의해 신학이 발전되는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은 왜곡되고 교회는 타락해 갔다. 구원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소망이었고. 이들은 은총 속에서 믿음으로 응답하며 구원의 길을 가기보다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 대표적인 예가 성물 숭배다. 성물은 성인들의 유해나, 그들이 사용했던 유품들로 사람들은 성물을 지니거나 닿기만 해도 구원된다고 여겨 성물을 숭배했다. 성물이 있는 곳은 심지어 순례지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간의 교류가 활발해져 경제가 활성화되고 도시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한, 십자군 원정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고. 이를 통해 신자들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고자 했다. 십자군은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만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까지 죽인다. 


고해성사 역시 왜곡되어 갔다. 처음에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금식이나 선행을 했다면 점점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지나친 고행이나 돈을 통한 속죄로 변해갔다. 13세기에 이르면 죄에 대한 참회를 돈을 받고 하거나, 속죄의 수단으로 교회에 기부금을 내는 게 일반화된다. 이제 세속 군주만이 아니라 개인도 돈을 고해성사 신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면죄부를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모인 돈은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늘렸고 수도원은 점점 부패해 간다.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 정치에 개입하며 성직을 세습하거나,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매매(Simony)가 만연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도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안셀모가 죄에 대한 보상으로서 성육신의 고귀한 희생을 이야기했다면, 교회와 일반 신자들은 죄에 대한 보상으로 돈 거래를 하고 있었다. 토머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구원 여정은 성직자가 은총을 주고 신자는 돈으로 죄를 사하는 방식으로 왜곡되었다. 한편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죽기 전에 구원받고 싶다는 공포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1450년경 구텐베르의 인쇄술 발명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볼 수 있게 된 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이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17년 한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독일의 대주교인 알베르트는 교황청에 엄청난 뇌물을 주고 여러 교구를 동시에 겸직할 수 있는 막대한 권리를 얻는다. 이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진 빚을 갚기 위해 성물을 전시했는데. 이런 성물 중에는 말도 안되는 것들,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 스테파노의 돌멩이,..등등이 있었다. 이를 지켜본 작센주의 영주인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토에서 면죄부가 판매되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신자들은 면죄부를 사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가는 일이 벌어진 거다. 이 무렵 아우구스티누스 소속 수도사인 34살의 마르틴 루터는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에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이며 면죄부 판매와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기독교의 역사』, (폴 존슨, 포이애마,485~486p 요약) 이 문서는 인쇄술을 통해 급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기독교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이런 배경에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문예부흥)를 들 수 있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문주의(humanitas) 사상이 부활했고. 인간 개개인의 능력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개인의 내면과 자기 성찰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인쇄술의 발명으로 개인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되면서 신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대의 시작을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로 본다면 이 시기는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집단의식에서 개인의 내면과, 양심, 자의식 중심으로 접어드는 흐름 속에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루터(1483~1546)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충실한 수도사였고, 수도원 규율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수도사가 있다면. 그게 나일 정도로 엄격하게 따랐다. 나의 수도원 동료들이 모두 동의할 것이다....그러나 내 양심은 내게 아무런 확신을 주지 못했고 의심에 가득 차 말한다. ”너는 의로움을 행하지 않았다. 충분히 참회하지 않았다. 고백해야 할 것이 남아있다.“ 『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교양인, 초판 1쇄, 480~481p 재인용


루터는 아무리 규율을 잘 지키고, 참회를 열심히 할수록 신과의 간극을 느낄 뿐이었다. 루터는 신은 영원하고 전능하기에 죄인에 대한 신의 분노는 영원할 것이므로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영적 절망에 빠졌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 그가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칭의 교리“다. 


 '칭의(稱義)'란 죄인인 인간을 하느님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즉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은총의 행위이며 죄인과 신 사이의 관계 회복을 뜻한다. ’칭의‘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줄 뿐이며, 인간이 선행을 하고 율법을 따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 신이 의롭다고 선언했기에 선행을 하는 것이다. 흔히 선행을 통해 구원된다고 여기지만 루터에게 선행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즉 하느님이 의롭다고 선언했기에 선행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 인간의 선행에 의해 마음을 바꾼다면 무언가에 제약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신이 무언가에 제약되는 것이기에 신의 무한성과 영원성이 훼손된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복잡한 기독교 교리, 토머스 아퀴나스처럼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구세주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지고 구원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계승하면서 더 급진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루터가 말한 믿음이란 지적 동의나, 말로만 오직 예수, 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나, 십일조나 헌금을 잘 바치고, 전도를 하는 차원이 아니다. 루터는 "신앙은 정보나 지식, 확실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지 않고, 시험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선함에 대한 자유로운 굴복이자 즐거운 확신이라고 설교했다." (『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교양인, 초판 1쇄, 483p 재인용) 그에게 믿음은 정통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을 만한 게 없는데 자신을 기꺼이 던지는 용기다. 내가 믿는다고 해도 신이 은총을 내려줄지 어쩔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신을 향한 헌신, ’어둠 속에서 나아가는 도약‘이었다. 이런 믿음을 통한 구원이 바로 루터가 말한 Sola fide! 그러니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의 믿음이 이러한 것인지 되새겨 볼 일이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까?
트렌토 공의회(1545~1563)는 루터의 ’오직 믿음‘을 반박하며 가톨릭 구원교리를 체계화했다. 토머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바탕으로 "강생에서부터 수난, 부활, 그리고 성부 오른편의 영광스런 좌정까지의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간주하며, 그 전체를 구원 행위로 본다. 즉, 성자의 강생만이 인류 구원을 위한 중대한 사건인 것이 아니고, 그분의 대속 행위만으로 인류의 죄가 소멸된 것도 아니며, 그분의 생애와 나아가서 그분의 존재 그 자체가 인류에게 구원이다."  (인터넷 한국 가톨릭 대사전, 구원론 인용)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이란 십자가 희생이라는 하나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그분이 살았던 모든 순간이 인간의 죄를 고치고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며. 신자는 이 구원의 여정에 참여함으로서 구원에 이른다. 루터의 구원이 ’칭의‘의 순간, 하느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사건으로 설명된다면. 그리고 칭의를 통해 삶이 변화된다면, 그에 반해 가톨릭은 은총 속에서 세례와 회개와 속죄, 사랑의 실천을 통한 지속적인 응답과 여정을 강조한다. 


흔히 불교는 자력, 기독교는 타력(은총)의 종교라고들 한다. 불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지를 깨닫고 수행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그렇다고 자력과 타력이라고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이 전제되지만, 그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책임도 요청된다. 즉, 타력만으로 완성되는 것도, 자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은총과 응답, 자유의지와 책임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 밖에는 정말 구원이 없는 걸까? 세례를 받지 않고, 예수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건가? 꼭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인가? 전통적으로 가톨릭은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보았고, 세례를 중시했다. 비신자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불확실하게 보았다. 하지만 제 2차 바티간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인간 전체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모두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은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신앙과 세례,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해도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고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14항)" (『알고 싶은 가톨릭 신학』, 조한규, 성서와 함께, 124p)” 세례를 받고 미사에 열심히 다니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단지 몸만 형식적으로 다닌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니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를 외치며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의 구원 여부를 따지기 전에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먼저 물으라는 거다.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관해서는 “유다인들은 그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구약)이 여전히 유효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16항)” 같은 책, 124~125p 어느 종교를 믿든지, 유대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힌두교든, 아니 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라도 하느님 즉 진리를 향하고 있고 자신 안에 있는 참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토머스 머튼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또 가시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몸의 일원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의해 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삶과 거룩함』, 토머스 머튼, 생활 성서, 46~47p)" 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자 각자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삶의 방향이다. 

 


구원, 혼자서 그렇지만 함께 하는 여정
수 천년 동안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원에 대해 고민해 왔고 그 과정에서 구원에 대한 관점도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인간은 구원을 원하고,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까? 혹시 인간은 본투비 구원을 향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인간과 인간의 세계가 아무리 파멸한 듯 보일지라도, 인간의 절망이 아무리 끔찍해질지라도, 인간이 계속해서 인간인 한, 바로 그 인간성이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고 계속해서 말해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반항하는 유일한 이유다. 만약 인간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인간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실현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인생이 살아갈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박에 인생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다고 알아차린다면 그런 의문은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그처럼 큰 문제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틀림없이 존재하는 인생의 의미를 증명하라며...우리를 당혹스럽게 몰아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의 어느 부분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생의 목적은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삶의 목적이 있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 성바오로, 서문)


인간은 본성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방황하고 고뇌에 빠진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수천 년간 던져온 화두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응답해 온 문제다. 머튼에 따르면 인간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삶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감춰져 있지도 않은 중간 지점에 우리가 서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등하며,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는다. 만약 우리가 삶의 의미를 아무런 노력 없이 즉각 알아차릴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의 목적을 쉽게 이룬다거나, 혹은 애당초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린 결코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문제 삼고,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이 과정에서 성장해 간다. 이것이 인간의 독특함이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이유다. 동물이라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이것은 단순히 자기 탐색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이 바로 구원이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여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머튼은 말한다. “구원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우선, 그 사람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에 대한 완전한 발견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스스로의 재능을 실현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 성바오로, 서문) 머튼은 ‘완전한 발견’(full discovery)이라고 하는데 여기엔 나를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를 내 안에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세상에 쓰임을 다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 기질과 성격을 잘 알아서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자아실현은 할 수 있겠지만. 영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의 ‘나’의 발견이다.

 

그런데 근원적인 나를 발견하는 게 왜 구원일까? 인간은 삶의 의미가 뚜렷이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하지만 그 막막함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을 들고 자신을 마주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안에 숨겨진 신성, 선한 양심, 맑은 거울에 다가선다. 이것은 내면으로의 방향 전환이며, 자기 자신과의 불화에서 화해로,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기에 이 길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를 발견하고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발견했다고 할 수 없다. 자기를 발견했다면 저절로 사랑으로 이어지고, 관계 속에서 신이 주신 재능을 세상에 실현하게 될 테니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기 위해선 두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우리 각자는 개별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자신을 찾아야’할 책임을 진다. (같은 책, 서문)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 누구도 나에 대해 피상적인 것 외에 나의 내면을 인식해서 말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전문가라도, 스승이라도 나에 대해 알려줄 수 없고, 나 또한 그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발견하는 길은 혼자서만 갈 수 있다. 둘째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체험하는지 관찰하는 본능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으로써, 그리고 그들처럼 삶으로써 사는 방법을 배운다“ (같은 책, 서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며 그 관계 속에서 나를 비춰보기에 이 길은 결코 혼자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야 한다. 이렇듯 자기를 알아가는 길은 혼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면서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은 "혼자서 그렇지만 함께 하는 여정", 아니 "함께 해서 가능한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의 출발점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신의 현현(ephipany)
나는 누구인가? 이름이 나인가? 주민등록번호가 나인가? 가족 관계 안에서 위치가 나인가?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이 나인가? 아니면 이기적이고 성급한 성격이 나인가? 머튼이 말하는 나, 발견해야 하는 나, 인간이란 누구인가?

내가 인간이라는 기쁨!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신학적 진리이며 신비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바로 나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그분은 나와 결합하고 나를 그분의 현현(ephipany)으로 만드신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 진정한 인간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자유로 빛이신 그분께 순명함으로써 내 안에 그분을 드러내게 된다. 나의 자아가 먼저 계시를 본다. 나는 그분의 사명이며, 나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사명이 된다. 내가 인간인 것을 경멸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어ᄄᅠᇂ게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사람들의 인간성을 미워한다면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토머스 머튼의 시간』, 토머스 머튼, 바오로 딸, 2판 2쇄, 427p)

  

오, 인간에 대한 깊은 긍정, 이보다 더한 환희는 없을 것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머튼이 주목하는 것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예수님과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하느님의 현현으로 확장되었다. 협소한 존재에서 하느님의 현현으로! 인간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뭔가가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을 품은 그릇이며, 하느님의 빛이 머무는 존재다. 머튼은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만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육신의 사건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깊은 신비를 담고 있는지 말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속에서 자신 안의 빛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드러내야 할 소명을 지닌 존재다. 그러므로 내가 신의 현현인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내 스스로가 인간임을 경멸한다면 결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기에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이고 이런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이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 성 바오로, 서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신비. 이 엄청난 신비를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식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식이 있다. 기독교의 이 신비는 먼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데 자신을 한번 던져봄으로써만 체득될 수 있다. 내 안의 시끄러운 소리-의심과 불안, 비교...-를 침묵시키고 은총 속에서 내가 빛이며, 타인도 빛이라고 믿고 조심스럽게 시도해 볼 때 관계는 변한다. 이것은 시도해 볼 때 체득될 수 있다. 상대 안에 있는 빛을 미워하면서 내 안에 있는 빛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있는 빛을 미워하면서 상대 안의 빛을 사랑하는 것도, 내 자신을 미워하면서 빛을 사랑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 그 빛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빛은 무상으로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다. 이 빛이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될 땐 현실이 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경멸한다면 빛은 잠재태로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빛을 발현하거나 덮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빛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내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드는 질문 하나! 우린 스스로가 최고가 되려 하고, 신이 되려고 하지 않나? 그런데 막상 정말 우리가 신의 현현이라고 하는 것은 왜 비합리적이라고 의심하는 걸까? 오히려 신의 현현이라면 좋아해야 되지 않나? 우리가 이를 의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신은 모든 것을 누리고 지배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가장 낮은 데에 있으면서 자신을 비우기 때문이 아닐까? 머튼은 인간이란 신의 현현이자 빛이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진리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비움과 겸손으로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나와 모든 존재의 사명이자 구원의 길이다.

 


역설로 이르는 구원-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 
이제 구원에 대한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한다. ‘구원해 주세요~’ 에서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게 해주세요~’로. ‘구원 받았습니다’가 아니라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로. 구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도달해야 하는 골인 지점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고 그 빛을 나로서 실현하는 전 여정이다. 그리고 구원은 역설로서 이를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죽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포기하는 것만을 얻는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모든 것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다만 다른 이들 안에서만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실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해야만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 성바오로, 서문) 


우리는 나를 지켜야 산다고 여기지만 이기적 자아를 죽이고 집착을 버릴 때 우리 자신인 예수가 된다. 내 안에 내가 꽉 차 있다면 예수를 발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욕심과 이기심을 포기하는 만큼 얻는다.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한다면 우주 전체인 하느님을 얻는다. 우리는 혼자서 조용히 나를 발견하고 싶어 하지만  나를 비추는 거울이 없기에 혼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의 말과 행동을 나에게 비춰봄으로써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내가 누구인지 진실을 알고 싶다면서 나의 결점을 판단하고 단죄하지만, 진실은 단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용서할 때 드러난다. 이러한 역설이 말해주는 것은 동시적이면서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타자를 통해 나를 알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나를 가지고 타자에게 다시 나아가며, 그 관계 안에서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순환적 역동성. 


그리고 이 역설들은 가장 중요한 하나의 역설로 귀결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없다“. 구원이란 우리 스스로가 신의 현현임을 발견하고 사랑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기에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가 아닌 타자를 사랑해야 하고, 타자를 사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하는 역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22, 39)라고 하시며 사랑을 가장 강조하셨다. 나와 타자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 이 사랑의 의미는 뭘까? 그 뜻을 알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뭔지를 알아야 한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삶을 훌륭한 선물이자 위대한 선으로 받아들이며 살고자 갈망함을 뜻한다.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 때문이 아니라 삶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게 해 주는 것 때문에 그러하다.  (같은 책, 서문)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선물이란 본디 내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게 준 것이다. 삶을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배움을 위해 내게 준 신의 선물임을, 나의 행복 또한 본디 내 것이 아니라 잠시 온 선물임을 받아들이려고 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내가 더 큰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뭔가를 줄 수 있기 위해서다. 우린 뭔가를 받을 때 보다 줄 때 더 행복하다. 그래서 삶에 집착하지 않고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할수록 더 많이 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 힘은 다시 나를 살리는 힘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이렇게 올바른 사랑을 통한 창조하고 살리는 힘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는 파괴를 향한 어두운 힘이 존재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 성 바오로, 서문). 흔히 죽음 충동이라고 불리는 이 힘은 이기적인 사랑이 실패할 때 자신을 해치고 무너뜨린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자율적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경우가 드물다... 종속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같은 책, 33p)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애완동물처럼 길들이려고 하거나, 아니면 상대를 포로로 잡기 위해 온갖 것을 양보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뭔가를 사심 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자기 만족을 느끼거나.... 이런 이기적인 사랑은 상대의 관심을 계속 필요로 하는데 상대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쉽게 좌절하고 혐오로 변한다. 이 혐오는 상대에 대한 증오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 결국 이 힘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이기적인 것이 나를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파괴하고, 이타적인 것이 남만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살리는 역설.
  그럼 사심 없는 사랑이란 뭘까?

"사심 없는 사랑, 정직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랑은 무한정 양보만 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감히 나를 비난하지 못할 친구의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의 보호를 청한다. 나를 변화시키고 바로잡는 일만 하려고 애쓰는 친구로부터, 비난받는 데에만 만족하는 사랑을 지닌 친구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시길" (같은 책, 34p)


사심없는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 양보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다. 사심없는 사랑이란 내가 어려워서, 또는 자신이 안 좋은 사람이 될까 두려워 나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하는 친구에게, 어떤 식의 비난도 나에게 상처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는 신뢰를 주는 사랑, 나만 바라보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잘못된 점만 지적하며 나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명 가스라이팅하는 친구에게 휩쓸리지 않고 그의 시선을 확장 시켜주고, 행동을 멈추게 해주는 사랑, 모든 것을 본인 탓으로 돌리는 친구에게 내 잘못을 전가하지 않고 그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통해 느끼는 만족감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멈추게 해주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때론 과감하고 냉정한 결단을 필요로 한다. 사심없는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할 때 즉 자신에게 진실할 때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무언가를 얻으려 하거나, 나를 내세우고자 한다면 상대에게 진실할 수 없기에. 이기적인 사랑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건 다시 나를 해치는 죽음 충동으로 돌아온다. 
  


나의 구원 여정, 사랑을 향한 실험

하느님의 뜻은 각자가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모든 형제들, 특히 사랑의 질서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과 봉사에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향해 뻗어 가야 한다. (『삶과 거룩함』, 토머스 머튼, 생활성서, 49p )


머튼은 말한다. 구원의 여정에서 사심없는 사랑을 실천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대상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라고. 그런데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 아닌가? 나와 먼 사람들, 자주 안 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감정적인 거리두기가 가능하다. 이들에겐 내가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나마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가까운 이들, 서로 민낯과 욕심을 다 아는 사이, 상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관계에서 사랑이란 정말 어렵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하시지만 우리 시대 원수는 ‘자식이 웬수다’는 말이 있듯이 바로 가까운 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구원 여정의 첫 시험 처가 이 진흙탕이라니! 하긴 쉬운 길이면 이게 구원이겠는가.


여기서 우린 앞에서 머튼이 말한 올바른 사랑을 위한 조건, 삶이 선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려고 훈련해야 하고,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이 이기적인 것인지, 사심 없는 사랑인지 먼저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랑이었다면 그런 사랑을 했던 나를 단죄하기 보다는 나의 무지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겼던 조건들을 이해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보자. 그리고 상대와 대화를 시도 해보자. 상대도 나도 예수님의 현현이라는, 우린 모두 빛을 지니고 있지만, 단지 그 빛이 가려진 존재라는 것을 믿어보며 다가가 보자. 그러면 서로에게 있는 빛이 저절로 반응하게 된다. 한 번의 시도에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서로에게 있는 빛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과정이 익숙하지 않고 낯설지만 우리의 구원은 여정이기에 이 길은 늘 실험과 연습의 연속이다. 그러니 시행착오를 하면 어떤가?


나는 이것을 주변에 실험해 오고 있다. 먼저 아이들과 오래 묵은 감정과 오해를 몇 달에 걸쳐 풀었다. 엄마라는 이유로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했던 행동들, 그렇지만 아이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했던 행동이었다. 엄마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지 않고 참다 보니 감정적 억압이 생겨 오히려 내가 먼저 아이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된 일, 그로 인해 아이는 계속 내게 서운함을 느끼고 그러면 나는 또 거리를 두고. 이런 반복 속에서 생겨난 수많은 오해들. 내 잘못도 아닌데 내 잘못이라 여겨 오랜 시간 맘 속으로 나를 탓하며 살아온 일들... 이런 것들을 상대와 풀었다. 물론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시도했다. 대화 중에 감정이 격앙되어 서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서서히 좋아졌다.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거다. 내가 나의 잘못들에 대해 단죄하지 않고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나니. 아이들에게도 저절로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진솔하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상호적이며 동시적인 것이라 나의 태도와 아이들의 마음은 공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확 풀리는 도약이 일어났다. 나는 이런 실험을 통해 내 안에 빛이 그리고 아이들 안에 빛이 있음을 느꼈다. 서로에게 빛이 있기에 공명이 가능했다.  


풀어야 할 상대가 이 세상을 떠난 경우엔 그와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상대에 대해 내가 가진 쓸데없는 죄책감은 의식하든 안 하든 나를 컨트롤하고 있었고, 그것은 종종 수면장애로 나타났다. 나는 주님의 기도(주기도문)과 성모송, 영광송. 보통 주모경이라고 부르는 이 기도를 틈만 나면 바쳤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빛과 힘과 용기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반드시 주신다." (삶과 거룩함, 토머스 머튼, 생활 성서, 19p) 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구원의 여정에서 시도하고 있는 사랑의 실험들이다. 물론 또 빛이 어둠으로 가려지겠지만. 삶이 선물임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서로가 성육신한 인간임을 몸으로 체득해 가며 때로는 엄마로, 부인으로, 딸로, 며느리로, 동생이자 누나로, 친구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벗으로 쓰임을 다해보려는 연습, 좌충우돌 하며 가는 그 연습이 구원의 길이며, 우리는 이 길 위에서 서로의 빛을 조금씩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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