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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종교’란 무엇인가?

by 북드라망 2025. 12. 4.

‘종교’란 무엇인가?

지산씨(사이재)


 비대한 종교, 범람하는 신경증
대한민국에는 교회도 많고 사찰도 많다. 그리고 교회도 사찰도 모두 거대하다. 교회와 사찰은 종파나 외양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차이라면 교회는 도심을 점령하고, 사찰은 산을 점령하고 있다는 정도. 모든 곳이 그렇기야 하겠냐만 교회와 사찰 공히 신도의 숫자와 돈줄로 종파의 위세를 가늠하는 작금의 세태는 종교에 대한 신뢰를 더더욱 희박하게 만든다.

대선의 표를 구하기 위해 주술에 매달리는 동시에 구약을 다 외운다는 신공으로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는 등 종교 대통합을 몸소 보여주시는 정치인 부부. 주술과 이단과 손잡을지언정 이권을 해치는 이들에겐 신념을 명분 삼아 절대적 혐오를 뿜어내는 광장의 목사님들! 사람들은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고,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교회로 사찰로 모여들 뿐이다.

기괴하다!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종교단체는 날로 번창하는 중이다. 물질적 풍요와 돈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 딱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 종교는 대통합을 이루며 노골적으로 세속화되고 거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신이 사라지고, 사찰에서는 붓다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어처구니없게도 교회와 사찰이 외적으로 비대해지는 것과 비례하여 우리들의 신경증 또한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와 사찰의 팽창이 정신 건강의 지표가 아니라 신경증 범람의 지표가 되는 이 웃픈^^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회와 사찰은 더 이상 지혜와 내적 성찰의 공간이 아니며, 인간의 정신을 정화하는 성소도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신의 이름을 빌린 비즈니스! 자본과 정보와 미신의 기묘한 융합 위에서 극도의 이권 개입, 불로장생, 모로 가도 성공을 부추길 뿐이다. 주술과 종교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경쟁과 갈등과 돈의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종교! 그리하여 사람들은 교회에서 신경정신과로, 신경정신과에서 사찰을 전전하며 불행과 분노, 외로움과 공허라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카를 융은 20세기 신경증의 범람은 합리적 이성의 발달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영혼을 무시한 때문이요, 영혼의 위험을 완화할 도그마[교리]와 의례를 지워버린 기독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과학과 기술은 거창하게 발전하였으나 지혜와 내적 성찰의 끔찍할 정도의 결핍 … 종교적 가르침이 불멸의 영혼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은 현실의 인간 정신에 대해서는 별로 따뜻한 말을 할 줄 모르기”(C.G.융, 『인간의 상과 신의 상』, 31쪽, 솔, 2008)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융의 시대에는 교회가 앞장서서 인간의 내적 성찰을 말살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 심리를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는 메커니즘과 기능을 잃었을 따름이다. 교회가 그 기능을 상실하자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 심리를 해소할 장소와 방법이 없어 병원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종교는 내적 성찰은커녕 앞장서서 욕망을 타오르게 하고 증오를 키우니 병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지만 누구나 인정하듯 병원이 최종 심급이 될 수 없다는 건 명약관화하다. 역량을 갖춘 의사가 최선을 다해 치료해도 환자의 마음 변화를 전적으로 이끌어 낼 수는 없다.

예전의 종교는 세속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치우친’ 정신을 잡아주었다. 세속 속의 ‘성소’였던 종교는 인간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고, 외롭고 닫혀있는 인간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병원이나 의사는 종교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신성 또는 영성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종교, 누미노즘의 경험
많은 사람들이 요가나 명상을 하고, 종교의 근본정신을 지키는 공동체를 찾아가 ‘숭고한’ 마음의 장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종교를 경험할 수 없지만, 종교적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모색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마음의 방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삶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다른 삶의 영역이 있음을 사람들은 다 안다. 만약 모른다면 우리들은 어떤 아픔을 겪게 된다. 병을 앓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마음을 쓰라고,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라는 신호이다. 신경증은 삶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생활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몸이 아프듯, 정신도 아픈 것이다. 융에 의하면 신경증은 의식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무의식이 영혼의 위험과 영혼의 상실을 경고하며 의식을 침범하여 생겨난 것이다.

융은 매우 종교적이다. 융에게 종교religion란 ‘렐리게레religere’라는 라틴어가 말해주듯, 누미노줌(신적인 것, 신성한 힘)이라고 부른 것, 즉 어떤 역동적인 존재나 작용에 대한 주의깊고 성실한 관찰이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힘, 정령, 귀령, 제신(諸神), 법, 이념, 이상 또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인간이 그의 세계에서 강력하며 위험하거나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경험하여 그들에게 주의 깊은 고려를 하도록 한 것들, 혹은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경건하게 숭배하거나 사랑하게 되는 그런 요소들이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18-19쪽)

종교라는 표현은 누미노줌의 경험을 통하여 변화된 의식의 특수한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융의 종교 개념은 신앙심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면, 신앙을 갖지 않아도 과학자는 자기 일에 종교적으로 헌신한다. 과학 탐구에 압도되어 경건하게 숭배하는 특수한 태도를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멀지 않은 과거에는 고도로 개화된 사람들조차 누미노줌의 존재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마술사, 마녀, 귀령, 데몬과 천사, 심지어 신과 같은 정신적 중계자들이 우리의 오성과 기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만약 이때에 신경증을 겪었다면 자신이 주술에 걸렸다든가, 무엇에 빙의되었다고 상상할 것이다.

합리와 이성을 외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늘에 있던 누미노줌이 인간의 심혼으로 가라앉게 된다. 교회에서 사라진 종교는 심혼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개신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평결했지만, 현대인들의 정신을 구원할 최후의 희망은 심혼에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종교적 경험은 교회 바깥,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신경증은 부끄러워하고 자책해야 할 병이 아니라, 신성을 찾아가는 발단이자 구원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 혹은 신은 융이 무의식이라 일컬었던 것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융에게 있어 인류는 종교 없이 지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종교는 인간에 의한 조작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겪는 것이다. 융은 종교를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인간심리에 있어서 종교는 현상학이자 경험론이다. 종교적 인류를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어떤 요소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인간의 심리학이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21쪽)

그러므로 교회 밖의 종교적 경험은 주관적이며 끝없는 오류를 범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개인들의 종교적 경험은 도그마와 의례로 제도화되지도 않았고 객관적으로 승인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혼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부는 바람이다. 판단의 출발점을 삼을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어디에도 없다. 정신은 그것의 발현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심리학의 대상이며, 불행히도 그 주체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79쪽) 종교의 혼은 자율적이고, 자동적이고, 주관적이다.

현대인에게 종교는 개인들이 심리적으로 겪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도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경험이 인생을 보다 건강하게, 보다 아름답게, 보다 온전하게, 보다 의미있게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형성해 가도록 돕는다면 사람들은 여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였다고.(『인간의 상과 신의 상』, 158-159쪽)

개인들이 겪는 무의식의 종교적 현상을 실재하지 않는 것, 환상적인 것, 저절로 일어나는 망상 같은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실재이자 사실인 것으로 심사숙고해야 한다. 종교적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삶을 재통합하고 재편성할 수 있어야 한다. 꿈, 공상, 명상 중의 환상 등 확정되지 않은 것과 확정할 수 없는 것에 정신을 내맡기는 모험을 한다면 세계와 인류에게 광명을 가져다 줄 보배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 종교적 경험에 대해 뭐라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진리보다 더 나은 궁극적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4위 일체성, 신격의 현시
융이 문제 삼는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문제나 종교의 보편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융이 알고자 한 건 각 개인에게 ‘일어나는’ 종교적 경험이요, 그 경험이 가리키는 ‘삶의 향방’이었다. 개인들에게 ‘종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중요했다.

융은 한 신경증 환자의 꿈을 분석했다. 그 환자는 뛰어난 지능을 가진 과학자로 신경증이 너무 심해져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도덕성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고 느꼈기 때문에 융에게 도움을 구했다. 융은 환자가 꾼 400개의 꿈 가운데 특이한 종교적 관심의 주제들을 포함하는 47개의 꿈을 선택하여 공표했다. 이 47개의 꿈은 무의식의 종교적 경향의 정보원이었다.

환자의 꿈은 ‘도망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성과 지성만을 맹신하는 환자의 태도는 종교적인 인간을 돌아보라는 무의식의 발현을 불러왔다. 영적 재탄생과 갱신을 촉구하는 무의식의 경고! 그러나 환자는 꿈속에서도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꿈에서 포도주와 장미로 치장된 교회가 나타나는데, 이는 영과 육, 혹은 성과 속의 날카로운 대립에 대해 ‘적당히 타협’ 하려는 환자의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종교적 마음을 관찰,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의 적당한 교제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다.

도덕적 갈등을 적당히 둔화시키면서 도망치고자 하는 환자의 심리는 꿈에 등장한 미지의 여성에게 지적당하고 있었다. 융은 꿈속의 여성을 현실의 그와는 반대되는 성향의 ‘아니마’라 분석했다. 아니마는 남성성의 대극으로서의 여성성이다. 아니마로 인격화된 무의식의 목소리는 그의 회피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이제 아무 방도가 없네요’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영혼의 피폐를 호소하는 무의식의 목소리, 그리고 그 자연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괴로워하는 환자의 심리가 신경증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환자는 개인이지만 동시에 근대인이었다. 융은 근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초고층 마천루의 하부 깊숙한 층계들 속에 인간의 전체 과거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고 말한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58쪽) 그 전체 과거는 무의식 속에 살고 있는 비개인적인 세력으로 그것이 튀어나왔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도망치려 한다. 그것은, 손이 닿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파괴할 수 있는 화산과 같다. 그것의 폭발력은 아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28-29쪽)

환자는 무의식의 목소리가 자신을 덮쳤을 때 삶의 지축이 흔들릴 것을 알았던 것이다. 초고층 마천루를 무너뜨리는 일에 갈등할 즈음 깊은 인상을 주는 꿈을 꾸는데, 환자는 이 꿈을 분석하면서 치유가 된다. 4위 일체를 상징하는 꿈을 꾼 것이다. 꿈에서 그는 장중한 ‘정신 집중의 집’에 들어선다. 그 집의 배경에는 많은 촛불이 있고, 촛불은 위로 뾰족한 ‘네 개의 끝’을 가진 특수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노인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이 집으로 들어간다.

이때 어떤 목소리가 말한다. “네가 하는 일은 위험하다. 종교는 여성의 상을 피할 수 있기 위해 네가 지불해야 하는 세금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성의 상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도다. 종교를 심혼의 삶의 다른 측면을 위한 대치물로 사용하는 자들이여, 그들은 잘못되었으며 저주받게 될 것이다. 종교는 대치물이 아니다. 그것은 심혼의 또 다른 활동을 마지막으로 완성할 때 부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삶의 충만함에서 너는 너의 종교를 태어나게 해야 한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59쪽)

꿈속의 목소리는 매우 지성적이고 목적적이다. 환자의 삶이 충만하려면, 종교를 대치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진정 종교적인 자세를 삶에 통합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위협받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와 지식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

이 꿈에 나타난 ‘불’은 ‘생명’을 상징하며, ‘삶의 충만함’이 종교의 오직 하나의 타당한 원천임을 강조하는 상징이다. ‘네 개의 끝’은 ‘4위 일체성’을 상징한다. 기독교 신격의 중심적 상징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일체성이라면, 무의식에서의 신격의 상징은 사위 일체성으로 나타난다. 사위 일체는 삼위 일체에 하나를 더한 것으로, 그 하나는 여성, 대지, 어둠, 악[악마]을 상징한다. 환자의 정신은 3+1의 신격으로 환자의 종교를 태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격 상징으로는 환자를 치유할 수 없다. 아니 존재 변이는 불가능하다. 현대인은 자신의 신을 선택해야 하고, 자신에게 맞는 신화를 다시 써야 한다.


전체성의 회복, 그대 자신과 화해하라
무의식은 대립적인 것의 통합을 위해 작동한다. 기독교에서 밀어낸 악, 여성, 대지까지 포함해야 명실상부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과 육, 이성과 감정,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선과 악의 통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환자는 결혼, 사랑, 헌신, 충실, 신뢰, 감정적 의존성, 심혼의 전체성 요구에 굴복하는 일에 휘말리게 될까 두려워했다. 내 안의 신격, 내 안의 신성을 상징하는 4위 일체성은 전체성의 회복, 대극의 통합을 요청하는 것이다. 신은 전체성이자 통합이다.

융은 신경증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교육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각난 인격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진정한 소유물 대신에 수많은 대처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물질, 합리, 지식, 스펙, 계산, 보이고 잡히는 것을 향한 무서운 탐욕과 질주를 잠시 잠깐 둔화시키는 정도의 적당한 금욕과 적당한 쾌락, 적당한 점잖음과 적당한 농담, 적당한 비판력과 적당한 친절을 이용할 뿐이다.

융은 다시금 강조한다. 이런 태도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을 가져왔다고. 그리고 뒤이어 지상천국을 어떻게 세울 것이냐는 유치한 이론들을 위해서 서로의 목을 자르는 파시즘을 도래하게 한 것이라고. 좋음의 노예로도, 나쁨의 노예로도 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악마성, 파괴력을 모른 채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걸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화산 위에 살고 있다. 그 파괴력을 직시하고 이해하면서 매 순간 윤리적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한 순간에 폭발해버린다.

하늘은 땅의 결핍이 아니듯, 땅은 하늘의 결핍이 아니다. 빛이 어둠의 결핍이 아니듯, 어둠은 빛의 결핍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의 결핍이 아니듯, 여성은 남성의 결핍이 아니다. 선은 악이 아닌 것이고, 악은 선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하늘은 땅이 있어야 성립하고, 빛은 어둠이 있어야 성립하고, 남성은 여성이 있어야 성립하고, 선은 악이 있어야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신은 악마가 있어야 성립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양극단 모두 나를 구성하는 것이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전체성과 통합은 진흙 속에 피는 연꽃이요, 중생심에서 깨달은 부처처럼 고통과 번뇌,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한가운데서 그것의 원인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극단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대화할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무의식의 종교요, 신성이다. 무균, 무악의 상태에서는 신도 살 수 없고 인간도 살 수 없다. 육체이기도 하고, 어둠이기도 한 대지, 즉 여성을 통합해야 신이 된다. 그리하여 여성은 모든 죄인을 대신 청원하는 자비의 상징이다. 고통과 어리석음과 악의 실상이 내 안에 있음을 알아야 나날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화해와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삶은 충만해진다.

종교는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요,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신성의 전체성으로 향하는 길이요, 윤리적 결단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성을 내는 자는 심판받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자는 중앙법정 시네드리움에 넘겨질 것이다. 이제 그대가 그대의 예물을 제단에 바치려 할 때 바로 거기서 무언가 그대 자신에게 거슬리는 마음이 생각나거든 그대의 예물을 바로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그대 자신과 화해하라. 그 뒤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그대가 그대와 함께 가고 있는 동안에 그대 자신과 더불어 제때에 화해하라. 행여 그대가 그대 자신을 재판관에게 넘기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도록.”(마태복음 5장 22절)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복되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는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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