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슬픔은 우리가 맺어온 연결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상실의 슬픔이 파도처럼 우리를 덮칠 때, ‘알 수 없음’이 우리를 장악한다고 말한다. (......) ‘너’를 상실함으로써 내가 무언가에 압도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감각이다. 이것은 나 자신을 벗어나는 감각,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박탈의 감각이기도 하다. ‘너’를 상실하게 되면서 사실은 내 존재가 ‘너’ 덕분에 가능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알 수 없음’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나를 구성하는 것이 너와의 유대관계였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슬픔은 몸에 대한 버틀러의 사유를 확장한다.”(이선현, 「주디스 버틀러, 몸 그리고 수행성」,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216~217쪽)
12년 전 그때부터 4월은 우리 사회가 함께 슬픔을 느끼는 달이 되었다. 소중한 존재의 상실이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던 4월의 슬픔 같은 상실이 우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몇 번이나 있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상실은 남겨진 사람들을 ‘알 수 없음’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그 상실이 개인의 슬픔을 넘어서는 것일 때, 그것은 한 사람, 한 집단의 부재를 넘어, 우리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혹은 돌보지 못했는지를 드러낸다. 어떤 상실은 그래서 애도를 넘어 관계를 되묻게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존재 여야 했는지를 뒤늦게 묻게 만든다.
이 물음이 담긴 슬픔에는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와 더불어 우리 연결의 취약함도 담겨 있다. ‘너’를 잃고서야 “‘나’를 구성하는 것이 너와의 유대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슬픔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가 어떤 사회였는지를, 어떤 관계 위에 서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끝내거나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이 열어 놓은 질문을 지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관계는 그때로부터 조금 나아져 왔는가.
우리는 여전히 4월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슬픔이 남긴 ‘알 수 없음’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다시 물어야 하는 시간 속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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