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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빵과 포도주는 기적을 부를까?

by 북드라망 2026. 1. 8.

빵과 포도주는 기적을 부를까?

정기재 (사이재)  

 

"인간의 제의적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응답이며 반응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p270)


여러 가지 이유로 영화 ‘K-팝 데몬헌터스(케데헌)’을 세 번이나 보게 되었다. 볼 때마다 다른 재미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인 걸그룹의 정체성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무당으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졌고, 지금은 아이돌이 되어 무대 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노래와 춤은 현대적으로 변주된 무속의례 같았다.

이러한 설정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음주가무의 뿌리는 본래 제천행사였고, 축제와 페스티벌도 오래된 종교적 장치다. 오늘날의 콘서트 역시 맥락은 비슷하다. 수만 명이 같은 리듬에 몸을 맡길 때, 관객들은 아이돌과 하나가 되는 전율을 경험한다. 이런 체험은 단순한 즐거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입문의례와 같다. 작은 나로부터 더 큰 나로 확장돼 나가는 입문의례. 요즘 팬덤이 환경, 정치, 소수자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눈보라 치는 광장에서 응원봉을 흔들던 이들도 바로 그 팬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무신론자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융의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종교적이다. 종교란 자기 한계를 넘어 ‘더 큰 힘’과 접속하고, 그를 통해 존재적 변형을 경험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보다 의미 있는 존재이기를 원한다. 니체의 말처럼 차라리 고통을 견딜지언정 무의미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적 태도는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은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p572)


그것을 ‘신’이라 부르건, ‘신념’이라 부르건, ‘무의식’이라 부르건, 이름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경험이다. 인간은 의식 너머의 ‘무한한 것’을 감각하며, 조금 더 능동적이고, 더 품 넓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종교는 오랫동안 그 무한한 것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는 그 다리를 미신이라며 걷어차 버렸다. 그 결과는 아는 대로다. 재력이나 재능, 혹은 미모같은 사소한 일에 매달리다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융은 종교와 의례를 다시 불러낸다. 다시 교회에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끊어진 다리를 다시 이을 힌트를 얻자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융이 주목한 건 그리스도교의 미사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본인이 유럽인이기에 가장 친숙한 종교에서 길을 찾았다. 융은 그런 사람이다.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길을 찾는다. 게다가 미사는 인간 정신의 변화를 하나의 서사로 완성한다. 예수의 탄생,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일련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출처 - 넷플릭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 -봉헌(Oblatio)
미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을 재현한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들어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선언했는데, 이 장면이 미사의 주요 모티브다.

실제 미사는 더 복잡하지만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봉헌(Oblatio), 거룩한 변화(축성 Consecratio), 그리고 영성체 나눔(Communio). 그중에 ‘봉헌’은 빵과 포도주를 신께 봉헌하는 전반의 과정을 포함한다. 사제는 십자가 앞에 빵을 들어 올리고, 약간의 물을 섞어 포도주를 올린다. 단순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이 속엔 깊은 상징이 숨어 있다. 지금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왜 굳이 인간이 되어야 했을까? 전통적인 대답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단번에 죄를 사면해 주면 될 일이다. 굳이 고통스럽게 인간이 될 필요까지는 없다. 해서 융은 다른 해석을 덧붙인다.

미사는 인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신의 변환, 즉 인간화와 절대 존재의 회귀라는 신비와 기적을 본질적 핵심으로 지니고 있다. 인간 자신은 봉사하는 도구로서 헌신과 자기희생을 통해 이 비밀스런 과정에 편입된다. (「미사에서의 변환의 상징」, C.G.융,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솔, 2008, p189)


전지전능한 신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한없이 불완전하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병들고, 늙고 죽는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불완전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불완전이어야 할까? 융이 말했듯, ‘완전한 것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 이와는 달리 불완전성은 미래의 개선의 싹을 간직하고 있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p346)’ 그렇다. 이미 완전하다면 변화할 필요도 없고,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신이 인간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 생성하는 존재이고 싶어서일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신이 인간이 됨으로써,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신의 변환에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이 되어 버린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p227) 제 아무리 신의 아들이라 해도, 일단 인간이 된 이상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먹고, 자고, 입는 것, 모두 다른 이의 손길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예수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오히려 예수에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상은 달라진다. 신의 도움을 받는 자에서 신을 돕는 자로. 신의 변환에 동참하는 인간이라니!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이 맥락에서 빵과 포도주는 ‘불완전성’으로 다시 읽힌다. 융에 따르면, 순교자 유스틴(Justin)은 빵을 ‘문둥병’이라 했고, 「계시록」은 포도주에 섞인 물을 ‘탕녀(蕩女)’에 비유했다. 이것은 제물이 더럽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사의 주인공이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 예수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미사에 등장하는 예수는 전능한 신이라기보다, 불완전함을 기꺼이 짊어진 인간이다. 그 불완전함이 인간도 신의 변환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장 유쾌한 역설이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희생-거룩한 변환(Consecratio)
봉헌이 끝나면 미사는 ‘분향’으로 이어진다. 사제는 향로를 흔들며 성호를 긋고 연기를 피워 올린다. 향으로 제물을 정화하고, 연기로 하늘의 신을 초대하는 것이다. 융은 이 과정을 우리 내면의 신, 즉 무의식을 부르는 일이라고 보았다.

분향이 끝나면 사제는 신의 강림을 청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곧이어 빵과 포도주를 향해 선언한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 잔이 내 피의 잔이다!” 여기가 미사의 절정이다. 불완전했던 빵과 포도주가 신의 몸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미사에서는 ‘거룩한 변환’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희생,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빵과 포도주가 신의 몸이 되는 ‘거룩한 변환’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바로 예수의 ‘거룩한 희생’ 덕분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희생제의다. 제물을 바치고, 분향을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그런데 문제는, 고대의 희생제의가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데 있다. 때로는 인신공양으로 사람을 바치고, 짐승의 배를 갈라 신의 환심을 샀다. 타자의 목숨을 빌어 풍요를 빌거나 재액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희생은 달랐다. 타인을 제물로 삼는 대신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바친다. 세상의 증오와 악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으로 짊어진 것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예수는 나의 복을 빌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대신, 나를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을 잔혹한 폭력에서 해방시키고 비폭력의 윤리로 나아가게 한 자기희생이라는 사랑.

이처럼 그리스도의 삶은 거대한 하나의 희생제의고, ‘그리스도는 희생을 바치는 자이면서 희생물이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p181)’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사 안에서도 반복된다. 다시 상기해 보면, 사제는 거룩한 변환을 선언하면서 1인칭으로 ‘나’라고 말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미사의 성격은 완전히 변한다. 예배당은 신이 강림한 현장이 되고, 예배에 참석한 모든 것들은 직접 신을 만난다. 신도들 각자가 자신의 맥락에서 신을 만나고, 자기 변환을 겪는 것이다.

이때 말하는 변환이란 단순히 조금 달라지는 게 아니다. 신을 만난 사람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는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 시민이었지만, 길에서 예수의 형상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박해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존재의 지층이 흔들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융이 말한 종교적 변환이다. ‘미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의 변환인 동시에 우리 심혼의 변환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p262)’


부활, 별난 존재 되기-영성체(Communio)
거룩한 변환이 예수의 죽음을 상징한다면, 영성체는 부활을 얘기한다. 이제 사제는 빵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일부를 포도주잔에 넣어 섞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육체가 성령(포도주)을 만나 부활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예수가 부활하고 나면 신도들은 기쁨 속에 영성체를 나누어 먹는다.

부활.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직후 곧바로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흘의 시간이 걸렸다. 이 지체의 시간은 미사에서도 재현된다. 거룩한 변환 이후, 빵과 포도주가 다시 혼합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활에 이른다. 이때 빵은 죽은 예수의 몸이요, 포도주는 혼이다. 말하자면, 무덤에서 쉬는 주님의 몸이 다시 성령과 결합하는 과정이 있어야 부활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에는 빵과 포도주의 혼합, 즉 대극의 결합이 필요하다. 부활을 다른 말로 한다면 재탄생, 혹은 존재적 변환쯤 될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환은, 반대되는 것들의 만남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아이가 태어나고, 죽음이 있어야 삶이 완성된다. 빛도 마찬가지다. 어둠이 없는 눈부심은 빛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래서 부활은 종종 남녀가 뒤섞인 자웅동체로 묘사된다. 어딘가 기괴하고, 낯설고, 불편한 모습으로.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정신적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융은 예수의 부활을 정신적 ‘자기성찰’에 비유했다. 즉, 무의식에 흩어진 ‘토막난 정신’을 모아서 다시 통합하는 것을, ‘자기성찰’, 혹은 ‘개성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 ‘토막난 정신’이 대개 기괴하고, 어둡고, 꺼려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예수의 토막난 몸은 끔찍하고 처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몸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바로 하늘로 돌아가는 승천만 있었을 뿐.

이처럼 부활은 천상으로의 도약이 아니다. 차마 보기 힘든 어둡고 처참한 것들을 의식 위로 끌어 올려 함께 하는 일이다. 그래서 융은 자기성찰, 즉 개성화 과정을 ‘별난 존재(Sonderexistenz)’가 되는 길이라고 했다. ‘별난 존재’란 모순과 역설, 그리고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매끈하기보다 별나기를 선택한다. 이 별남 속에서 ‘자아 집착성은 철회되고, 의식의 폭은 확장되며, 모순의 의식화를 통하여 갈등의 근원이 소멸된다.(『인간의 상과 신의 상』, p251)’

이제 예수는 부활했다. 이제 할 일은 신도들이 함께 영성체를 나눠 먹으며 부활을 축하하는 일이다. 이때 신도들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는 사건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개인적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건, 동시에 옆 사람과도 이어진다는 뜻이다. 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 신비이기에, 신을 체험하고 나면 좁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미사는 매주 반복되어야 한다. 서로의 무의식이 열리고 ‘삼라만상이 교감하고 감응’하는 경험은, 흩어진 마음을 다시 묶고, 고립된 자아들을 다시 잇는다. 이것이 빵과 포도주가 일으키는 가장 현실적이고 신비한 기적은 아닐까?

 


마법과 종교, 어디에 설 것인가?
미사는 끝났지만, 이 지점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미사가 가진 ‘인간적 측면’이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중심으로 미사를 이야기했지만, 사실 미사는 신도, 즉 인간들을 위한 의례다. 신도들이 미사에 모여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다르게 살고 싶다’, ‘변하고 싶다.’ 미사는 이 염원을 공동체 차원에서 정교하게 다듬어낸다.

그렇다면 신도가 미사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사의 주인공 빵과 포도주를 보자. 신의 차원에서 빵과 포도주는 불완전한 피조물일지 몰라도, 인간의 차원에서는 다르다. 밀과 포도는 자연(신)의 산물이지만,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땀과 정성, 그리고 기술이 더해진 문화(인간)의 산물이다. 요컨대, 인간의 차원에서는 최상의 것이자, 최선의 것이다. 그러니 빵과 포도주를 바친다는 건 단순히 음식을 올리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일과 같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자기를 희생했다면, 인간은 봉헌물을 바치는 것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헌물을 바치는 일에는 마음이 중요하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적당한 수준’을 찾는다면, 그것은 봉헌물이 아니라, 신에게 댓가를 요구하는 거래다. 융은 말한다.

희생이 되려면 무엇을 줄 때 늘 생기곤 하는 ‘주고받고자’하는 의도가 희생, 포기되어야만 한다. 만일 주는 것이 희생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준 것을 마치 파괴되어 없어져 버린 듯이 완전히 내주어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이기적인 요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생긴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미사에서의 변환의 상징」, p239)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교환의 법칙 위에 서 있다. 선물도, 사랑도, 심지어 봉헌조차도 계산하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희생의 부재. 바로 여기서 종교와 마법이 갈라진다. 희생 없는 변환은 결국 기복적인 마법이 된다. 마법은 ‘내 뜻대로’ 세계를 움직이려는 시도이며, 타자의 목숨을 바쳐 내 복을 구하는 일이다. 한편, 종교적 희생은 모든 계산을 파괴한다. 내가 줬다는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불교의 ‘무주상보시’다.

 



이 차이는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희생 없는 종교는 곧 기복적 신앙이나 심리적 위안으로 미끄러진다. 오늘날 자기 계발·힐링·영성 산업이 약속하는 ‘변화’도 대부분 이런 범주다. 변환을 말하지만, 희생은 말하지 않는다. 자아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몸집을 키운다. 우리는 어느새 무의식적인 마법 소비자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사실 기독교의 미사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융에 따르면, 종교적 체험은 원래 왕이나 사제 등 특권층만 누리를 수 있는 호사였다고 한다. 그러다 점차 귀족들에게까지 문이 열렸고, 로마 시대에는 거의 스포츠처럼 행해졌다. 이 전통은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을 제공하고자 했고, 누구나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변환을 체험하기를 바랐다. 아마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건 이 공유된 체험일 것이다. 하여 해야 할 일은 의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지만, 인간은 쌓기만큼 비우기도 좋아한다. 의례는 바로 그 비움에 대한 오래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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