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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 종교의 경계를 넘다

[토마스 머튼-종교의경계를넘다] 2차 세계대전과 수도원 입회

by 북드라망 2025. 4. 22.

1부. 방황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1-3

 

2차 세계대전과 수도원 입회

 

이 경 아(감이당)

 

전쟁의 서막과 비전없는 삶
1938년, 유럽.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선발 자본주의와 후발 자본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반공산주의 벨트를 형성해 나갔다. 한편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인 이탈리아와 독일은 폭력을 바탕으로 더 완성된 형태의 자본주의를 만들고자 했고 급기야 파시스트 정권이 탄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뒤로는 자본가와 결탁하는 수법으로 독재정치를 했다. 또한 1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사실상 지불이 불가능한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는데. 히틀러는 경제적 대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경제적 파탄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린다. 그리고 군비 증가와 영토확장에 나선다. 결국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고 이후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선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손을 잡으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머튼은 이 소식을 미국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그해 늦여름 어느 무더운 저녁, 도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뉴스 때문에 갑자기 무서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 뉴스가 무엇인지 채 알기도 전에 덩달아 긴장을 느끼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서로 다른 차분한 음성들이 갑자기 불길한 목소리로 변하여 거리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한꺼번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일····히틀러···오늘 새벽 6시에 독일군이···나치스가···.”하는 소리로 모아졌다. (토머스 머튼, 『칠층산』, 445P)


 
도시를 휘감은 무서운 정적과 불길한 목소리. 머튼은 실존적 위기를 느꼈다. 유럽이 자신이 나고 자랐고, 방학마다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친근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즈음 머튼은 부모의 죽음 이후 믿고 의지했던 외조부모의 연이은 죽음으로 충격이 컸다.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위염까지 걸려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 불안했다. “도시는 마치 지옥문 하나가 반쯤 열려 그 불길이 솟아 나와 인간들을 말려 죽이려고 너울대는 것처렴 느껴졌다.”『(칠층산』, 445P) 머튼은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두려웠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친구와 방에서 깡통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시한 잡담으로 밤을 새고, 정치인들의 무능을 비난하는 것뿐. 어차피 자신은 징집 대상이고, 징집 명단에 올라와 있는 일개 번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점 고조되는 전쟁에 대한 증오와 위기감 속에서 머튼은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사실 마리탱의 영향으로 지성을 실천하고 욕망을 조절할 필요성을 느껴 미사에 나가기도 했다. 첫 미사의 감동은 뜨거웠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에게 온전히 봉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육체적 즐거움과 세상의 명예를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늘 마음이 불편한 채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걸 주저해 왔던 터다. 이런 차에 『제라드 멘리 홉킨스 전기』를 읽게 되는데. 성공회 신자이던 옥스포드 대학생인 홉킨스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어 추기경에게 편지를 쓰고,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머튼은 자신 안에서 “왜 아직도 주저하는 건가?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왜 벌떡 일어나서 행동하지 않는가?(『칠층산』, 449P)라는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내면의 소리였다. 그 순간 정신이 번뜩 났고 참을 수 없는 격정이 밀려왔다. 그는 그 길로 곧장 가서 그동안 목말랐던 영적인 삶에 대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다.

 



세례의 은총은 그를 고양시켰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술과 파티를 즐겼고 지성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적인 것에 관련된 독서를 많이 했기에 기독교 교리나 하느님에 대해선 밤을 새워가며 토론할 자신이 생겼다. 게다가 미사를 드리고 고해 성사를 거르지 않았기에 겉으로는 완전한 크리스찬이었다. 머튼의 모순을 지켜보던 유대인이자 영적인 친구 렉스가 참다 못해 머튼에게 비전에 대해 묻는다. 머튼은 갑작스런 질문 앞에 “모르겠는걸, 글쎄,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라 답하며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렉스는 “자네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야 해.”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야.”라는 충고를 한다. 성인이라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싶으면서도 성인처럼 오롯이 자신을 봉헌하고 싶지 않았던 머튼. 렉스의 충고로 머튼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1939년, 여름 별장. 머튼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진단한다. “입심은 가장 센 반면, 선악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실천에 옮기는 경우가 닥치면 분별을 가장 잘 못하고.. 영화나 자동 도박기에 매달리거나 맥주를 마시자고 우겨대는 데는 늘 첫째였다.”(칠층산 500p) 그는 랙스의 질문으로 혼란스러웠지만 큰 죄만 아니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여겨왔기에 마을에 온 내기 도박단을 지나칠 수 없었다. 25센트 동전 하나로 시작해서 갈수록 돈을 배로 걸고 상금도 배가 되는 내기를 했다. 결국 2분 만에 돈을 다 털렸다. 만회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업주에게 솔깃해 돈을 더 가져왔고 또 잃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업주에게 속은 분풀이를 하고 싶어졌다. 술집에 가서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해가며 아가씨들을 꼬시고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다 머튼의 거짓말을 눈치챈 동네 깡패들과 시비가 일어 주먹 다툼까지 갈 뻔했다. 속고 속이고, 자신의 잘못을 보기 싫어 남의 잘못을 과장하고, 분노를 옮기고… 시작은 큰 죄가 아니었지만 결국 폭력으로 이어졌다.

착잡한 마음으로 뉴욕에 돌아와 들은 첫 소식. 독일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머튼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영혼으로 만들어 낸 그림이 바로 세계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일반 대중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성과 의지를 죄와 지옥 그 자체한테 강간당하는 치욕을 불러들인 장본인은 바로 우리였다. [….]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 히틀러만이 이 전쟁을 일으킨 유일한 인물이 아니다. 나도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칠층산』 514p~515p)


 
여기서 느껴지는 건 그의 통렬한 후회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도박의 짜릿함과 담배 연기와 술에 취하고 싶었다. 자신의 화를 풀려고 다른 희생양을 찾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큰 죄가 아니라 괜찮다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작은 폭력이라도 폭력은 폭력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니 전쟁은 자신이 일조한 폭력의 확장이었다. 히틀러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각자의 욕망과 폭력이 모여 전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몰려왔다. 그동안 자부해 온 자신의 지성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패배였다. 하느님이 인류를 벌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인류는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전쟁이라는 강간을 당한 것이다. 머튼은 전쟁의 원인을 자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원인을 알게 되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보였다.

회심의 순간이었다.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고 누려온 동전 하나, 이름마저도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욕망을 조절하고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력한 비전은 세례받은 지 2년도 안 된 청년 머튼을 촉발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신청서를 낸다. 하지만 문란했던 과거의 사생활로 인해 입회가 거부되고 만다. 머튼은 좌절했지만,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그는 세속에서 수도자처럼 살기위한 길을 찾는다. 프란치스코회 소속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수도원에서처럼 시간에 맞춰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며 살기로 했다. 생활 태도도 바꾼다. 대학 기숙사에서 수도자들과 함께 지내고 술 마신 날을 기록하고 담배를 끊기 위해 개수를 줄였다. 가르치고, 글 쓰고, 때로는 할렘에 가서 흑인들과 함께했다. 그는 이미 수도자처럼 살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물었다. 대학이 주는 안락함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마침내 트라피스트 침묵 수도원으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또 거절될까 겁이났다. 고민 끝에 눈을 감고 성경을 펼쳐 나오는 구절로 마음을 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가복음 1장, 20절)라는 구절이 나왔다. 벙어리가 된다니! 그 구절은 그가 마음에 두고 있고 얼마 전 피정도 다녀온 트라피스트 침묵 수도회 즉 겟세마네 수도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결정할 순 없지 않은가. 이번에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자신의 길을 알려달라고 기도하며 매달린다. 그 순간 갑자기 앞산에서 겟세마네 종소리가 들려왔다. 환상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겟세마네에서 끝 기도에 울리는 종소리였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머튼은 겟세마네 수도원에 입회를 신청했다. 청빈과 활동을 중시하는 프란체스코회와는 달리 겟세마네는 통회(깊이 뉘우침)를 중시했기에 머튼의 과거 사생활을 문제 삼지 않았다. 머튼은 겟세마네 입회 허가서와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재검 통지서를 동시에 받는다. 그는 겟세마네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기에 신체검사에 응할 필요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입회 허가를 받은 지 1주일 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습 3일 후, 1941년 12월 10일, 머튼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방 하나만 들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겟세마네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겟세마네 수도원은 6세기 초 성 베네딕토가 설립한 수도회의 한 분파다. 시토수도회의 규칙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서 따르기에 ‘엄률의 시토회’ 또는 트라피스트라고 불린다. 겟세마네는 신학적 논쟁보다는 몸과 마음의 정화를 통해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봉쇄 수도원이다.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미사나 고해 성사, 면담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침묵을 유지한다. 그들이 침묵을 유지하는 이유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적 소리를 침묵시키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이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수화다. 수화가 불편할 수는 있지만 다양한 경력의 사람들이 공동주거와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수화는 갈등을 줄여줄 것 같다.

이들의 일과는 새벽 2시에 기상, 2시 30분부터 개인기도, 독서기도, 아침기도를 하고 새벽 4시에 마친다. 개인 묵상과 기도를 하고 5시 30분에 경당에 모여 성무일도를 바친다. 이어서 수도원장 강론을 듣고, 침대를 정리하고, 아침 식사로 커피 한 잔과 빵 두 개를 먹는다. 식사 후 한 시간 독서, 아침 7시 45분 미사 후 2시간 노동, 양심 성찰 수행을 하고 점심으로 감자와 빵과 수프와 채소를 먹는다. 약간 휴식 후 2시간 노동, 4시 30분 저녁기도, 간단한 저녁 식사, 7시 끝 기도로 하루를 마친다. 식사는 기본적으로 채식이다. 자신의 이름마저도 버리고 새벽 2시부터 오로지 기도와 묵상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일과. 마침내, 토머스 머튼의 54년 인생의 절반인 27년간의 수도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열정과 유머, 다재다능하고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머튼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긴 여정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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