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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 종교의 경계를 넘다

은총, 프로메테우스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삶

by 북드라망 2026. 6. 10.

은총, 프로메테우스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삶

이경아(감이당)


은총 받았습니다!
기독교에 있는 독특한 개념 중 하나인 ‘은총’. 성당이나 교회에서 ‘은총 받았다’ 또는 ‘은혜 받았다’ 는 고백을 종종 듣는다. 성가대 노래를 듣고 마음이 평온해졌을 때, 신부님 강론을 듣고 어떤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을 때, 또는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병이 나았을 때... 우린 이런 경험을 흔히 은총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래서 은총은 감정적 느낌이나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마치 내 밖 어딘가에 있는 무엇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그럼 감정적인 느낌이 안 들거나, 기대하던 일이 실패하면 은총이 아닌 걸까?


성당에서 봉사할 때 겪은 한 사건으로 인해 은총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다들 한 봉사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분은 일주일 내내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성당 관련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분은 자신이 봉사를 오래 했기 때문에 일을 잘 안다고 여겼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틀렸고 자기 말이 맞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변과 소통이 잘 안되었고 다른 봉사자들과 걸핏하면 부딪히고 싸웠다. 나도 그분과 소통을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분의 변명은 너무 길었고 자신이 피해자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었지만,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분과 대화하다 보면 지쳤고, 안타깝지만 점점 그분을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우연히 그분을 피정에서 만났다. 그분이 조금 바뀌었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피정이 끝날 무렵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그분은 자신이 “은총 받았다고, 하느님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확신에 차 고백하는 것이었다. 피정은 복잡한 일상을 떠나 온전히 자기에 집중하는 성찰과 반성의 시간이다. 그런데 그분의 고백은 안타깝게도 은총이 아닌 자신에 대한 합리화와 강한 자기 방어로 들렸다.


나는 그때 그분이 혹시 마음이 아픈 게 아닐까? 저렇게 꽁꽁 자신을 싸매고 있는데 힘들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그분이 받은 은총이 뭔지 궁금했다. 자신은 은총을 받았다고 강조하는데 왜 자기방어로 들리고, 얼굴은 어둡고, 몸은 굳어있는 걸까? 은총이라면 그것이 남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삶의 태도로서 드러날 텐데 말이다. 이후로도 종종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분들을 본다. 그런데 하나같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봉사를 많이 했더니 아파트 청약이 당첨되었다고, 자식들이 취직을 잘 했다고,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조용히 지내기에 만나기가 힘들다. 이렇게 되면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았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이 그냥 착한 일에 대한 대가로 내가 더 많이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걸까? 당시 은총에 대한 질문이 있었지만 더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토머스 머튼을 공부하면서 은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머튼에 따르면 “실상 우리가 은총을 반(半)물질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은총이 어떤 신비로운 물질, 어떤 물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어떤 상품, 또는 어떤 초자연적인 엔진의 연료쯤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은총을 마치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어떤 영적 휘발유처럼 여긴다.”  머튼이 지적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가지는 은총에 대한 오류에 뜨끔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가 아닌가. 우리가 은총을 나와 분리된 것으로 여기면, 그 순간 어떤 상품이 되거나, 초자연적인 기운,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 보따리, 아니면 하느님께 가는 데 필요한 추가적인 연료로 여길 수 있다는 것. 은총을 상품이나 도구로 실체화할수록 오히려 살아있는 은총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것. 은총이 단순한 심리적 느낌이나 성취가 아니라면, 그 본래의 의미는 무엇이며, 토머스 머튼이 말하는 은총이란 무엇일까?

 



구약에서 말하는 은총: 헨과 헤셋
국어 사전에서 은총은 ‘높은 사람에게 받는 사랑이나 은혜, 또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뜻한다. 그런데 은총(恩寵)을 파자해보니 ‘받는 것’만이 아닌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恩은 因(인할 인)과 心(마음 심)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도록 마음을 내어 주는 것을 뜻한다. 寵은 宀(집 면)과 龍(용 용)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용은 예로부터 신령하고 상서로운 동물이자 임금을 상징한다. 그래서 집 더 넓게는 천지사방이 상서로움이나 임금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은총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축복으로 가득하며, 그 축복 속에 사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 의지처가 되어줄 수 있는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말하는 은총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경, 특히 구약에서 말하는 은총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은총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헨(חֶן,, 호의)과 "헤셋" (חֶסֶד, , 자비)이 신약성서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카리스(χάρις)로. 라틴어로는 그라시아(gratia) 영어로는 그레이스(grace)로 이어진다, 히브리어 헨(חֶן,)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호의를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를 “구약성경에서는 전형적으로 ‘하느님의 눈에서 헨을 보았다’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창세기 6,7~9절에서 야훼가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사람과 짐승과 새까지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뒤이어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는 표현이 있다. 이것을 직역하면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서 헨을 보았다’가 된다. 또한 야훼가 마므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그네로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기, 18,3) 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나리 눈에 든다면’의 본래 의미는 ‘제가 나리 눈에서 헨을 보았다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헨이 어떤 물건처럼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훼가 한 인간을 특별히 좋게 여기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계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헨은 무언가를 받은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이다. 야훼가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먼저 나타내고, 이들은 야훼가 알려준 길을 따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큰 헨이 주어진다. 무상의 호의, 인간의 행동, 그리고 다시 주어지는 헨, 이런 식의 역동성이 펼쳐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야훼의 눈에 든 것이 아니라는 거다. ”헨은 야훼의 선물이며 헨을 주기 위한 동기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런데 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알려주시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이들이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야훼가 먼저 이들을 선택했고, 이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야훼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반면에 "헤셋" (חֶסֶד,)은 ‘신뢰 ⸱ 진실’을 의미하는 용어 ”에메트" (אֱמֶת)를 자주 동반하는데, 이는 신뢰로 서로 동참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의 충실성을 표명한다.  헤셋은 야훼와 인간 또는 인간 사이에 쌍방이 어떤 계약 관계에 있을 때 서로 간의 충실함, 관계를 끝까지 지키는 사랑을 말한다. 헨이 관계의 시작이라면, 헤셋은 관계의 지속이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하느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고 할 때 자비, 자애의 의미로 해셋이 사용되었다. ”한편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야훼도 이 계약에 함께함을 뜻한다. ”너희들이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갈라놓고 그 토막 사이로 지나가며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으니...“(예레미아 34, 18)에서 말하듯. 약속을 어긴 자는 이 짐승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데, 이것은 야훼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백성을 끝까지 돌보고, 관계가 깨지면 야훼도 이렇게 되겠다는 자기 헌신. 이것이 헤셋이다. ” 다시 말하면 헤셋은 일방적인 요구가 아닌 서로가 헌신을 통해 맺는 충실한 관계다. 그래서 구약에서 은총은 인간의 공로로 얻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인간을 향해 먼저 다가오는 야훼의 무상의 호의와 자기 헌신이며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렇다면 구약이 말하는 헨과 헤셋은 신약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신약에서 말하는 은총 1; 예수, 이미 받은 은총 속에서 살라!
은총은 신약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로 그리스어로는 ‘카리스(χάρις)’다. 이 말의 “어근인 "카르"(χάρι)는 번쩍이거나 빛을 발하는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카르"는 기쁨을 주는 대상이기도 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바탕으로 "카리스"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매력이나 호감, 둘째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나 보살핌 또는 타인으로부터 거저 받는 선물이나 호의, 셋째는 이미 받은 카리스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그러므로 카리스는 호의이면서 호의에 대한 감사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우리에게 익숙한 ‘카리스마’도 이 카리스에서 온 것으로, 은총으로 인해 얻은 어떤 특별한 능력, 곧 ‘은사’를 말한다.


사실 신약 성서 중 복음서에는 은총에 대한 표현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은총이고, 말과 행동으로 은총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 활동 기간 동안 은총은 설명되어야 할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은총이 중요해지는 것은 예수님 사후 제자들에게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은총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주는 이들에게만 잘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32~33) 여기에서 인정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카리스다. 카리스는 알다시피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호의다. 그런데 이 말씀에선 카리스가 마치 내가 잘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보상이나 대가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카리스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더 많이 사랑하면 더 큰 보상을 받는다거나, 더 많이 베풀면 더 큰 복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 시기에... "카리스"는 어떤 고위 통치권자에 의한 어떤 사람의 승진이나 혜택 부여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표현“이었기에 대중의 눈 높이에 맞춰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속뜻은 근본적인 차원에 대한 질문이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나 특정 공동체만 받았다고 여기며 타인, 곧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무상의 선물은 보지 못한 채 다른 것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서로 주고받는 사랑, 서로 잘해주는 관계, 서로 이익이 되는 관계 그 자체를 다시 보라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 서로에게 이익이 될 때 잘 지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그러니 이것은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다. 죄인도 그 정도는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 말씀을 바꿔보면 “너희는 악인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를 싫어하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은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은총 속에 있기 때문에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 안에서만 사랑을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없는 이들, 심지어 나를 거부하거나 상처 주는 이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까지 사랑을 흘러가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저주하는 이를 축복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신 사랑 안에 있는 존재로서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장 36절). 그러므로 카리스는 받아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며, 그 사랑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다. 


카리스는 생명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무상으로 받았다. 그 덕분에 숨 쉬고 먹고 입고 웃고 떠들며 때로는 싸우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는 거저 받은 생명은 잊은 채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편을 나누고, 자기 편만을 사랑하게 된다. 동시에 사회적 편견에 따라 부족한 사람, 기준에 못미치는 사람은 배제한다. 한편으론 자신이 그 기준에 못미친다는 열등감 때문에 더 많이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회적 편견 곧, 생명 이외의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허물라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나에게 좋지만, 사실 악인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이들이 나를 깨주는 스승일 수 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갈 때 생명의 역동성은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생명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라는 것, 우리가 생명을 무상으로 받았듯이 우리 또한 조건 없이 타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미 받은 은총 속에 사는 삶이 아닐까.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린다. “은총을 받기 위해 사랑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총 안에서 사랑하라.” “하느님이 무상으로 호의를 베푸셨듯이, 너희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이미 받은 생명 안에서 더 이상의 것을 탐하지 말고 서로의 가치를 교감하라”

 


바오로의 은총: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
이 ‘이미 은총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드러났지만, 이후 이를 가장 깊이 사유하고 체험한 인물이 있다. 바로 사도 바오로다. 은총, 곧 카리스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바오로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101회)라고 한다. 그만큼 바오로에게 은총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은총이란 무엇이었을까? 알다시피 그는 율법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고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아무런 자격이 없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오로.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눈이 머는 사건을 겪는다. 이 사건 이후 바오로에게는 모든 것이 뒤집힌다. 그에게는 인간이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무엇을 하셨는지가 중요해졌다.


그는 율법 이전의 사람들을 다시 본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 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바오로에게 결정적인 통찰을 가져다준다.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것. 관계는 행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에게 은총은 더 이상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먼저 주신 선물이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이 죄인이기 이전에 이미 은총 안에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은총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말하는 은총 속에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로마서 12, 1~4) 


바오로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에게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이것은 잘 치장해서 인신 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산 제물이란 생명력 가득한 몸이다. 몸은 ‘타자들의 공동체’이며 매 순간 세포가 죽고 태어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오장(五藏)과 육부(六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며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다. 간에서 피를 심장으로 보내지 않으면 심장은 제 역할을 할 수 없고, 간의 효소가 위장을 자극해주지 않는다면 소화가 안 된다. 마찬가지로 폐가 간에 산소를 보내지 않으면 간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 몸은 이러한 상생과 상극의 리듬으로 활발한 생명을 이어간다. 

 

또한 몸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위계나 서열이 없다. 발가락이라고 하찮지도 않고, 머리라고 해서 더 중요한 것도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조건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머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과대 평가해도 발가락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냥 머리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발가락도 자신을 과소 평가할 이유가 없다. 발가락이 없으면 균형을 잡을 수도 없고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이 아무리 크고 예쁘다 해도 눈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코가 아무리 못생겼어도 코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각자 자기에게 맞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자체로 축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 평가나 과소평가하며 산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남과 비교하며 하찮게 여기거나, 과시한다. 자기 비하와 과시. 이것은 한 쌍이다. 둘 중 하나를 멈추지 않으면 이것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오로는 말한다. 우리가 드릴 예배란 스펙이 높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잘 생긴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패배 의식에 절어 나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 하며 사는 것도 아니라고. 살아 숨 쉬는 몸 그 자체로,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긍정하며 사는 것이 은총 속의 삶이라고. 이것이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출처 - 카톨릭뉴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인간은 어떻게 선에 이르는가? 은총인가? 의지인가?
신약성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은총이며, 우리는 이미 은총 속에 있고 은총 속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바오로 이후 복음은 그리스, 로마 세계로 더 확장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과 문화, 계층과 섞이면서 구원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질문들이 생겨난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가?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구원되는가? 인간은 스스로 선을 택할 수 없는가? 등 인간의 내면과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4~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면 이러한 질문이 본격화되고, 은총이 신학적 주제가 된다. 바오로에게 은총이 체험이고 태도였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는 개념화되기 시작한다.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린 아우구스티누스. 그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은총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의 사상은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통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펠라기우스는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수도자이자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원죄란 아담이 혼자 지은 죄이기에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타락하지 않았으며 본래 선하게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에게 은총이란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외적인 도움인 이성, 율법,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자유의지를 통해 이성을 잘 발휘하고, 율법을 지키고, 예수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산다면 도덕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이 선을 향하기 위해선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은총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하느님과 일치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원죄로 인해 타락했다. 이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서는 선보다는 불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와 자유의지를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으로 자유, 곧 선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지, 곧 선택하는 능력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이 자유의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선의 결핍인 악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인간 안에 작용해 선을 향하는 마음을 일깨울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아닌 선을 향하게 된다. 


그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은총이란 무엇일까? “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은총은 우선 ‘관계’를 표명한다. 은총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가능한 도구적 교량일 뿐만 아니라 항상 스스로 내어 주는 하느님의 호의이기도 하다.... 특히 성령을 통해 마음속에 부어진 사랑을 거쳐 구세주와 인간의 관계(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가 문제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총이란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관계 그 자체다. 하느님이 먼저 다가오고 인간이 그 사랑 안에서 답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를 통해 드러났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일으키는 사랑을 통해 스스로 이기심이 아닌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은총이란 억지로 나를 하느님께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가 선을 향해 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이기적 욕망에 굴복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매번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나의 이익을 챙기고 만다. 또는 베푼다고 하는 행동이 결국 나를 돋보이려고 함으로써, 나의 행동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함으로 바뀌지 않은가. 근원적인 왜곡으로 인해 우리는 선이 아닌 불선, 하느님이 아닌 이기심을 택하게 되고, 우리 스스로 이를 교정할 수 없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은총은 우리가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인해 평소와 다른 선택을 기꺼이 하게 된다는 것. 예를 들어 살면서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라는 질문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낯선 질문이 드는 순간 우린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기도 한다. 이런 순간을 은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때의 질문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며, 그 은총으로 인해 우린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한편 이런 의문도 든다. 내가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반성하고 행동을 바꿔야 은총이 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마음을 먹는 그 자체가 은총이라고 한다. 그럼 좀 헷갈린다. 다르게 살고 싶지만 매번 이기적 욕망으로 돌아가는 것도 은총이란 건가? 아우구스티누스라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다르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은총이지만, 이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왜곡된 자유 의지라고. 그럼에도 돌아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은총이라고, 그래서 은총은 시작하게 하는 힘만이 아니라 인간을 지속적으로 선, 즉 하느님에게로 이끄는 작용이라고. 

 

결론적으로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모두 동의가 되는 측면이 있다. 내가 마음을 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매번 이기심에 굴복하다 예기치 않은 어떤 순간 은총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들의 죄목은 이렇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다는 점.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축소 시킨 점. 구원을 단지 도덕적인 노력으로 환원했다는 점이다. 이후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중심으로 발전해 간다.

 


토머스 아퀴나스의 은총: 은총을 발견하라!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12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 전파되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중요한 전환점이 생긴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인간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질문이 생겨났다. 동시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대학이 생겨나고, 대학에선 이성을 도구 삼아 신학적 개념을 분석하고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13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본격화되고 이 중심에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1274년)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타락과, 은총의 절대성을 강조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의 구조를 분석하고 나눈다. 그는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그래도 본성이 전적으로 상실된 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족을 사랑하거나, 사회에서 봉사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더 사랑하고, 유혹에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선 은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죄로 인해 상처받은 본성을 ‘치유하는 은총’을 필요로 하고, 그(인간)의 목적인 하느님과의 통교 안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 자기 고유 본성을 넘어서 그(인간)를 드높이는 ‘증대 은총’을 필요로 한다.” 아퀴나스는 은총을 치유 은총(gratia sanana)과 증대 은총(gratia elevans)으로 구분하며, 인간이 치유 은총으로 상처를 회복하고, 증대 은총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하느님과 직접적 소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퀴나스는 은총을 ‘조력 은총’과 ‘상존 은총’으로도 구별한다. 조력 은총이란 예를 들면 우리는 문득 “삶이란 뭐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낯선 질문과 함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기존의 삶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잠시 멈추게 되는 순간. 이때가 선을 향하도록 영감을 주는 내적 작용 곧 조력 은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존 은총이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상태다. 우리는 조력 은총을 통해 일시적으로라도 선을 선택하게 되고, 상존 은총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을 택하며 하느님 안에 살게 된다. 또한, ‘창조되지 않은 은총’과 ‘창조된 은총’으로 나눈다. 창조된 은총이란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란 하느님의 현존으로 하느님은 피조물처럼 창조된 것이 아니기에 창조되지 않은 은총으로 구분했다. 창조된 은총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을 전제로 하기에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아퀴나스에게 은총이란 이렇듯 결핍을 보충하기 위한 외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치유하고 고양시키는 선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무능력과, 오직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인간을 수동적 수혜자로 보았다면, 아퀴나스는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은총이 인간의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복시키고 활성화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은총 안에서 살아가며 응답하는 능동적 존재다. 아퀴나스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문득 삶에 대해 낯선 질문을 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내가 실제로 다른 삶을 원하기 시작한 것인 동시에,이미 은총이 나의 의지 안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때 우리는 두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질문을 밀고 나가며 지금까지 누려온 것을 포기하고 불편한 삶을 감수하며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혹은 질문을 덮고 기존의 방식으로 돌아가 편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로 이 순간 은총과 자유의지가 만난다. 질문이 떠오른 것 자체는 이미 조력은총의 작용이며, 그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조력은총으로 인해 무언가 내 안에서 변화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선을 향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니 창조된 은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은총은 모두 하나의 은총이기에 영역을 구분할 수는 없다. 운동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은총은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그것에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 삶 안에서 작용한다. 내가 질문을 덮는다면 은총은 강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은총이란 특별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 안에 주어져 있다. 그러니 아퀴나스는 우리가 선물로 주어진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은총은 현실이 되고, 동시에 우리는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토머스 아퀴나스 이후: 은총과 자유의지의 긴장
토머스 아퀴나스가 말한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구원 여정은 점점 왜곡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원은 외적인 숭배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성물을 숭배하거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함으로써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고해성사의 참뜻도 변질되었다. 초기에는 속죄의 의미로 금식이나 선행을 했지만 점차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하거나 돈으로 속죄했다. 그러다 13세기에 이르면 참회를 돈을 받고 대신 해주거나, 속죄의 수단으로 교회에 기부금을 내는 게 일반화된다. 이제 세속 군주만이 아니라 개인이 고해성사 신부에게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모인 돈은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늘렸고 수도원은 점점 부패해 갔다.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 정치에 개입하며 성직을 세습하거나,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매매(Simony)가 만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은총이 마치 인간의 행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오해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등장한다.

 

누구보다도 충실한 수도사였던 루터, 그는 아무리 규율을 잘 지키고, 참회를 열심히 해도 신과의 간극을 느낄 뿐이었다. 루터는 신은 영원하고 전능하기에 죄인에 대한 신의 분노는 영원할 것이므로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영적 절망에 빠졌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 그가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칭의 교리“다. ’칭의(稱義)‘란 죄인인 인간을 하느님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즉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은총의 행위이며 죄인과 신 사이의 관계 회복을 뜻한다. ’칭의‘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줄 뿐이며, 인간이 선행을 하고 율법을 따른다고 은총을 받는 게 아니다. 신이 의롭다고 선언했기에 선행을 하는 것이다. 루터에게 선행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바꿔 말하면 은총을 받았기에 선행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의 선행에 의해 마음을 바꿔 은총을 준다면 무언가에 제약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신이 무언가에 제약되는 것이기에 신의 무한성과 영원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루터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란 이름만 남아있을 뿐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급진적으로 해석했다. 

 

그럼 여기서 드는 자연스런 질문.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가? 하느님이 다 결정하는 거라면 인간의 책임은 없는가?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 이후 수면으로 가라앉았던 근본적인 질문들이 루터로 인해 다시 생겨난다. 이런 문제들이 쟁점화되면서, 종교개혁은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나뉘게 된다. 이에 대해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입장을 정리한다. 공의회는 구원이 전적으로 은총에 의해 시작된다는 점에서는 루터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즉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인간은 그 은총에 세례와 회개, 사랑의 지속적인 실천으로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는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루터의 은총론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은총은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은총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선을 행하고 신을 향해 헌신하라는 의미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루터에 의해 폭발적으로 제기된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논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은총을 강조할수록 인간은 무력한 존재로 이해되기 쉽고, 반대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할수록 은총은 약화되는 듯 보이는 긴장이 지속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본성은 마치 분리된 두 영역인 것처럼,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해치는 것처럼 이해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토머스 머튼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토머스 머튼: 은총, 영적 첨가물이 아닌 존재의 질적 변화
머튼은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고방식이나 은총과 인간의 본성(이성, 욕망, 감정, 자유 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태도가 이미 신앙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라고 보았다. 은총은 인간 본성에 부과되어야 할 어떤 영적 물질이나 첨가물이 아니다. 인간이 부족한 존재이기에 하느님이 영적 연료인 은총을 추가로 넣어주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영적인 사람은 단지 그 자신이 간파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흔들어지는 그런 인형일 수도 없고 또 그렇지도 않다. 만일 영적인 인간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옳다면, 영적인 삶은 최악의 자기 소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경우 성화(聖化)란 아무 것도 아니거나 정신분열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은총을 인간과 분리된 외적인 것으로 본다면 마치 보이지 않는 리모콘에 의해 저 높은 곳에서 조정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은 신내림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전하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은총은 선행을 해서 받는 복(福)도 아니다. 이런 생각 역시 은총과 인간을 여전히 분리해서 보는 태도다. 그렇다면 머튼이 말하는 은총이란 뭘까?

”은총은 우리가 선행을 한다거나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해 ’사용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된 물건이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자 활동 그 자체다. 그러므로 은총은 그분에게 가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필수품이 아니다. 실제로 은총이란 우리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성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나는 존재의 질적 특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반가운 손님(dulcis hospes animac)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은총이란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자신이다. 또한 은총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 곧 하느님의 성화 활동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나는 질적인 변화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생명을 주셨듯이, 성령은 우리의 숨처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머튼이 은총에 대해 ’어떤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은총을 실체화하면 그것은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린 은총을 관리하고, 남과 비교하고, 더 많이 얻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내 안에 현존한다면 관점이 바뀐다. 성령의 활동인 은총은 숨으로 비유할 수 있다. 숨을 쉬기 위해 우리는 다른 보조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리고 숨이 들고 나면서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동시에 우리가 숨을 의식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스스로 활동한다. 숨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숨이 더 깊어지고 편안해진다. 반면에 숨이 가쁘고 호흡이 짧다면 어딘가 막혀있다는 신호다. 막힌 곳이 없을수록 숨은 더 깊어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은총은 숨처럼 어떤 보조적 매개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안에 현존하는 성령의 활동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숨에 자신을 맡길 때 정신을 잃거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조정되는 게 아니듯이 우리는 자발적으로 숨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기꺼이 성령의 활동에 나를 내맡긴다. 그런데 우리가 이기심과 욕심으로 차 있다면 성령의 활동이 활발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쉴 때 내 방식을 고집하지 않듯이, ’이기적인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의 성령의 활동은 더 자유롭게 드러난다. 억눌린 욕망은 사랑으로 변하고, 분노와 집착은 흘러가고, 이성은 더 깊은 진리로 인도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질적 변화 속에서 “은총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은총과 본성은 분리되어 있지도 경쟁하지도 않는다. 은총은 우리의 본성을 치유하고 완성한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은총이 우리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활동이고, 하느님이 거져 우리 모두에게 준 것이라면 왜 우린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을까? 머튼은 이에 대한 답으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 은총을 훔치다!
머튼에 따르면 우리가 은총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때문이다. 이 왜곡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신화적 인물과 관련이 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과 인간이 함께 지내던 황금 시대가 끝나자 인간은 희생제를 통해서 신들과 접촉하게 된다. 희생제에서 인간과 신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양을 먹었다. 그러나 이런 분배가 인간에게 불리하다고 여긴 프로메테우스. 그는 인간에게 고기를 더 먹게 해주려고 제우스를 속인다. 이를 알게 된 제우스는 화가 나서 인간에게 불을 빼앗았고 프로메테우스는 다시 불을 훔쳐서 인간에 돌려준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사슬로 묶이고, 독수리에게 간을 뜯겨 먹이는 벌을 받는다. 


우리는 이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를 신에게 맞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온 존재로, 저항과 자유의 아이콘으로, 인간을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여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머튼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이 불을 훔칠 필요가 없었다. “그(프로메테우스)가 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불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 영적 불을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창조하셨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당신의 창조되지 않은 성화의 불, 곧 성령을 주셨다. 그러나 자신 안에 불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했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야 한다고 여긴 불은 사실 본래 하느님이 무상으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무상으로 받은 성령을, 조건 없는 은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불을 주는 신이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로메테우스가 이런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면서 느끼는 죄책감에 있다. “그는 스스로 좌절을 자초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물을 즐길 수 없다. 오직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빼앗아야만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불이 정복의 권리에 의해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것이 진정 자기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에게 은총은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하느님은 아무 대가 없이 주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무언가를 빼앗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싸워서 불을 얻어야 자기 것이 된다고 여겼고, 훔쳐야 했다. 그런데 막상 불을 얻었어도 자신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불이 없으면 결핍을 느꼈다. 그는 불안과 결핍 사이에서 멈출 수 없었다. 훔쳤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결핍에 더 집착하게 되고, 결국 더 훔치려는 자기파괴의 굴레. 바위에 사슬로 묶인 형벌은 신이 준 것이라기 보다는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감옥이다. 이런 굴레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죄책감 뿐. 흥미로운 것은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는다는 것. 왜 하필 간인가? 간은 뜯겨도 자라고, 회복이 비교적 잘되는 장기다. 그래서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지 못했다. 자신은 조건없는 은총을 받을 존재가 아니며, 그럴 자격이 없다고 여겨,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했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무언가를 조건 없이 줘 본 적이 없기에, 조건 없는 은총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뭔가 행동을 해야만 그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의 노력으로 인해 획득한 은총이 과연 나의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언제나 사라질까 불안하다. 그래서 계속 은총을 갈구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데 조급하다. 이런 늪에 빠져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하느님을 믿지 못한다고,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한다고 좌절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머튼은 말한다. 그래도 프로메테우스는 용기있는 자라고,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위대함이 전적으로 환상이라고 너무 성급히 말하지는 말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는 확실히 거인이다. 산을 오를 용기를 가진 자는, 그 오름이 전혀 무익하다 할지라도, 평지에 머무는 자들보다 적어도 어떤 이점을 가진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일을 실행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용기도 없는 머리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올바르게 생각한다는 사람들, all right thinking people)은 신들이 모두 실제라고 주장하지만, 신성함과는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는다. 올바름, 경건, 정의, 종교는 그들에게 단지 여러 본질의 정의로만 존재한다.... 이들의 경건은 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려는 은밀한 결심이거나,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형식적 의례들로만 신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신들의 개념만으로 만족한다.”


이들은 신을 인정한다. 하지만 신과 관계는 맺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는 잘못된 방식이긴 했지만 신과 관계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입으로만 올바름, 경건을 말하지 실제로는 아무런 실천도 없고, 신과 세계에 대해 관심이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당하고 절망을 맛보기라도 하지만, 이들은 삶에 무감각하다. 무엇보다도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겪지만 살아 있고, 이들은 아무것도 겪지 않기에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신앙인이다...그는 믿는 척하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며, 일정한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도, 정의도, 자비도, 하느님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 뿐이다.”

탕자가 집을 떠난 이유: 나의 것과 하느님의 것
프로메테우스는 어쩌다 불을 훔쳐야 한다고 믿게 된 걸까? 머튼은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의 문제를 하느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분리한 데서 찾는다. 머튼의 놀라운 통찰이 이어진다.


 “프로메테우스적 영성(sprituality)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내 것”과 “하느님의 것”에 집착한다. 곧, 무엇이 ‘내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데 집착한다. 따라서 바로 이 충동이, 탕자로 하여금 자신의 유산과 아버지의 나머지 재산을 명확히 분리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우리가 받은 자연적·은총적 선물들 가운데, 어떤 것은 더 우리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더 하느님께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문제는 그가 내 것과 하느님의 것을 단순히 구분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집착한다는데 있다. 물론 우린 구분해야 한다. 언어화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구분은 관계를 맺기 위함이지 소유를 위함은 아니다. 집착하는 순간 은총은 관계가 아닌 소유해야 할 무언가가 되고, 소유는 비교와 증식을 향하게 된다. 탕자도 그랬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신의 것을 떼어내어 소유하고자 했다. 머튼에게 이 유산은 상징이다. 탕자가 요구한 ‘자기 몫의 유산’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아버지와 분리된 ‘나의 것’, 곧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럼 탕자의 다음 행보는?
 

 “탕자는 자신의 몫의 유산을 받아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며(glad), 아버지의 집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떠난다. 탕자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기 전까지, 이 이야기는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이야기와 같다. 탕자는 실제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것’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로 떼어내어 자기 확증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기심과 떠남은 마치 불을 훔치는 것과 같다. 그가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삶은,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에 해당한다. 탕자의 자기실현은 비록 극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프로메테우스적이다.”


탕자는 자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주어진 자기가 아닌 하느님과 단절된 자기를 찾기 위해 기뻐하며 떠난다. 탕자는 하느님과 연결된 자기, 이미 받은 생명으로서의 ‘나’를 믿지 못하고, 성공과 능력으로 ‘나가 아닌 나’ 즉 사회적 자아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돼지와 함께 지낸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한 동물이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탕자는 더 이상 증명해야 할 나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를 내려놓는다. 결국 증명해야 할 나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연결된 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기억해낸다는 것은 자신 안에 새겨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받은 원초적 생명력,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는 자아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이미 충만한 자기, “오래된 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이미 주어진 존재로서의 나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자아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 나. 그러므로 오래된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천지만물과의 연결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이자 되어가는 미래로서의 나다. 물론 탕자는 자기 몫을 훔치지 않았지만 프로메테우스적 욕망 안에 있었다. 

 

탕자의 이야기를 다시 보면 어쩌면 인간은 신에게서 분리되어야 다시 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분리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머튼의 말대로 문제는 구분 자체가 아니다. 구분된 것을 ‘나의 것’으로 확정하고 소유하는 데 있다. 구분은 관계를 위한 것이지,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분된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면 그건 여전히 프로메테우스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 짓고 집착했던 것들을 명확히 구분하고 알아야 은총 속에 있는 주어진 나, 오래된 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지금 우린 어떤 지점에 있을까?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인가.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나의 프로메테우스
나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에 가깝다. 머리로만이 아닌 뭔가 시도는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자기가 받은 무상의 선물을 알지 못하고, 자기 몫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믿으며 자신의 족쇄를 만들었듯. 나도 은총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아직 누릴 자격이 없다고,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선물을 받아 나를 채우려고 했었다. 그래서 더 많이 봉사하고 나누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느님에게서 뭔가를 쟁취해서 내 것을 늘리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 것이 늘어나도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늘어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이게 은총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나를 채우려고 하는 방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기에 마음이 안 편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갈등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기묘한 생각들은, 우리 안에 있는 전쟁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두 법(two laws)’ 사이의 싸움이다. 곧, 우리의 낮은 자아 안에 있는 죄의 법(the law of sin)과, 양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법(the law of God) 사이의 싸움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싸우고 있다. 하느님은 자비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자 하시며, 우리를 우리 자신과 화해시키고자 하신다..
 
사실 나는 내 안에 있는 두 마음, 이기적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마음 과 양심 사이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두 힘의 충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내적 갈등을 하느님과의 충돌로 이해했고, 하느님이 나를 제어한다고 여겼다. 하느님은 자비와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점점 나를 통제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나는 여전히 이런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 여겨 나를 더 증명해야만 한다는 사슬에 묶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싸우지 않는다. 나를 내 자신과 화해시키고자 하신다. 다행히도 어떤 면에선 내 자신과 화해를 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 것을 더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느끼기에 내가 받은 사랑과 능력과 재물을 어ᄄᅠᇂ게 나눠야 할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은총이 반대하는 ‘자아(self)’는 단지 열정적이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운 자아만이 아니다. 곧, 산만하고 흐트러진 ‘‘자아(ego)’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문제되는 것은 폭군적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것은 경직되고 왜곡된 양심으로, 우리 안에서 은밀하게 신처럼 군림하는 존재이며, 무한히 집요하고 질투 어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도래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려 한다. 내 안에는 더 깊은 곳에서 나를 더 몰아붙이는 또 다른 목소리, 초자아가 있다. 그 목소리는 말한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미워도 미움을 인정하지 못한다. 상대에게 화가 난 내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해주기 보다 억누르기 바쁘다. 그리고 ‘이해해야 한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요한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름으로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밀어붙인다. 물론 나는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망상에 빠져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아니라, 나를 묶어두는 또 다른 족쇄다. 나는 하느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나를 증명하려는 나 자신, 곧 왜곡된 양심과 여전히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은 우리 영혼의 집 전체를 질서 있게 하시기 위해 오신다. 우리의 정신을 미성숙, 소외, 두려움, 고집스러운 편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 영혼을 죄책감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시키신다... 하느님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나는 요즘 내 감정을 이해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한번은 누군가에게 너무 화가 나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난생 처음 욕을 해보았다. 웬걸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졌다. 또 누군가가 내 마음에 걸리는 행동을 할 때 그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오히려 상대에 대한 불편함이 해소되었다. 내 안에 쓸데없는 도덕적 완벽주의와 자기 검열, 그리고 관계에 대한 예민함이라는 족쇄, 이건 하느님이 아닌 내 안의 분열이 내는 소리다. 이 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때 나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화해한다. 이 순간 족쇄는 풀리고 바로 그때 하느님은 내 안에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신다. 은총은 내가 더 나은 존재로 살기 이전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은 무상으로 주어진 생명 안에서 내가 만든 족쇄를 스스로 풀어가며 살아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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