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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신(神)’을 인식한 자, 욥

by 북드라망 2026. 2. 11.

‘신(神)’을 인식한 자, 욥

서 윤 (사이재)

 

종교적 진술은 결국에는 무의식적, 즉 초월적 과정에 뿌리를 둔 심혼의 표명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中


욥은 사탄의 손을 빌려 자신의 인생 전체를 참혹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야훼에게 묻는다. “당신은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를 소스라치게 하시고 메마른 지푸라기를 뒤좇으시렵니까?” 욥은 전지전능한 야훼가 메마른 지푸라기처럼 미약한 존재를 도대체 왜 학대하는지 영문을 몰라서 정의를 간절히 청하며 괴로워한다.

구약의 시가서와 지혜서 항목에 있는 「욥기」는 동방의 낯선 땅에 사는 부유하고 고결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가축을 빼앗겼고 종과 자식은 살해당했으며 욥은 병에 걸려 죽을 지경인데, 아내와 선량한 친구들은 틀린 말로 속을 긁으며 마음의 평안마저 앗아갔다. 이 비극적 사건의 배후가 바로 야훼다. 쓰인 연대는 불확실한데 대략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솔로몬의 「잠언집」과 멀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신은 정의롭고 사랑 그 자체라고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은 「욥기」에 드러난 야훼의 어둠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을까? 신의 어둠은 그들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까?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융은 ‘신적인 드라마의 긴 발전도상에 있었던 획기적 사건’이라고 「욥기」를 규정한다. 요컨대 야훼가 욥에게 도덕적으로 패배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인간이 되어 스스로 희생할 수밖에 없는 ‘신적인 드라마’의 징후라고 본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신의 불의에 대해 모른 척하거나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전지전능한 신이 하찮은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패배했다고? 우선 상식선의 신 관념을 지우고 융의 철학에서 다루는 ‘신神’ 개념을 거듭 확인하고 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서라는 종교적 진술의 해석 또한 인간 심혼의 삶을 깊게 통찰하고 대변했던 의사 융의 관점임을 잊지 말자.

 

 


욥의 야훼이며 융의 무의식인 ‘신(神)’
융은 「욥기」라는 사건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신성한 대상에 관해 해석하는 걸 오랫동안 망설였다. 신의 아들인 예수에 관한 논쟁의 근거가, 물질적 사실로 증명될 때만 진실이라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적Physisch’인 것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즉 심적心的 진리도 있고, 이는 육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거나 부인될 수도 없는 것이다. (…) 종교적 진술도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그것은 모두 예외 없이 육체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대상에 관계한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C.G.융, 융 저작 번역 위원회, 솔, 2008, 299쪽)


아인슈타인이 어느 글에선가 자신이 믿는 신은 야훼도 아니고 주피터도 아니고 제우스도 아니고 스피노자의 신이라고 했다던데, 나도 융이 언급하는 ‘심적(心的) 진리’로서의 신을 스피노자의 신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곧 자연이다. 산이나 강 등 Nature로서의 자연물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라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생겨나서 일정 기간 꼴을 유지하다가, 변수에 맞닥뜨리면 변형되기도 하고, 끝내는 소멸하는 모든 것은 자연 즉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로서의 성서도 자연이고, 마음이나 정신 그리고 관념도 자연이며, 인간 또한 이 자연법칙 안에서 드러나는 신의 형상이다. 그러니까 신은 자신을 물질적인 것으로도 심리적인 것으로도 드러내 보인다는 말이 성립된다.


이로써 진리의 기준이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적인 것에도 있다는 융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논박될 수도 없고 어떠한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편적인 믿음의 심적 사실도 있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그리스도나 부처의 의미와 정신은 증명 없이도 현존하고 인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융 자신이 ‘신(神)’을 언급할 때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수많은 변환을 겪은 어떤 상像 또는 언어 개념’(같은 책, 299쪽)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의사이자 학자인 융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는데, ‘마나(=신성력)’ ‘데몬’ 그리고 ‘신’이 무의식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사용한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의 이점은 그것들이 대상을 보다 잘 객관화하고 인격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개념들은 정서적인 특성으로 인해 생명력과 활동력을 부여받는다. 증오와 사랑, 공포와 숭배는 대립의 무대로 들어서며 그 개념들을 고도로 극화시킨다. 그럼으로써 단지 ‘제시되었던 것’이 ‘활동하게 되는 것’으로 바뀐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C.G.융,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592쪽)


융이 데몬이나 마나(Mana) 같은 신화적 용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유는, 자연법칙 밖의 어떤 존재를 상상하거나 초월적으로 신격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의 생명력과 활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식물이나 돌에서도 생명력은 느낄 수 있지만, 무의식이 지닌 자율성이나 정서적인 경향성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가령 분노와 질투가 자신을 삼켰고 자신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시인했던 야훼 즉 무의식의 상(像)이, 무지개의 형상으로 드러났다고 해보자. 물론 신은 무지개로도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무지개로 증오와 사랑, 공포와 숭배라는 정서적인 특성을 역동적으로 극화(劇化)하기는 어렵다. 신이 드러내 보이는 대극적 힘의 경향성 말이다. 욥이 고통 받았던 까닭이나 야훼 또한 자신의 감정적 과격함 때문에 괴롭다고 시인했던 이유를, 우린 그 모순적 힘이 공존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욥의 신 인식(神認識)과 융의 철저한 자기인식
사탄을 이용해 욥을 학대한 야훼에게는 자애로움과 잔혹함이 공존하고, 창조력과 파괴 의지가 나란히 있었으며, 통찰은 무분별과 뒤섞여 있었다. 현대의 우리가 이런 존재와 마주했다면 ‘비도덕적(amoralisch)’이고 자신을 성찰하는 의식이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야훼는 인간이 아니라 현상이며 신이다. 하여 신의 행위가 도덕적이지 않은 데서 오는 충격은 비난 대신 두려움과 함께 공포라는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소불위의 신이 아무 이유 없이 내 세계를 파탄 낸 폭력을 내적 상흔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사람들은 온갖 지식을 동원해 현상을 왜곡해서 해석하거나 감정적인 도피를 꾀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융은 충격에서 벗어나기보다는 그 정감이 인간 안으로 뚫고 들어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욥기」라는 사건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욥이 강렬하게 신의 무자비함을 체험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폭력의 맹목성과 욥이 느끼는 정감의 맹목성을 인식으로 변환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서 동시에 구원자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야훼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박해자이며 구원자 모두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측면은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야훼는 분열된 것이 아니고, 이율배반이며 완전한 내면의 대극성이며, 그의 엄청난 역동성, 그의 전지전능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제조건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309쪽)


야훼의 이율배반이 전지전능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흠 없고 올바르며 악을 멀리하는 욥에게 유일한 죄를 묻는다면, 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여긴 것과 신의 정의에 호소할 수 있다고 믿은 낙관주의일 것이다. 과거에 욥은 순진하게도 신에게서 호의적인 지배자나 정의로운 재판관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희생양인 욥은 야훼의 맹목적인 폭력이 자신의 죄 탓이 아니라, 의심 많은 야훼의 경향성을 욥 자신에게 투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통 속에서 불현듯 인식했다. ‘욥은 신의 내면에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그의 인식의 빛 자체가 신적인 누미노제를 획득하기에 이른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319쪽)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다 가능성으로서는 진실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582쪽)

야훼라는 무의식의 ‘신성한 원형numinosen Archetypen’과 욥 사이의 사건을 통해 융이 강조하고 싶은 건, 철저한 자기인식에 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통해 힘을 드러내는 무의식은, 지극히 선하기도 하고 참아주기 힘들만큼 파렴치하기도 하다. 이를 정확히 인지하는 게 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이라고 융은 주장한다.


욥은 눈을 내리깔고 손을 입에 갖다 댄 채 무의식적인 신보다 자신이 약간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걸 신중하게 숨겼다. 또한 무의식은 비판적 사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 42:3~6) 두려워해야 할 힘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한 통찰이고, 존재를 뒤흔드는 진동에 대처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욥이 고통의 저 밑바닥에서 ‘신적인 누미노제’를 획득했다는 건, 신의 대극성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로써 욥은 야훼를 향한 편향된 경외감과 무자비한 힘의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무력한 맹목성에서 벗어났다. 요컨대 어리석고 무지해서 사색이 된 게 아니라, 공포가 지혜를 조롱할 수 없도록 진중하게 대처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났다.


「욥기」에 드러난 심혼(Seele)의 진술은, 신(=무의식)이 욥의 심혼을 통해 무언가를 계시했다고 융은 해석한다. 욥이 겪은 비극 이후에 신이 동정녀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기 전까지 애녹이나 요나에게 이어진 예언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자연(=신)은 스승이고 심혼은 그 제자라고 했던 신학자 테르툴리안(Tertullian, 155~240년경)에 의하면, 심혼의 권위는 자연의 존엄에서 유래한다. 알다시피 의식의 진술은 기만과 거짓이기 일쑤지만, 심혼의 진술은 항상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초월해 진실을 보도록 한다. 다만 누구나 숙명처럼 신의 ‘부름’을 받는 건 아닌 것 같다.

 


예언자의 역량, 그리고 시대를 예언한 융
서두에 밝힌 것처럼 「욥기」는 도래할 예수 사건에 대한 어떤 징후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비극적 사건을 통해 계기가 마련된 셈인데, 그렇다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신의 말씀을 감각했던 예언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에게는 어떤 독특함이 있었던 걸까? 예언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비(נָבִיא)’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한다. 아마도 시의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신학 정치론』에 따르면 기원전의 예언자들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측은지심의 본성이 혼탁해지지 않은 자들이었다. 또한 계시를 적절히 표상하고 상징적인 그 의미를 이야기로 전할 줄 아는 역량과 함께 ‘부름’에 충실히 복종했던 이들이 바로 예언자였다. 이런 존재들의 심혼을 통해 신은 자신을 드러냈다.

그대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느껴라. 그것에 관해서 심혼이 미래를 시사하는 사건에서는 그대의 예언자이며, 전조(前兆)에서는 그대의 해석자이며, 결과에서는 그대의 수호자임을 생각하라. 신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인간에게 미래를 예언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로부터 그에게 부여된 그, 즉 신을 인식한다면 더욱더 경이롭다. (테르툴리안, 『영혼의 증명에 관하여』 中)


의사이자 신학자이며 또한 점성가였던 테르툴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심혼의 증언을 간청했다. 융이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라는 개념으로 인격화했던 느낌이나 감정을 달리 표현하면 심혼(心魂, Seele)이라 할 수 있다. 짐작건대 「욥기」에 기록된 종교적 진술은 심혼의 증언이며,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어떤 징후로서의 「욥기」는 경이로운 예언이고 해석이며 인간의 수호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의 존엄에 의해 부여된 심혼의 증언이 신의 육화를 예언했고, 우린 그렇게 이천여 년 동안 점성학에서 종교의 시대라고 예언했던 물고기자리(Pisces) 시대를 지나왔다. 알다시피 물고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들의 앞 글자가 I, Ch, Th, U, S인데, 이들을 합하면 그리스어 익투스(ΙΧΘΥΣ, ICHTHUS) 즉 물고기가 된다. 신이면서 동시에 신의 아들인 예수가, 욥이 당했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고스란히 체험하며 신의 불의와 무의식성을 보상한다. 야훼는 ‘도덕적이기에는 너무 무의식적이었다. 도덕성은 의식을 전제로 한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313쪽) 앞서 언급한 신적인 드라마는, 너무나 무의식적이었던 야훼가 의식화된 존재만이 배울 수 있는 도덕을 인간의 몸으로 인식하게 되는 서사로 구성된다. 요컨대 자애로움과 잔혹함이, 창조력과 파괴 의지가, 통찰과 무분별이라는 대극적 힘이, 십자가 위에서 드디어 합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융은 기독교 교리가 점성학이나 수많은 종교적 진술이 예언하는 온갖 징후를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던 그리스도와 잔혹하고 무분별한 적그리스도는, 쌍어궁 시대를 지배하며 대립하는 두 힘이었다. 그런데 근대적이고 기독교적인 교리 방식이, 자애와 사랑의 神만을 칭송하고 잔혹하고 무자비한 神의 힘을 억압함으로써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재앙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이율배반이 바로 신의 전지전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진단한 것이다. 융은 이렇듯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징후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가올 시대를 예언했다.


개성화(Individuatio), 그 예언을 사유하라!
사실 어느 시대든 어떤 존재든 대립적인 힘은 빛과 어둠처럼 공존한다. 점성학의 물고기자리 시대가 물과 흙, 정신과 물질이라는 대립적인 힘의 지배를 받았다면, 이미 도래한 물병자리(Aquarius) 시대는 공기와 불, 파동 에너지와 개성으로 상징되는 힘이 지배한다. 향후 2천여 년 동안 우린 이 대립적인 힘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한다. 대립과 모순은 시대에 탄력을 줄 수도 있고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융은 성서에 기록된 예언과 점성학적인 이 징후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심혼의 증언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는 걸 이젠 이해한다.

물병자리 시대는 디지털⸱과학 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지면서 파동 에너지가 모든 벽을 통과해 만물에 영향을 미치듯, 편견과 차별이 없는 보편적 분배의 가치를 사유한다. 동시에 자칫 에고(Ego)적 중심을 지향하는 개인주의가 팽배해질 가능성도 공존하는 시대다. 이는 황도대의 춘분점이 물병자리(Aquarius)를 통과할 때 반대편 추분점이 사자자리(Leo)를 통과하기 때문에 나오는 해석이다.

나는 인간의 의미와 신화에 관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 모습의 아쿠아리스(물병자리) 시대를 앞두고 현재 물고기시대 말기에 언급할 수 있고 아마도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을 내가 말했다고 확신한다. 물병자리는 두 개의 대립적인 물고기(일종의 대극융합) 뒤를 따르면서 ‘자기Self’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596쪽)


융은 대립의 시대를 성찰한 판단력을, 철저한 자기인식이자 인격의 발달이라고 명명했던 게 아닐까? ‘자기Self’를 의식화하는 ‘개성화’라는 철학적 개념이 시대의 예언이자 해석으로, 나아가 우리를 수호하는 힘으로 작동하기를 융은 간절히 바랐던 게 아닐까? 물병자리 시대를 지나 앞으로 2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출현하는 시대에 대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융은 솔직하게 밝혔다. 재량껏 다룰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나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적 산물과 같은 경험 자료도 없다고 했다. 아마 심혼의 증언에 충실히 복종하고 사유하는 어떤 존재를 통해 새로운 예언은 다시 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과학은 별과 함께 시작했다. 인류는 그 속에서 무의식의 지배자인 이른바 신들과 함께 황도대의 별자리들이 갖는 독특한 심리적 기질을 보았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인간의 천성과 그대로 상응하는 별들의 법칙이었다. 『심리학과 연금술』 中


고백하자면, 융의 ‘개성화’라는 예언이 물고기자리(Pisces) 시대가 아닌 물병자리(Aquarius) 시대의 징후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이해했다. 보편의 가치에 공명하려는 힘에 저항하고 극(剋)하는 Ego적 주체가, 철저한 자기인식과 더불어 ‘개성화’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그 예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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